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행위이론 I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 의암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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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위대한 이론의 용광로! 이것이 내가 파악하는 이 책 <소통행위이론>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짧은 말이 될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 거대한 저작을 통해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가 어떤 식으로 발전해 왔으며, 또한 그 발전의 과정 속에서 어떻게 체계적으로 인간을 억압하고 왜곡시켜왔는지를 지리하리만큼 상세하게 탐구하고 있고, 또한 이에 대한 상당히 구체적인 대안을 이전에 행해진 사회연구들에 대한 포괄적 비판을 통해 도출해 내고 있다.

하버마스는 1970년대에 있었던 루만과의 논쟁을 통해서 자신이 이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사회이론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들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하여 세상에 내놓을 필요성을 절감한 끝에 본 저서인 <소통행위이론>을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책 자체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을 하자면 1천여개의 참고문헌을 통해 1천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하고 풍부하며 난해한 작업을 통해 이 책을 집필한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 책에서 막스 베버 이래로 관심이 집중되었던 서구사회의 합리화의 과정에 대한 탐색을 통해서 어떻게 사회의 구조가 결정지워 졌으며, 또한 이러한 합리화의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되었던 왜곡된 사회의 측면을 찾아내려 하고 있으며, 이전의 연구자들이 행하였던 업적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이들의 연구에서 발견된 오류들을 정정하고 나아가 이러한 정정과 함께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 위대한 해방의 지평으로 의사소통의 합리화을 제시하고 있다.

반복되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하버마스는 막스 베버,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미드와 뒤르껭, 파슨스에 걸쳐서 종합적인 비판을 통해 자신의 소통행위의 개념을 이끌어 내고, 또한 자신의 이론이 이제 이전의 비판의 여지가 농후한 연구들을 종합하고 보완한, 사회이론의 최종적-지금까지는-결정체라고 여기는 듯 하다. 이 책이 하버마스의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Bd. Ⅰ·Ⅱ 중 Ⅰ만을 번역한 것이기에 하버마스의 소통행위이론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조금 우스운 이야기지만, 내가 다니는 대학에서 사회학과 교수님이 이 책 번역자 중의 한 분이셨는데, 2권을 번역할만한 시간이 없으시다고 하신다. 그분 연구실적이 많아서 뭐라 부탁할 수는 없지만, 책의 2권이 빨리 번역되어 나왔으면 하는 심정이다. 하버마스의 이론은 우리나라에 소개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가운데 가장 많이 연구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그의 이론은 매력적이다. 따라서 그의 주저인 의사소통이론을 읽어본다면 대학자의 넓은 사유영역에 빠져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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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상 1 - 정권 교체가 세상을 바꾼다
강준만 외 엮음 / 개마고원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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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물과 사상 1권이 처음 나왔을 때, 세간의 반응은 흥미로웠다. 실명비판이 과연 정당한 것이냐, 혹은 문제의 소지가 많은 것이냐는 반응이다. 흔히들 TV 뉴스에서는 일반시민이 어떤 죄를 저질렀을 때, 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김모씨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과연 그 사람이 공인일 때, 그리고 그 잘못이 명백하게 드러나야 할 때, 실명비판을 하는 것이 잘못일까?

강준만 교수는 명백히 아니라고 말한다. 즉, 실명비판을 통해 언론을 순화하고, 공론영역을 확대할 때에만 이 사회에 진정한 합리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령, 우리나라에는 정경유탁과 온갖 비리가 난무한다. IMF도 사실은 그런 구조가 극에까지 달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사회구조를 개혁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여기에 대해 강준만 교수는 실명비판을 통해 극복을 감행한다. 그리고 지금 열 몇권이나 나온 인물과 사상 의 성과를 비추어볼 때, 그것은 유효했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판단했다. 공인으로서 권리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공적인 부분에서 책임을 져야할 부분이 그들의 권리보호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많이 은폐된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잘못이 있으면 마땅히 처벌하고 그 죄를 물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강준만 교수의 인물과 사상 씨리즈는 이 사회에 마치 판관 포청천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 책 1권에서 그는 당시 정권교체의 문제를 물었다. 그것은 김대중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이땅의 지역감정과 서울/지방의 극심한 격차를 줄이기 위한 첫단추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건희 회장의 인간개조론 을 통해 삼성이라는 굴지의 대기업이 가진 문제점을 진단한다. 예컨데, 무노조 경영 의 폐혜도 이런 문제에서 시작한다.

그렇다고 그가 비판만하는 것은 아니다. 이효재씨와 같은 분들을 칭찬하기도 한다. 그가 원한 것은 일방적인 비판이 아니라, 이 사회의 공적부분에 대한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가 권력을 가졌고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아부만 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사회는 부패로 가득할 것이다. 비록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지라도 끊임없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충신들이 가득할 때, 나라는 바로 설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정착되면 높은 사람에게 비판을 한다 하여도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사회가 마련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준만 교수와 같은 사람들이 좀더 많아졌으면 한다. 아는 만큼 실천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인물과 사상 1권에는 유명한 서울대 망국론 이나 정태춘씨와 다니엘 부어스틴에 대한 소개도 나와 있다. 이래저래 교양을 쌓고 실천적인 힘을 기르는데 많은 도움이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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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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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홍세화 선생님의 책이 출판되었을 때, 그런 내용을 담고 드물게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유는 진솔한 공감대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자칫 교조적으로 몰릴 수 있는 90년대 이후의 운동권은 아니지만,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남민전의 전사로서 홍세화 선생님의 삶을 일반 사람들의 삶의 시선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대학교를 다녔었고, 그때만해도 전경들이 교내로 몇번 들어오곤 했었다. 지금은 운동권 학생이라고 할만한 집단이 거의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전경들도 보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실천 이 사라져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홍세화 선생님의 책은 운동권 안에서만 사고할 수 있었던 오늘날의 대학생들에게 그 안/밖을 두루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특히 기억나는 부분은 홍세화 선생님의 할아버지가 이야기하신 개똥 세 개 이다. 나 역시 지금 많은 개똥을 먹고 있다.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행동해야 할 때에 행동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항상 고민만은 끊임없이 하고 있고 언젠가는 바꿀 것이라고 다짐하는 나에게, 홍세화 선생님의 글을 좋은 매질을 가한다.

우리 사회에는 왜 똘레랑스가 없는가? 우리 사회에는 공동체주의는 커녕 왜 자유주의도 없는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안위나 그들의 가족만이 잘되면 된다는 편협한 가족주의에 빠져있는 것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후쿠야마가 트러스트 라는 책으로 이미 우리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가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홍세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슬펐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그가 어렵게 프랑스에 정착했기 때문이 아니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꼬레아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시간은 흘러도 우리사회는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애써 만들어진 발판도 쉽게 부서지기 때문이다.

얼마전 홍세화 선생님이 조국으로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었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이제 우리사회에도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났으면 한다. 다들 의식개혁은 가장 이상적이면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는 의미없는 대안 이라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홍세화 선생님의 책이 그런 토대가 될 것이다. 투철한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그는 실천하면서 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존경한다. 그의 글들을 좀더 많은 지면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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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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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의 장편소설인 <日蝕>은 평소 소설책을 잘 사보지 않던 내가 근 3년만에 사본 소설책이었다. 대체로 책을 사서 읽기 때문에 3년만에 읽어본 소설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 있어서, 그의 글을 나는 찬찬히 음미하면서 읽어보려고 했다. 매일 전공책이 찌들려살다가 잠시의 외도를 여유롭게 즐겨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웬걸! 그의 소설은 <금각사>나 <雪國>과 같은 일본 소설의 분위기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하룻밤도 채 지나지 않아 그 소설을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흥미로운 책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사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일간지마다 광고를 무수하게 내었기 때문이다. 교토 대학 법학부(우리의 서울대학교 법대와 같은 위압감을 준다)에 스물 세 살의 청년, 갈색 머리에 은빛 귀걸이...

흔히 그렇듯이 광고지는 소설가를 상품으로 만들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독자들이 책을 사도록 이끄는 유인들을 거의 다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120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도 그런 의미에서 좋은 유인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많이 팔리긴 했다. 하지만, 나는 소설을 그런 식으로 팔려고 하는 것에 염증이 난다. 이미 영화예고편과 같은 것에서 그런 속임수를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교토 대학교 법학부에 다닌다거나 그의 외모나 이미지가 어떻다는 것은 그의 소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오해를 주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나는 그런 광고가 싫었다. 그러나 일본의 소설을 즐겨 읽었었던 나는 이 책을 읽고 현대일본의 젊은 작가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조금은 살펴볼 수 있었다. 물론, 히라노 게이치로만의 독특한 부분도 있겠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를 맛볼 수 있었다.

책의 주요내용에 대해서는 미리 말하면 재미가 없지만, 모든 내용은 안드로규노스 에로 집약된다. 그것은 兩性의 괴물이다. 솔직히 이런 괴물을 등장시키는 것은 추리소설 중 가장 저급한 사건해결 방식이다. 그러나, 게이치로는 서구의 중세 라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중세라면 그러한 이야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 소설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게이치로의 문체가 주는 효과도 이런 중세를 배경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배가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법학부 특유의 한자어 사용도 한몫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결국, 이 소설의 미궁은 안드로규노스에 있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이 소설의 한계이기도 하다. 책이 적어도 추리소설의 형태를 띤다면 독자들 중 몇몇은 수수께끼를 풀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소설은 그렇지 못하다. 다만, 의외의 결말이 신기하게 다가올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히라노 게이치로가 일본문학계에 등장한 것이 이 소설에서 안드로규노스가 등장한 것과 왠지 닮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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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 - 이데아총서 64 현대사상의 모험 28
미셸 세르 지음, 이규현 옮김 / 민음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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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들이 후기구조주의의 바람을 타고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다. 그 가운데 이렇게 미셀 세르의 <헤르메스>도 포함되었다니 감회가 새롭다. 헤르메스는 잘 알다시피 신들의 소통을 맡았던 전령이다. 그가 말하는 소통은 다방면의 지식을 소통하고 상호 간섭하는 것으로, 과학과 철학 및 철학과 문학 등을 가로지르며 이루는 방법의 전이이다. 그것은 관계들에 관한 이론이다.

결국, 세르는 이와 같은 근접화와 상호 접근의 작용소에 헤르메스라는 이름을 붙인다. 과학 시간에 배웠다시피, 간섭 은 원래 물이나 빛의 상호작용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물이나 빛은 각 학문의 영역들이다. 그러니까 세르는 학문 내의 지식의 경계를 다시 의문시하고 그 분절에 소통을 내자고 주장한다. 즉, 학제성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에 박혀 있는 근거없는 분절에 다시금 성찰과 반성을 꾀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각 학문의 자기-준거성이라든지 그 정체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세르에게서 과학 개념이 많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것은 다 이와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미셀 세르를 후기구조주의의 담론 속에 포함시키는 것은 당여하다 하겠다. 그야말로 차이 를 사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간적인 파악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세르의 주체 개념도 특별하다. 즉, 사유 주체로 전제된 인간을 간섭공간의 일부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세르에게서는 사유주체가 상호주관성의 망에서 일시적인 선별 가능성, 의미와 잡음을 여과할 순수한 가능성, 발신과 수신의 매듭이 열혀진 입체교차로이다. 결국, 관계와 관계지어진 대상과 사건들의 분포를 이해하는 것이 세르의 사유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다시말해, 그에게서 이 세계의 분절지워진 질서는 무질서가 퍼져 있는 가운데 나타나는 희귀한 조직화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시야는 방대하고, 통찰은 깊다. 가장 있음직한 것은 무질서와 혼돈이다. 이를 그 시초부터 사유하는 세르의 저작이 헤르메스 이다. 비록 일부분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차차 번역이 완성되리라 기대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후기구조주의의 또다른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개념들과 사유를 하루빨리 더 만나보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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