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가타리
로널드보그 지음 / 새길아카데미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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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국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인기가 막 무르익기 시작할 때를 맞춰 번역된 그들에 대한 최초의 평론이다. 물론 이 책은 역자인 이정우 선생님의 지적처럼, 저자인 로널드 보그의 문학적인 입장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를 평가했기 때문에 그 철학적인 심오함은 잘 다뤄져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당시에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열풍과 달리 지금도 국내에 그들의 주요저작이 번역되어 있지 않으니 그 당시의 열악함은 어떠했으리.

이 책에서 로널드 보그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요한 철학적 작업인 <앙띠 오이디푸스>를 중점으로 분석한다. 즉 스피노자나 베르그송까지 아우르는 들뢰즈의 철학적인 계보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를 공정하게, 그리고 그 둘이 실제로 수행한 작업에 대해서만 평가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니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까지 다루고 있으며, 프루스트에 대한 들뢰즈의 사유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가타리 이전의 들뢰즈를 다룰 수 없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II부는 좀 더 실용적이다. 그들의 '소수집단의 글쓰기'나 '앙띠 오이디푸스'에 대한 평가는 들뢰즈에 대한 국내의 연구에 비해서는 다소 희소하기 때문이다. 로널드 보그는 들뢰즈의 차이의 존재론에 입각해 '욕망적 생산의 분열증 분석'을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작을 평가한다. 흔히 그들 작업에 있어 주변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프루스트 주해나 카프카 주해를 넣었다는 점에서 문학적인 측면에서의 평가라는 점이 눈에 띈다. 나의 생각으로 아직까지 이들의 이론이 문학에서 효과적으로 이용된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 저자 역시 그 측면을 생각했음을 밝히고 있다(256쪽 이하).

그렇다고 이 책이 그런 측면에만 경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로널드 보그 교수 역시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적인 깊이를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서 이들에 대한 연구를 로널드 보그 교수의 입장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일 것이다. 인터넷 상으로도 이런 토론도 가능할 수 있기를 바란다. 머지 않아 그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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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 헤게모니의 사회이론
로보트 보콕 / 학문과사상사 / 199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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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에게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운동하고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며 투쟁하는 영역'으로 비춰졌다. 이러한 투쟁과 이데올로기 형성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의식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데올로기는 '행동을 조직'하고 '주체를 형성'하는 실천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인간은 '사회적 블럭'에서 '보편적인 세계관=유기적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의식을 취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그것이 곧 정치적임을 입증할 수 있다.

또한 이데올로기적 실천은 물적, 제도적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그 대행자로서 지식인을 요구하고, 지식인은 '유기적 이데올로기'의 확산과 '도덕적, 지적 개혁'이라는 임무를 부여받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 확산을 위한 '헤게모니 장치'='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장치가 생산되고 확산되는 상부구조적 차원을 '시민사회'라 할 수 있겠다.

그람시는 이데올로기적 실천의 물질성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주체들의 계급적 입장의 기능'으로 파악하는 개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헤게모니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입'이 아니다. 그것은 기본계급이 행사하는 지적, 도덕적 지배이며, 이것이 타 (계급)집단과의 '이데올로기적 통일성'을 갖는 '유기적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게 한다고 하였다. '한 계급이 헤게모니를 지녔다고 했을 때,……이 의미는 그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사회에 강요하거나, 그 계급의 권력을 합법화시키는 장치를 확립하는 데 성공하여서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필연적으로 계급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며, 특정한 사회 역사적 상황 속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의 가치체계에 '접합'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기되었던 문제, '단일한 주체 하에서 사회집단과의 이데올로기적 통일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 그에 대해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게모니는 '지도계급에 의한 지적, 도덕적 지배'이다. 그 관계는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간의 '보편적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이 '헤게모니 블럭'을 통일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헤게모니 이론은 지금 사회학, 철학, 정치학 등의 영역에서 주요한 연구개념이다. 여기에 대해 이 책은 쉬운 이해를 주고 있다. 여러분도 한번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누가 좀 가르쳐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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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세계사 시인선 65
박상순 지음 / 세계사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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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의 詩를 읽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즐겁다. 그것은 그의 시세계가 여타의 시인들과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 공부를 하던 가운데, 불쑥 박상순씨가 낯설고 또한 화려하게 등단했던 것을 기억한다. 더욱이 나는 1991년 『작가세계』에서 그의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등의 시를 직접 마주했디 때문이다.

당시 그것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게 적어도 '아, 이렇게 시를 쓸수도 있구나'와 같은 감탄과 더불어, 내가 쓰고자 했던 시의 방향을 짐짓 보여줬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박상순씨가 펴낸 첫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를 잘 읽었으며, 곁에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두 번째 시집으로 손을 가져가게 되었다.

이 시집에는 해설이 없다. 그것은 시인에게 해설을 써줄만한 이가 없어서 그렇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데, 「양 세 마리」와 같은 시를 읽으면 그런 의혹을 더 짙게 하는데, 이 시가 보여주는 다분히 회화적인 이마쥬 때문이다. 전 시집에서는 박상순 시인은 그림을 첨가해서 시를 입체적으로 보여주었는데, 이번 시집은 굳이 그림을 그리지 않고 언어로서도 그림그리기가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발전적으로 보인다.

이 시를 가만히 읽고 있으면, 시가 갈라지는 큰 두가지의 방향도 읽게 된다. 시에는 메시지가 있는 시가 있고, 메시지가 없는 시가 있는데 박상순 시인은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물론, 메시지가 없는 시는 그 시가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의도가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순전한 언어의 투명성만으로도 시는 읽히고, 의미는 살아난다. 그것이 시의 매력이 아니던가! 마치 김춘수 시인이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왔듯이...

그런 점에 있어서 박상순의 시는 시인의 감성에 시인의 감성으로 다가가는 짜릿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시를 쓰지 않는 독자들에게도 이러한 전율이 느껴진다면 이미 당신은 또 하나의 세계, 즉 우리가 보지 못하고 사는 또 하나의 사고세계 혹은 감각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된다. 당신을 기꺼이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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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스테스 한길그레이트북스 42
플라톤 지음, 김태경 옮김 / 한길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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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의 각주라고 했듯이, 플라톤은 위대하다. 서구의 그 장대한 철학사가 결국 플라톤에게로 귀결되고 내포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의 소피스테스를 읽는다는 것은 즐거움이다. 더욱이, 나와 같은 철학 전공자에게 이 책은 대단한 흥미를 안겨준다.

한 예로 그들이 사용했던 용어를 잘 살펴보면, 라틴어와 연계해서 현대의 웬만한 철학 개념이 다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들뢰즈가 철학은 개념으로 이루어지는 학문이라고 했듯이 이러한 개념의 위계질서를 잘 파악한다면 철학사를 통찰하는데 큰 지름길이 될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이 이 책에서 하는 이야기도 개념의 문제이다. 특히 플라톤의 변증술에 있어서 나눔과 결합의 문제가 주요한 쟁점이다. 익히 알다시피 플라톤의 사상은 로고스에 입각해 현상과 형상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이데아에 의해 顯現되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플라톤은 이런 의미에서 세상과 이데아와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고 보았다. 따라서, 종에 따라 상위형상을 더 하위 종들로 나누는 절차가 필요하며, 이것을 통해 나눔이 목표로 하는 유와 종차에 의한 불가분적인 종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위계질서를 가장 풍부하고, 복합적이며 로고스에 입각해 절대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는 방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 단어를 규정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살펴보고 있다. 또한 그 이면에 이데아와 현상과의 관계로서 관여(methexis)와 같은 개념들을 논하고 있어서 더욱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역자가 책 앞머리에서 길게 해설한 플라톤의 각 저작의 의미를 되새겨두는 것도 전공자에겐 필요한 지식으로, 일반 대중들에겐 교양으로 유효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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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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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은 1968년 움베르토 에코가 1842년 빠리의 라 수르스 수도원 출판부가 펴낸, 「마비용 수도사의 편집본을 바탕으로 불역佛譯한 멜크 수도원 출신의 수도사 아드송의 수기」를 우연히 손에 넣게 됨으로서 쓰여진 소설이다. 역사적 전거가 확실치 않은 이 책을 바탕으로 에코는 추리형식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출판했는데, 그가 이 일을 감행할 수 있었던 힘은 위의 수기가 가져다 준 미묘한 애정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 자신의 학문적 지식과 배경이 바로 그 수도원에서 너무 집약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중세철학의 전반적인 의미와 그 한계, 그리고 소설의 화두인 '장미의 이름'이 어떻게 현대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많이 생각해보았다. 저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의 서문에서 이 글이 현대성을 띄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것은 역설이다. 왜냐하면 중세의 철학과 신앙을 문제로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이 현재성을 띄지 않는다면, 중세철학은 철학사에서 홀로 자족할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즉 중세는 희랍철학의 문제들을 계승, 나름대로 해결했다는 의미이며 근대에 철학사적 문제들을 남기지 않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보편논쟁과 현대 기호논리학의 관계, 데카르트, 영국경험론과 대륙합리론이 가진 문제와 해결들을 볼 때는 물론이며, 철학이 가진 문제사問題史가 완전한 해결은 가진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에코가 말하는 <장미의 이름>의 '현재성'은 역설적 의미를 띌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E. 질송의 <중세의 이성과 계시>(E. Gilson, Reason and Revelation in the Middle Ages, New York, 1966)과 같은 책을 읽고서 <장미의 이름>을 읽는다면 더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세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바로 에코이고, 그의 이런 박식함 속에서 이 소설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울러 나에게 이 책은 무게중심이 중세철학의 이성과 신앙, 그리고 양자의 조화를 알아보는데 있으며 중세의 '기독교적 권위'라는 패러다임paradigm을 깨트리려는 데 있다고 느껴졌다. 윌리엄 수도사의 의미와 그 역할이 너무 큰 것이 불만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 소설은 치밀한 논리로 쓰여진 아주 흥미진진한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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