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이진경 지음 / 소명출판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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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선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인사이다. 특히 나에게는 그 의미가 남다른데, 그에 의해서 철학을 알게되었고, 푸코에 매료되었으며, 맑스를 위시한 사회구성체 논의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방면으로 박식하며, 그 깊이 또한 꽤 전문적이다. 예를 들어, 앞전에 출판했던 <수학의 몽상>이 그러한 경우다.

이번의 책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은 이진경 선생의 전공에 관한 치밀한 연구다. 특히 나에게 이 책은 그가 다소 생소한 공간사회학의 분야를 푸코를 통해 연구하면서 건축학에 대해 얼마나 열심히 파고들었는가를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나 역시 사회학을 전공하였지만, 이렇게 사회과학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공간사회학의 의미를 도드라지게 한 연구는 접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또한 이진경 선생 자신에게도 이 연구는 그가 <맑스주의와 근대성> 등에서 강조한 '주체생산양식'에 대해 실증적인 검증을 했다는 점에 있어서 의미가 컸을 것이다.

이 책에서 이진경 선생은 공간을 '배치'의 문제로 접근하였는데, 공간적 분포의 분석방법에 있어서 1) 접근가능성 2) 비대칭성 3) 통합성 4) 응집성 등의 개념으로 그 과학적인 분석을 수행한다. 이를 통해 욕망 혹은 권력의 개념이 어떻게 주체의 것으로 생산되는가 그 메커니즘을 살피고 있다. 이것은 들뢰즈와 푸코가 만나는 접점이며 마르크시즘의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문제틀이 확장되어 포스트-마르크시즘에서 다루어지는 문제틀이다.
나에게 이 문제는 현대사상의 핵심으로 보인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스피노자와 니체를 경유해 들뢰즈와 푸코로 나아가는 힘[potnetia] 개념이 욕망의 문제로 어떻게 전화하는 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주체가 스스로를 규정하려는 힘과 사회-문화적 환경이 주체를 규정하려는 힘이 만나는 접점의 문제를 사유하는 개념이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주거공간을 통해 욕망의 규정 문제를 접근하는 이진경 선생의 이 논문은 아주 흥미롭다. 인문사회과학 분야 전공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물론, 건축학과 학생들에게도 흥미로운 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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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상 10 - 개혁은 언론플레이가 아닙니다
강준만 외 엮음 / 개마고원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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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선생님은 내가 평소에 사숙하는 분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누가 조선일보를 규탄할 수 있었겠으며, 그가 아니었다면 누가 어용과 자유주의의 가면을 쓴 지식인을 비판할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실명비판이라는 사회적 통념과 금기를 깨뜨리는 비판을 통해서. 그것은 강준만 선생님 스스로에게도 큰 억압과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런 곤란함을 무릎쓰고도 지적인 활동을 왕성하게 펼치는 점에 있어서 나는 그를 사숙해왔다. 더구나 그의 다방면에 걸친 왕성한 활동은 우리에게 진정한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더없이 기뻤다. 앞으로 학자의 입장에서 학문의 길로 들어설 나에게 그것은 하나의 모범과 같았다.

'인물과 사상' 씨리즈는 이런 점에 있어서 강준만 선생의 수많은 저서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가 많은 활동으로 바빠지면서, 또한 '인물과 사상'이 볼 수 있는 시야를 넒히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높인다는 점에서 김규항씨나 조흡씨 등을 필진으로 첨가했다는 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그의 대표적인 저작이나 공로로 삼을 수 없다고 보진 않는다. 강준만 선생님이 해낸 지식인들의 언론플레이에 대한 비판은 상당히 효과적이었고, 그 의도 역시 한사람의 일방적인 비판이 아니라 사회의 공론영역을 확대하여, 스스로의 자정 능력을 키우기 위함이였기 때문이다.

즉, 한 사회가 부정부패와 억압 및 강제의 논리로 작동할 때, 사회를 정화하고 공정한 합리성에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은 그 사회의 공론영역을 확보하는 것인데, 강준만 선생님은 그런 점에 있어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 분을 개인적으로 아는 바는 없지만, 그의 책을 읽고서 팬이 되어버렸다. 특히 10호에 게제된 복거일씨에 대한 비판이 나에게 잘 다가왔다. 평소에도 복거일씨에 대한 자유주의적 입장이 올바르게 수정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른 지면에서 강준만 선생님이 비판한 자유기업센터의 공병호씨에 대한 비판을 보신 분이라면 여기에 대한 찬성하실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자유주의자가 아닌 '유사-자유주의자'이며 노직과 하이에크를 부분적으로 원용한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반론하실 분은 자유기업센터에서 펴낸 '자유주의 大賞'이라는 것이 있는데, 복거일씨가 심사위원으로 등장하였던 것을 기억해보면 그들의 연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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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이데올로기 1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박재희 옮김 / 청년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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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머리와 정신과 양심을 차지하고 있는 사상들은 우리의 가슴을 찢지 않고서는 늦출 수 없는 사슬들이다. 그 사상들은, 그 사상들을 따라가야지만 승리할 수 있도록 성가실 정도로 끊임없이 일깨워준다.'

이 땅에 유물변증법이 변혁주체에게 '비판의 무기'로 수용되고, 그 토양을 마련하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 이후이다. '특정시기에 있어서 혁명적인 사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곧 하나의 혁명적인 계급이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는 말처럼 그 자체가 혁명적 변증법인 유물변증법을 요구한 만큼, 이 땅의 현실과 운동은 첨예한 모순 구조 속에서 양적, 질적 발전을 이루었다.

합법 공간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듯 출판되었던 헤겔과 마르크스주의의 해설서들은 변혁운동 세력의 학습에 대한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물변증법'의 수용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 수반되는 현상들을 또한 전제로 함을 의미한다.

'구체적 현실'의 '구체적 분석'에 근거하는 이론이 실천적 방법론으로 전화하는 기점에서 본질적으로 제기되는 '세계관'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수탉'으로 치장한 오리나 꿩의 울음소리와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큰 울음소리를 대신할 수 없듯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새로운 혁명적 세계관은 부르조아의 쁘띠 부르조아지에 대한 투쟁 속에서 단련되었으며 레닌은 새벽이 도래함을 증며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자임을 자칭하는 '경제주의자', '수정주의자'들과의 '세계관'에 대한 일련의 투쟁 속에서 '철학의 레닌적 단계'라는 개념까지 제기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수용과정에 있어서 문제점은 첫째로 마르크스주의의 세가지 원천으로서 레닌이 지적하는 '독일관념론,프랑스 사회주의, 영국의 고전경제학'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과학적 세계관'과 비매개적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새로운 문제를 낳는다. 마르크스는 '무엇을 어떻게' 소화, 흡수하며 '과학적 세계관'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동시대인과 이 땅의 변혁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제시하며, 그것의 올바름을 설득하려 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과학적 세계관은 선험의 영역으로 밀려나버려 맹목적 실천의 장으로 뛰어들거나, 마르크스 주의를 의식, 무의식적으로 접어둔 채, '과학적 세계관'을 초월하게 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과학적 세계관을 형성해나가는 초기저작은 세계관(철학)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의 형성에 관한 학습은 변증법적 유물론적인 사고에 관한 훈련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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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왕필주
왕필 지음, 임채우 옮김 / 길(도서출판)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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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을 읽을 때, 그 전체적 이해의 틀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난감했었습니다. 동양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면도 있겠지만, 우리의 교육체계상 수학은 그 어려운 미적분까지 다 배우면서 우리의 고전인 논어나 주역은 읽지 못하는 실정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 기회에 주역을 읽었습니다. 그 책의 역자는 왕필의 주역을 처음 접했을 때 '맨 아래에 양효 하나가 있는 복괘의 괘상을 두고, 왕필 이전이나 이후의 역학자들은 모두 양陽이 아래에서부터 점차 자라나오는 '일양시생一陽始生'으로 '회복'되어 나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었지만, 오직 왕필만은 맨 아래의 양 하나가 땅속에서 결국 꺼져버리고(動息地中) 적연한 무无의 세계로 '복귀'하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어떤 함의를 가지며 또 적절한 해석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성리학이나 불교의 體用論과 달리 주역에서 體는 잡다하고 우연한 것이고, 用은 작용·기능의 의미로 본질적이고 일차적인 중요성을 갖는다고 각주(26쪽)가 달려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대비하여 이해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전체를 들자면 乾의 體는 다 용이지만, 나누어 펴면 각기 그 義를 따르는 것이다.'(33쪽)는 구문은 이해되어야 하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책의 구절 가운데엔 좋은 말들이 많습니다. '陰의 도는 (자신을) 낮추고 유순하며 교만하지 않아서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하는 것이나, 한없이 성대해져서 陽의 지역을 점거하니 양이 견디지 못해 들판에서 싸우게 된다.'나 '大有는 크게 형통하니라.'는 구문은 계속 읽다보면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음이란 존재는 세상을 따라서 처할 뿐 홀로 설 수 없으니 반드시 매임이 있어야 한다. 비록 몸은 하괘이나, 이효가 이미 초효를 차지하였으니 장차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그러므로 초효를 버리고 사효에 매이니 뜻이 장부에 있고 사효도 똑같이 응함이 없어 자기를 따르고자 하니 그 구하는 바를 얻게 되므로 '수유구득隨有求得'이라 하였다.'와 같은 구문은 하이데거의 존재의 은폐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하늘의 하는 바를 아는 자는 이치를 궁구하고 변화를 체득하며 앉은 채로 잊어 따지는 것을 버리며 (자신을) 텅 비워 (외물에) 잘 응한 즉 도라고 호칭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현묘하게 비추니 신이라 이름하고 대개 도에 바탕해서 도와 동화하고 신에 말미암아 신에 명합冥合하는 것이다.'는 구문은 김용옥 선생이 말한 동양에서의 잠재태 개념으로서 虛와 연관하여 이해할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고전을 많이 읽어, 우리의 선조들이 이해했던 세계에 대한 생각을 이어받을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그래야만, 주역을 이상한 점치는 책으로 이해하는 우리 대중문화의 속화와 희화화에서 구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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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118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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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시인은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시인이다. 마치 박상륭 선생이 '내가 살아있었다는 울음을 내 귀에라도 육성으로 들려주려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했듯이, 허수경 시인은 삶에 대한 깊이있는 천착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박상륭처럼 독특하고 한편으로 다른 깊이를 지닌다. 그는 우리의 마음이 역사의 운명 속에 자리잡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오히려 역사의 운명이 마음에 대상화(gegenstandlichung)하는 것을 거부한다. 즉 세상의 삶에 대해 울음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 울음을 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에로 돌아가는 것이 한 삶, 한 思惟의 道程이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나 울었던가/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不醉不歸」)' '잠드는 것처럼', '죽는다는 것처럼' 혼자가는 먼 집으로 달려가는 各各의 마음들이 서로 나그네되어 어루만져 주는 황량한 道程. 그래서 허수경 시인의 유리걸식을 읽으면 조용히 눈물이 흐른다.

새랑 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 속량되면서 이 지상 끝나도록 울음을 토하는 반복된 연습뿐. 결국은 나만이 들어줄 나의 울음소리를 질러내기 위해서. 나의 마음은 오늘도 지친 걸음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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