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역 왕필주
왕필 지음, 임채우 옮김 / 길(도서출판)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주역을 읽을 때, 그 전체적 이해의 틀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난감했었습니다. 동양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면도 있겠지만, 우리의 교육체계상 수학은 그 어려운 미적분까지 다 배우면서 우리의 고전인 논어나 주역은 읽지 못하는 실정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 기회에 주역을 읽었습니다. 그 책의 역자는 왕필의 주역을 처음 접했을 때 '맨 아래에 양효 하나가 있는 복괘의 괘상을 두고, 왕필 이전이나 이후의 역학자들은 모두 양陽이 아래에서부터 점차 자라나오는 '일양시생一陽始生'으로 '회복'되어 나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었지만, 오직 왕필만은 맨 아래의 양 하나가 땅속에서 결국 꺼져버리고(動息地中) 적연한 무无의 세계로 '복귀'하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어떤 함의를 가지며 또 적절한 해석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성리학이나 불교의 體用論과 달리 주역에서 體는 잡다하고 우연한 것이고, 用은 작용·기능의 의미로 본질적이고 일차적인 중요성을 갖는다고 각주(26쪽)가 달려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대비하여 이해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전체를 들자면 乾의 體는 다 용이지만, 나누어 펴면 각기 그 義를 따르는 것이다.'(33쪽)는 구문은 이해되어야 하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책의 구절 가운데엔 좋은 말들이 많습니다. '陰의 도는 (자신을) 낮추고 유순하며 교만하지 않아서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하는 것이나, 한없이 성대해져서 陽의 지역을 점거하니 양이 견디지 못해 들판에서 싸우게 된다.'나 '大有는 크게 형통하니라.'는 구문은 계속 읽다보면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음이란 존재는 세상을 따라서 처할 뿐 홀로 설 수 없으니 반드시 매임이 있어야 한다. 비록 몸은 하괘이나, 이효가 이미 초효를 차지하였으니 장차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그러므로 초효를 버리고 사효에 매이니 뜻이 장부에 있고 사효도 똑같이 응함이 없어 자기를 따르고자 하니 그 구하는 바를 얻게 되므로 '수유구득隨有求得'이라 하였다.'와 같은 구문은 하이데거의 존재의 은폐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하늘의 하는 바를 아는 자는 이치를 궁구하고 변화를 체득하며 앉은 채로 잊어 따지는 것을 버리며 (자신을) 텅 비워 (외물에) 잘 응한 즉 도라고 호칭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현묘하게 비추니 신이라 이름하고 대개 도에 바탕해서 도와 동화하고 신에 말미암아 신에 명합冥合하는 것이다.'는 구문은 김용옥 선생이 말한 동양에서의 잠재태 개념으로서 虛와 연관하여 이해할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고전을 많이 읽어, 우리의 선조들이 이해했던 세계에 대한 생각을 이어받을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그래야만, 주역을 이상한 점치는 책으로 이해하는 우리 대중문화의 속화와 희화화에서 구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