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대중 철학자(이 용어가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표현을 philosophes actuels라고 하니) 미셸 옹프레(Michel Onfray)가 1989년에 발표한 『철학자의 뱃속(Le Ventre des philosophes)』, 원제는 철학자들의 배, 위장, 대략 그런 의미다. 이와 비슷한 책은 거의 없을 정도다. 당시에도 상당히 도발적이란 평가를 받았는데, 등장하는 철학자들에 대한 평가 측면에서 그런 듯하다. 어떻든 '미식 철학(Gastrosophie)' 서적이라고 정의해본다.
"먹는 것이 곧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
옹프레는 이 책에서 프랑스 현대 철학이 그랬든,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무시해온 '신체'와 '음식'을 철학의 중심부로 끌어들인다. 그는 철학자의 사상이 단순히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소화하며, 어떤 식습관을 가졌는지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 언뜻 하나마나한 이야기 같지만 먹는대로 생각한다는 거 이거 쉽지 않은 거다. ​다른 말로하면 또 역으로 "식습관이 곧 형이상학이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대략 이렇다. 주요하게 한 챕터씩 차지한 철학자 말고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사드 등등. 옹프레는 꽤 치밀하게 조사한 철학자들의 사례를 통해 그들의 식탁과 사상의 상관 관계를 분석한다.
​거칠게나마 소개하면, 좀 정형적인 소개이긴 하나 덧붙인다.
디오게네스: 날것의 철학. 날것(문명에 대한 거부)을 먹음으로써 사회적 관습을 타파하려 했던 견유학파의 철학을 소개하며 생각하는 것과 먹는 것의 완벽한 일치의 예를 선보인다.
루소: 우유와 채소의 순결주의. 채식과 유제품을 선호했던 그의 식단이 어떻게 자연주의적이고 도덕적인 순결주의로 이어졌는지 분석.
칸트: 규칙과 대화의 식탁. 그러나 젊은 시절 칸트는 완전 주당으로 밤거리에서 집으로 엎혀온 사람사람. 점점 엄격한 식사 시간과 절제된 식단, 그리고 식탁에서의 대화를 중시했던 모습이 그의 체계적이고 의무 중심적인 비판 철학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고찰하고 있다.
니체: 소화불량과 초인의 식단. 위장 장애로 고생하며 식단 조절에 집착했던 니체의 개인적 고통이 그의 허무주의 극복과 초인 사상에 어떤 생리학적 배경이 되었는지 탐구. 어머니가 뭐 좀해먹으라고 독일제 식료품과 특히, 주방기구까지 바리바리 싸 보냄. 근데 식욕부진과 식욕 사이에서 분열증.
푸리에: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푸리에가 꿈꾼 '미식적 유토피아'를 통해 욕망의 해방을 논한다. 어마어마한 상상력, 직접 확인해보시길, 음식으로 이런 정치사회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예는 없었지 않나 한다.
마리네티 (미래주의자): 요리도 예술처럼 파괴적이고 혁신적이어야 한다고 주장, '파스타 폐지론'을 펼쳤던 인물. 마리네티 미래파 선언에 관련된 내용을 참고할 수 있음.
사르트르: 갑각류 혐오와 통조림 실존주의. 옹프레는 사르트르의 식습관을 '점성에 대한 공포'와 연결 지어 설명한다. 갑각류에 대한 혐오라 표현했는데 게나 바닷가재 같은 갑각류를 극도로 혐오했다. 옹프레는 이를 사르트르가 가진 '속이 비어 있지 않고 꽉 찬 존재', 혹은 '끈적거리는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거부감으로 해석한다. 사르트르는 자연 상태의 음식보다 통조림이나 소시지처럼 인간에 의해 완전히 가공되고 형태가 변한 음식을 선호했다. 이는 자연(즉자)에 의해 압도당하지 않으려는 자유로운 인간(대자)의 의지를 보여준다는 것일 수도 있다. 사르트르의 '게'에 대한 공포는 그의 철학적 개념인 '구토'와도 긴밀하게 연결되는 지점이라 옹프레의 분석 중에서도 특히 백미로 꼽힙니다. 잘 먹지도 않고 씻지도 않았던 사람.
사르트르 외에도 옹프레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짧게 다루며 자신의 논리를 보강한다.
에피쿠로스: 미셸 옹프레 철학의 근간인 쾌락주의의 아버지. 흔히 '쾌락주의'로 오해받지만, 사실은 빵과 물만으로도 충분한 '최소한의 쾌락'을 추구했던 철학자.
사드 후작: 미셸 옹프레는 이 책에서 그를 '감옥 속의 미식가'이자, 음식을 철저하게 '권력과 통제의 도구'로 사용한 인물로 조명한다. 옹프레가 분석한 사드의 미식 철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인생의 오랜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 사드는 외부에서 들여오는 음식에 병적으로 집착했습니다. 옹프레는 사드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을 분석하며, 그가 요구했던 구체적인 요리 목록(특히 초콜릿과 단 음식들)이 단순한 식욕이 아니라 박탈당한 자유를 회복하려는 의지였다고 본다.사드에게 음식은 성적 욕망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옹프레는 사드의 문학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연회들이 어떻게 미식적 쾌락을 넘어 타자를 지배하고 파괴하는 소모적인 축제로 변질되는지 설명.( 미식과 에로티시즘의 결합) 특히 사드는 초콜릿에 집착했는데, 옹프레는 이를 그의 어둡고 무거운 욕망을 상징하는 검은색의 연금술적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초콜릿에 대한 갈망) 사드 후작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인간의 욕망이 가장 극단적인 상황(감옥)에서 어떻게 '미식'이라는 형태로 표출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대목.
철학자의 뱃속을 통해서 본 저자 미셸 옹프레의 철학은 반(反)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 이성이나 영혼 같은 추상적인 개념만 숭상하던 기존 철학의 권위를 해체하는 대신 '입, 위장, 항문'으로 이어지는 신체적 과정을 통해 철학을 다시 읽어낸다(프랑스 철학 전통에서 멀지 않다). 인간을 먹고 마시는 생물학적 존재로 규정하며, 사상 또한 생리적 현상의 연장선에 있음을 강조하는 유물론적 관점으로 음식과 요리를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을 결정짓는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격상시키면서 철학적 미식학의 진정한 시초를 알렸다는 평가.
『철학자의 뱃속』
이 책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사실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엄숙하고 딱딱한 철학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신체의 철학'을 맛보고 싶은 독자에게 매우 흥미로운 작품.
미셸 옹프레는 철학자들의 '신체적 욕망'을 통해 사상을 해부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책으로 1989년 'Prix de l'Union des éditeurs de langue française'(프랑스어 출판 연합상)를 수상하며 철학계에 화려하게 데뷔. 옹프레는 1959년생이니(2026년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되었으니...시끄러운 사람..), 만 30세가 되던 해에 이 책을 출간한 셈입니다. 당시 이 책은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그들의 식탁을 통해 해부한다"는 접근법으로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큰 찬사를 받았다는데 당시 판매량 40만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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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이미지에 관한 생각』 은 뱀파이어라는 매혹적이고도 기괴한 존재가 인류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어떻게 형상화되고 소비되어 왔는지를 다각도로 조명한 인문학 서적이다.

이 책은 단순히 괴물로서의 뱀파이어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적 맥락에 따라 변화해 온 뱀파이어의 '이미지'와 그 속에 투영된 인간의 욕망, 공포, 그리고 사회적 함의를 분석한다.

진화하는 괴물의 형상

민담 속의 흉측한 시체에서 시작해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거쳐, 현대의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주인공에 이르기까지 뱀파이어 이미지의 변천사를 다룬다. 회화, 문학,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매체에서 뱀파이어가 어떻게 재현되는지, 특히 고전 영화와 현대 대중문화 속 뱀파이어의 차이점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 뱀파이어는 인간 사회의 '타자'를 상징한다. 책은 뱀파이어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동시에 무엇을 갈망하는지를 인문학적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다.

뱀파이어의 원형이 된 동유럽의 민담과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어떻게 흡혈귀 전설로 둔갑했는지, 19세기 문학을 통해 뱀파이어가 어떻게 세련된 '귀족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지 분석하며 오늘날의 뱀파이어가 더 이상 공포의 대상만이 아니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고뇌를 하거나 대중의 선망을 받는 아이콘이 된 과정을 추적한다.

이 책은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통해 '본다는 것'과 '이미지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한다.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은 독자뿐만 아니라, 기호학이나 시각 문화 이론에 흥미가 있는 독자에게도 유익한 통찰을 제공한다.


저자 김성태는 뱀파이어라는 렌즈를 통해 인간 문명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단순한 장르 비평을 넘어 이미지가 권력을 획득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추적한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와 대중적 재미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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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이렇게 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이 글들은 영화에 관한 글이지만, 뭐에 관한 글이든 그렇습니다.
문자로도 가감없습니다. 문자가 씌여졌다고 실재하는 건 아닌거겠죠.
그럴 때가 더 많겠습니다만, 결국 문자 안에서 실체는 드러납니다.
실재하는지 실재하지 않는지.
그것이 살이고 피여서, 살아 움직이는지.
그런 글이 있습니다.
아니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책입니다.
무엇을 쓰더라도, 이렇게 썼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글입니다.
그건 저만의 생각입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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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를 꿈꾸는 당신에게, 혹은 이미 무대에 서고 있지만 무언가 갈증을 느끼는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바로 리처드 볼레스라브스키(Richard Boleslavsky)의 『연기 6강(Acting: The First Six Lessons)』입니다.

​1933년에 처음 출간된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연기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필수 교재로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할리우드 배우들부터 연극 무대의 신인 배우들까지, 수많은 세대의 배우들이 이 책을 통해 연기를 배우고 예술가로 성장해왔습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할리우드까지

저자 리처드 볼레스라브스키는 폴란드 출신의 배우이자 연출가로, 러시아 모스크바 예술극장(Moscow Art Theatre)의 멤버였으며 제1스튜디오의 연출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1920년대 미국으로 건너와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서구에 처음으로 가르친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볼레스라브스키는 뉴욕에서 아메리칸 랩 시어터(American Laboratory Theatre)를 설립했고, 그의 제자들 중에는 훗날 미국 연기계의 전설이 된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와 스텔라 애들러(Stella Adler)가 있었습니다. 그는 브로드웨이 무대는 물론 1930년대 할리우드의 주요 영화감독으로도 활약했던 연극과 영화를 아우른 거장이었습니다.

여섯 번의 레슨, 한 편의 드라마처럼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그 형식에 있습니다. 딱딱한 이론서가 아니라, 선생과 학생이라는 두 인물 사이의 대화로 구성된 여섯 편의 미니 드라마입니다. 마치 한 편의 희곡을 읽는 듯한 생동감 있는 대화 속에서 연기의 핵심 원리들이 자연스럽게 펼쳐집니다.

​여섯 가지 레슨의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집중(Concentration) - 배우의 영혼을 향한 집중
  2. 감정의 기억(Memory of Emotion) - 진실한 감정을 불러내는 법
  3. 극적 행동(Dramatic Action) - 공원을 산책하며 배우는 행동의 본질
  4. 성격화(Characterization) - 인물을 창조하는 과정
  5. 관찰(Observation) - 차 한 잔을 나누며 세상을 보는 법
  6. 리듬(Rhythm) - 무대 위 생명의 흐름

각 레슨은 학생의 경력에 따라 이루어지며, 매번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어떤 때는 스튜디오에서, 어떤 때는 공원을 걸으며,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차를 마시며 대화가 진행됩니다.

가르치기 어렵기로 악명 높은 기술과 실천을 우아하게 표현한 것으로 사랑받고 있는 이 책은 초보 배우부터 경험 많은 전문 배우까지 모두에게 필수적인 독서로 여겨집니다.

​볼레스라브스키는 말합니다. "연기는 예술을 통해 탄생하는 인간 영혼의 삶이다." 창조적 극장에서 배우가 집중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인간의 영혼입니다. 그것은 물질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야만 인식할 수 있는 것, 삶에서는 가장 큰 감정과 격렬한 투쟁의 순간에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미국의 드라마 평론가이자 작가, 존 메이슨 브라운(John Mason Brown)은 이 책에 대해 "배우들이 해야 할 일은 젊든 늙었든 이 책을 사는 것이다. 이 책은 어떤 저서보다도 연기의 예술을 더 많이 탐구한다"고 평했습니다.

​배우의 길을 걷고 있거나, 연기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에게 이 작은 책은 보물 상자와 같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안에 담긴 지혜와 통찰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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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대영박물관에 앉아 팜플렛을 쓰고 있을 때, 미셸은 파리의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프랑스 정부군과 맞서고 있었다. 그녀의 동시대 인물들이 이제 막 식민주의를 비난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뉴칼레도니아의 죄수 신분으로 1878년 원주민 봉기에 참여했다. ​오늘날까지도 1871년 파리 코뮌 당시 '붉은 처녀'로 명성을 얻은 루이즈 미셸은 프랑스 인의 가슴에 남아있다.



그녀가 남긴 이 회고록은 인간의 꿈을 향한 기념비로 서 있다. 변방의 보잘것없는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가 자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교조적 이론이 아닌 마음에 이끌려 자신의 자유까지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음을, 미셸은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1830년 5월 29일 사생아로 태어난 루이즈 미셸은 오트마른(Haute-Marne)에 있는 반쯤 허물어진 요새화된 저택에서 어머니와 친조부모의 손에 자랐다. 그녀의 친할아버지 에티엔 샤를 드마이(Etienne-Charles Demahis)는 귀족의 후손이었으나, 1789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공화주의적 지지의 표시로 자신의 성을 '드 마이(De Mahis)'에서 덜 화려한 '드마이(Demahis)'로 바꾸었다.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인인 마리 안(또는 마리안) 미셸과 더 이상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그의 아들 로랑 사이에서 루이즈가 태어났을 때 브롱쿠르(Vroncourt) 마을의 시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루이즈는 마치 적통인 드마이 가문의 손녀처럼 양육되었고, 친조부모가 사망한 후 여교사가 되어 처음에는 오트마른에서, 나중에는 파리에서 가르쳤다. 그녀는 혁명적인 꿈을 꾸기 시작했고, 루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2제국이 황혼에 접어들 때 급진적인 활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1870년 보불전쟁과 프로이센의 파리 포위 공격 당시, 그녀는 수 세기 동안 불만을 품은 빈민들이 거주해 온 몽마르트르 지역 혁명 단체의 주요 일원이었다. 1871년 3월부터 5월까지, 파리 시민들이 정부가 자신들의 공화국을 훔치려 한다고 믿고 반란을 일으킨 파리 코뮌 기간 동안, 미셸은 사건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며 봉기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피의 일주일’ 1871년 5월 베르사유 정부군이 코뮌을 진압했을 때, 미셸은 붙잡혀 재판을 받고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1873년 죄수 호송선을 타고 뉴칼레도니아로 이송되었다. 6년 동안 수도 누메아 인근의 형벌 식민지에서 가혹한 조건 속에 살았으며, 이후 수도에서 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며 지냈다. 여론의 압박에 따라 정부가 코뮌 가담자들에게 내린 1880년 일반 사면령 이후,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와 대중의 환호를 받았다.
​미셸이 귀국했을 때 거대한 대중 집회가 그녀를 맞이했으나, 그녀가 혁명진영 내에서 자리를 잡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지난 10년 동안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무지했고, 급진 세력 내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얻은 인물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그 어떤 '전설'에게도 내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얻는 대중적 지지는 여전히 엄청났으며, 이후 몇 년간 파리와 지방, 그리고 해외에서 열린 그녀의 강연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소란을 이룰 정도였다.​
1882년 미셸은 치안 문란 죄로 체포되어 2주간 감옥에서 보냈다. 이어 1883년 봄, 앵발리드에서 열린 ‘빵과 일자리’시위 직후, 그녀는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을 들고 파리 전역에서 군중을 이끌었다. 그녀는 폭동을 일으키고 추종자들에게 빵집 약탈을 선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실질적인 변론을 거부한 그녀는 6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3년 후 사면된 그녀는 단호하게 강연과 집필 활동을 이어갔으며, 급진적인 대중은 그녀를 '위대한 시민(la grande citoyenne)'으로 예우했다. 1890년부터 1905년까지 영국에 머물며 유럽을 돌며 강연 투어에 나섰으며 1905년 그녀가 사망했을 때도 강연 투어 중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수만의 인파가 참여한 가운데 프랑스의 3대에 걸친 혁명 정서가 거대하게 쏟아져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루이즈 미셸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어린 시절 억압받는 이들에 대해 품었던 막연한 동정과 이후 유토피아적 혁명에 바쳤던 막연한 헌신을 거쳐 무정부주의라는 신념에 도달했다고 선언한다. 그녀는 훗날 자신의 무정부주의로의 전향이 죄수 호송선 비르지니(Virginie)호를 타고 뉴칼레도니아로 가던 넉 달의 항해 중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을 개종시킨 나탈리 르멜(Natalie Lemel)과 여정을 함께했었다. 미셸은 회고록에서 1883년 1월 무정부주의자들의 '리옹 선언문'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기술한다. 그녀는 회고록에 "나는 그곳에 기록된 모든 사상을 공유한다"라고 적으며 해당 문서의 전문을 인용했다.
하지만 미셸의 무정부주의는 이론적이라기보다 감성적이었다. 사실 그녀는 당대와 과거의 혁명 저작물들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녀가 라메네(Lamennais)를 읽은 것은 확실하며, 프루동(Proudhon)을 읽었을 가능성도 크다. 블랑키(Blanqui)나 바쿠닌(Bakunin)의 사상은 당시 널리 퍼져 있었기에 당연히 알고는 있었겠지만, 그들의 저작을 직접 읽었을 가능성은 낮다. 마르크스주의는 회고록에서는 거의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데, 이는 그녀가 마르크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이 회고록 출간 수년 후인 1890년대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유권에 대한 관점, 착취에 대한 인식, 과학의 역할에 대한 주장, 그리고 인류의 근본적인 선함에 대한 비전에서 전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사회 혁명에 대한 염원에서도 그녀는 그 형태와 성격에 대해 일관적이었다. 즉, 혁명이란 불의와 착취에 대항하여 민중이 일으키는 자발적인 봉기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민중의 자발적 봉기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간접적으로나마 그녀가 많은 무정부주의자가 택했던 테러의 승인에서 한 발 비켜나가게 한다. 암살은 도구로서 아주 가끔만 언급한다. 한 번은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살해하는 것을 논했고, 또 다른 때는 아돌프 티에르를 암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두 사람을 살해하기 위한 어떤 구체적인 준비는 하지 않았다. 이와 유사하게, 그녀가 폭발물을 사용한 유일한 사례는 동상을 폭파하려다 실패한 시도뿐이었다. 그녀는 "폭군 살해는 폭정의 머리가 하나이거나 기껏해야 적은 수일 때만 실용적이다. 그것이 히드라(머리가 여럿인 괴물)일 때는 오직 혁명만이 그것을 해낼 수 있다"라고 적었다. 그녀는 혁명의 모든 지도자가 혁명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전사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도 언급했는데, 그래야만 민중이 살아남은 참모진과 다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면 어떻게든 무정부주의적 꿈이 실현되리라는 것이었다.
​E. H. 카(E. H. Carr)의 적절한 표현을 빌려 "낭만주의 교리의 논리적 결말"이라고 불리는 무정부주의는 정의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그 핵심—개인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모든 형태의 정치 조직에 대한 혐오, 인간의 타고난 선함에 대한 믿음—은 미셸의 생각과 너무나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미셸이 무정부주의를 찾은 것인지 무정부주의가 미셸을 찾은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회고록을 집필할 당시 그녀는 진보가 필연적이며, 정부는 그 어떤 정부든 악하다는 점을 확고하게 믿었다. "권력은 악이다"라는 그녀의 진술은 모든 무정부주의 체계의 핵심을 형성한다.
그녀는 역사를 자유로운 인류가 어떻게든 노예화되어 온 이야기로 보았으며 과거에 대한 관심은 미래에 대한 희망만큼이나 컸다. 과거에 대한 그녀의 비전이 비록 신화와 괴물로 가득 찬 낭만적인 것이었을지라도, 그것은 미래에 대한 그녀의 낭만적인 꿈과 쉽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녀에게 과거와 미래는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안타깝지만, 미셸의 희망—그리고 역사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라는 낭만적인 꿈은 미래의 물결이 아니라 쇠퇴해가는 세력이었다. 수치상으로 볼 때 프랑스에서 무정부주의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1890년대의 폭력 사태 이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의 기간이었으나, 그 수십 년 동안 무정부주의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힘은 노동자 자치조직(Bourses de Travail), 다양한 노선과 전략을 품은 노동총연맹(CGT), 그리고 정파 간의 내분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루이즈 미셸이 꿈꾸었던 무정부주의, 즉 사회 혁명과 착취의 종말로 이어지는 형태 없는 민중 봉기는 세부 사항과 방법론을 둘러싼 화해 불가능한 말다툼 속으로 사라졌다. 그 꿈은 흩어지더니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미셸은 이론가가 아니었던 것처럼 조직가도 아니었다. 시위와 조직을 구상하는 초라하고 어두운 방들은 미셸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그녀는 1882년 한 연설에서 "모든 혁명이 불충분했던 이유는 그것들이 정치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조직이 불필요하다고 믿었는데, 가까운 시점에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압도적인 수와 의지의 힘, 그리고 그들 명분의 정당성을 통해 구체제가 자신들 앞에서 시들어 버리게 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론가도 조직가도 아니었던 미셸은 프랑스 급진파들 사이에서 또 다른 역할을 채웠다. 베를렌은 그녀를 "잔 다르크에 가까운 인물"이라 불렀다. 무정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분명 낭만주의자였던 빅토르 위고는 어느 시의 초고 제목을 '루이즈 미셸'이라고 지었으며, 「남자보다 위대한(Viro Major)」으로로 제목이 바뀐 이 긴 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아는 이들은 알리라... 모두를 위해 바쳐진 당신의 나날들, 밤들, 심려들, 눈물들을, 타인을 돕느라 스스로를 잊어버린 당신을, 사도의 불꽃과도 같은 당신의 언어들을, 비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향한 당신의 긴 증오의 시선을, 그리고 당신의 두 손으로 녹여주던 아이들의 발을..."
위고는 미셸이 영웅적이거나 도덕적이지 않은 일은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위고는 미셸이 다음과 같은 존재라고 결론지었다.
"...두 정신이 뒤섞인 존재 ...거대하고 폭풍우 치는 심장 밑바닥에서 보이는 별과 같은 것들의 신성한 혼돈 ...불꽃 속에서 보이는 광채
당신은 여인의 몸을 하고 있지만, 그 영혼은 위대한 남성(Viro Major)보다 더 거대하다."
모든 운동에는 예언자와 입법자, 죄인과 변절자, 순교자와 성인이 필요하다. 프랑스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미셸은 순교자이자 성인—즉, '붉은 처녀'였다.
미셸의 지적 호기심은 엄청났고 지식에 대한 갈증은 갈구해도 끝이 없었다. 그녀의 회고록 전반에는 음악, 악기, 교수법, 동물 학대, 여성의 지위, 카나리아 제도에서 통용되는 화폐, 곤충, 카나크 원주민 인류학, 날씨, 식물학 등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주제들이 흐르고 있다. 목록은 끝이 없다. 어린 시절 그녀는 자신의 탑 방에 동물 해골을 수집했다. 파리에서 여교사로 지낼 때는 바쁜 수업 일정에도 불구하고 물리, 화학, 역사, 심지어 법학 수업까지 청강했다. 감옥에서는 책과 시를 썼고, 뉴칼레도니아에서는 동식물의 목록을 작성하고 파파야 나무의 황달병 예방 접종을 실험하기도 했다.
그녀가 회고록에서 드러낸 내면의 삶은 분명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전설, 맹수, 민속 영웅들이 그녀의 환상 속에서 뒤섞였으며, 그녀는 자신의 환상과 현실을 결코 구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초기 생애가 "꿈과 학업으로 이루어진" 시기였으며, 이는 삶의 두 번째 부분인 "투쟁의 시기"를 위한 준비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파리 포위전과 코뮌이라는 깨어 있는 현실 속에서도 자신이 꿈속에서 보았던 대로 행동했다. 꿈과 행동은 하나였으며,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 둘은 외견상 구분이 불가능했다. 어린 시절에 놀이처럼 상연했던 교수대 연극의 연설을 그녀는 1871년 재판관들 앞에서 실제로 쏟아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드라마를 만들고 그 안에서 주연을 맡기 마련인데, 미셸은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드루이드 여사제, 발키리, 베스탈 처녀(성스러운 처녀)로 여겼으며, 기이한 악령과 신비로운 환영 등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그녀의 실재 삶 속을 지나갔다. 1860년대의 어느 날, 그녀는 친구 빅토린과 함께 어린 시절 집 근처의 깊은 숲속을 걸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숲속을 거의 소리 없이 가로지르며 늑대 한 마리가 그들 곁에서 발맞추어 걸었다고 한다. 늑대가 정말 그곳에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1860년대에는 오트마른 지역조차 늑대의 수가 적었으나, 그 맹수는 미셸의 마음속에 분명하고 진실하게 존재했다.
​본문의 주요 준비 과정이 감옥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셸이 공적인 기록이 있는 사건들을 서술할 때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뉴칼레도니아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투옥되지 않았을 때조차 매일 경찰 요원들의 감시를 받았다. 그들의 보고서가 남아 있기에, 1881년부터 1883년까지 그리고 1886년부터 1889년까지의 그녀의 삶은 객관적이지는 않을지언정 뒷받침할 만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과 여교사 시절에 대해서는 그녀의 기억이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그녀가 묘사하는 일부 태도들은 오직 그녀의 입을 통해서만 진실로 남을 것이다. 아마도 미셸은 환상을 구축한 뒤 그것을 실현하며 살았거나, 혹은 회고적으로 환상을 활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회고록 집필자 외에 자기의 삶을 다시 한번 살 기회를 얻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셸은 회고록이 빠지기 쉬운 자기과시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우며, 심지어 자신의 중요성을 소홀히 다루기까지 한다. 그녀는 코뮌 기간 여성 감시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파리 포위 공격(파리 포위전-보불전쟁) 당시 그녀는 조르주 클레망소의 도움 덕분에 약 200명의 아이를 보살피며 일상적인 복지를 책임졌고 그 일을 아주 잘 해냈으나, 그녀의 회고록에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비록 그녀의 재판 중 하나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뉴칼레도니아 유배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런던에서 열린 크로포트킨의 국제 회의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했다. 그녀는 그 여행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곳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때때로 그녀의 회고록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장엄한 몸짓으로 매혹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그것이 정확한 사실이 아닌 경우도 있지만, 1886년의 이러한 서술들은 루이즈 미셸이 자기의 삶을 진정으로 바라보았던 방식이거나, 혹은 타인에게 드러내려 했던 방식을 나타낸다. 그 효과란 그녀에세 선전의 의미일 것이며 어쩌면 그녀 스스로도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이 회상록은 미셸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뜬 상황에서 쓰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쉰여섯 살의 이 혁명가는 모든 것을 혁명에 희생했다. 아마도 자신이 처한 현재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녀는 어린 시절의 자아를 훗날의 혁명가 모습으로 소급하여 만들 수밖에 없었을지도. 이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할아버지의 볼테르적 가르침 덕분에 처음부터 단호하게 반교회적이었다고 자신을 묘사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겉보기에 적절히 종교적인 아이였다. 경건한 고모의 열렬한 가르침을 통해 그녀가 신비주의적 가톨릭에 매료되었던 흔적들이다. 이는 훗날 혁명가로서 열정에 모종의 신비로운 에너지를 발휘한다. ​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미셸은 곧바로 급진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 기간 중 그녀의 친구 마리 페레(Marie Ferré)가 사망했으나, 미셸에게 사건의 정점은 리옹에서 열린 '66인의 재판(Trial of the Sixty-eight)'이었다. 정부는 크로포트킨과 고티에를 포함한 많은 지도자를 파멸시킴으로써 무정부주의 운동을 꺾으려 했다. 미셸은 재판 초기에 영국에 있었으나 마지막 단계에 참석했고, 비록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수감자들과 동일시했다. 66인의 유죄 판결 이후 그녀는 무언가 해야 한다고 느꼈다. "내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허용된 자유를 사용해 지구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뻗어 나갈 새롭고 거대한 인터내셔널을 소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겁함의 공범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순교를 갈구하고 있었고, 1883년 4월 앵발리드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정부는 야만적으로 반응했고, 형식적인 재판 끝에 그녀에게 6년의 독방 구금형을 선고했다. 이는 범죄에 비해 너무나도 불균형한 형량이었기에 보수적인 신문들조차 항의할 정도였다.​
어머니의 쇠약해진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미셸은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유죄 판결 이후에도 최소 두 차례 어머니를 병문안할 수 있는 가석방 허가를 받았다. 클레르몽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도 어머니를 뵙기 위한 외출이 허용되었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절차였다. 미셸의 전기 작가 에디스 토마스(Edith Thomas)는 이 에피소드를 논하며 19세기가 "우리 시대보다 훨씬 더 인도적인 시대였다"라고 평했다. 미셸은 1884년 12월 초, 당국이 그녀를 어머니와 가까운 파리 교도소로 이감해 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나흘 후 내무부 장관은 미셸이 두 명의 경찰관 감시하에 어머니의 임종을 지킬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녀의 회고록만으로는 알기 어렵지만, 미셸은 1884년 12월 11일부터 1885년 1월 3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어머니 곁에 머물렀다.
미셸의 감정은 항상 격렬했다. 그녀의 회고록 페이지 곳곳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점철되어 있으며, 어린 시절을 묘사할 때는 친척들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후 젊은 여성 시절에는 자신을 따라 파리까지 온 줄리 롱샹(Julie Longchamps)과 깊은 우정을 쌓았다.
세월이 흘러도 제자들에 대한 미셸의 애정은 식지 않았다. 첫 번째 재판 당시 정부가 그녀에게 제자가 없었다고 주장하자 그녀는 격분하며 반박했는데, 정작 그보다 훨씬 더 큰 거짓말들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고 내버려 두기도 했다. 그녀는 성실하고 상상력 풍부한 교사였던 것으로 보이며, 외부의 증거들도 그러한 판단을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누메아에서 카나크족을 가르치는 데 쏟은 그녀의 헌신은 회고록에 자부심으로 담겨 있다.
미셸의 동정심은 사회의 모든 약자, 즉 가난한 이들, 노인들, 죄수들, 그리고 여성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초기 페미니즘(protofeminism)을 발전시켰으나, 이는 곧 더 포괄적인 급진주의로 융합되었다. 미셸은 사회 문제를 명확히 직시했으며, 여성뿐만 아니라 많은 집단이 착취당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하여 여성에 관한 회고록의 한 장은 사회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가 "좋은 동반자로서 인생을 함께 걸어갈 것"을 호소하는 톤으로 변한다.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인류 전체의 권리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느 인종이 으뜸인지를 두고 인종들이 다투지 않게 되는 것처럼, 어느 성별이 우월한지"에 대해 더 이상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동물을 향한 잔혹 행위에 대한 미셸의 혐오감은 약자와 착취당하는 자들에 대한 동정심과 연결되어 있다. "새끼가 짓밟힌 새부터 전쟁으로 보금자리가 파괴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녀의 회고록에서 어머니에 대한 감정 다음으로 가장 격렬한 감정은 테오필 페레(Théophile Ferré)를 향해 있다. 그녀는 그와 그의 처형에 대해 자주 언급하지만, 그 감정이 인간 페레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탄압이 초래할 수 있는 결과의 상징으로서의 페레를 향한 것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혹자는 페레를 그의 연인으로 보기도 한다. 페레의 누이 마리(Marie)와 미셸의 따뜻한 우정이 테오필에 대한 감정의 결과인지 아니면 그와 별개인지는 불분명하나, 미셸과 마리 페레의 삶은 영구적으로 얽혀 있었다. 마리는 미셸이 집회에 참석하거나 유배 중일 때, 혹은 여행이나 투옥 중일 때 미셸의 어머니를 돌보는 것을 도왔고, 두 사람은 수년 동안 활발하게 서신을 주고받았다. 미셸이 자신의 시집과 스크랩 자료들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마리 덕분이었으며, 그중 상당수가 회고록에 포함되었다. 블랑키 서거 기념일 시위 직후 미셸이 체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가 사망했다. 미셸은 회고록에 마리의 장례식 기록과 앙리 로슈포르가 보낸 찬사의 편지를 수록했다.
하지만 미셸의 정서적 삶의 중심은 어머니였다. 미셸은 어머니가 "공유하지 않았던" 자신의 견해 때문에 어머니가 겪은 고통의 대부분을 자신이 초래했음을 인정했다. 평생 어머니는 딸의 빚을 갚기 위해 애썼고 애정과 소소한 선물들을 쏟아부었다. 그 보답으로 루이즈는 자신의 불행을 어머니에게 숨기려 애썼고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편안하게 해드리고자 노력했다. 미셸은 "우리 혁명가들은 가족에게 행복을 거의 가져다주지 못한다"라고 한탄한다.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미셸은 어머니의 장례식 기록 전문을 실었다. 그녀가 깨닫지 못한 사실은, 어머니의 시신을 따라 파리를 가로질러 르발루아 페레 묘지까지 행진했던 수천 명의 사람이 어머니뿐만 아니라 루이즈 자신에게도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실질적으로 미셸의 회고록은 어머니의 죽음 시점에서 끝을 맺으며, 그녀는 상실로 인해 황량해진 정신 상태로 이듬해 출판을 위해 원고를 완성했다. 현실은 가변적이며, 회고록 저술가가 해야 하듯 자신의 마음의 과정을 되짚어보는 것은 회상이 소환되는 순간에 존재하는 햇빛이나 그림자를 통해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는 일이다. 혁명적 대의에 대한 미셸의 헌신과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그림자 아래서도 확고했으나, 만약 그녀가 슬픔의 충격 속에서 회고록을 쓰지 않았더라면 잃어버린 과거에 대해 향수와 슬픔을 덜 드러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또한 우리 몫이 아니다.
미셸이 이 회고록을 쓰기 시작한 것은 1883년에 시작된 그녀의 세 번째 수감 기간 중이었으나, 자료 수집은 그보다 일찍 이루어졌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시작한 오트마른의 역사와 같은 초기 저작물들도 가지고 있었으며, 뉴칼레도니아 항해 중에 기록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일기'에 대해 감질나는 언급을 남기기도 했다.​
1885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미셸은 일종의 신경 쇠약을 겪었으며 이는 그녀의 회고록이 파편화되고 일관성이 떨어지게 된 분명한 이유 중 하나였다. 두 부분으로 나뉜 본문 전체에 대략적인 연대기적 개요가 흐르고는 있지만, 이야기와 일화들은 단계적인 서사보다는 단어 연상에 따라 나타난다. 또한 이 회고록은 사실적인 기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본문은 그녀의 꿈에 대한 감정적인 묘사, 행동을 촉구하는 고무적인 부름, 그리고 다수의 시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다른 아이디어로 가볍게 옮겨간다. 때때로 그녀는 자신이 독자에게 야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는 듯 보인다. 원문에서 그녀는 "나의 세 번째 체포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앞선 두 번의 체포 과정을 서술해야겠다"라고 쓰기도 했다. 회고록은 향수와 고양된 감정, 서사와 예언 사이를 격렬하게 오간다.
1888년 1월, 미셸이 르아브르에서 연설하던 중 광신적인 가톨릭교도 브르타뉴인이 그녀를 쏘았다. 왼쪽 귀 뒤에 박힌 총알 부상은 잘 아물지 않았고, 한동안 그녀의 건강은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러나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게도, 미셸은 가해자의 재판에 출석하여 그가 악한 사회에 의해 미혹된 것이라 주장하며 선처를 호소했고, 결국 그는 무죄로 풀려났다.
루이즈 미셀은 1890년 노동절 시위 참여를 준비하던 중 행사 전날 체포되었다. 분노와 좌절감에 휩싸인 그녀는 감방의 가구들을 부수었고, 당국은 그 행동을 구실 삼아 그녀를 정신 이상자로 몰아 수용하려 했다. 불분명한 이유로 내무부 장관 콩스탕이 직접 개입하여 수용 절차를 중단시키고 그녀를 석방했다.
미셸은 즉시 영국으로 떠났고, 189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이후 그곳의 사건들은 그녀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미셸은 이 무모한 전쟁이 사회 혁명의 시작을 가져올 기회라는 점에 기뻐했다. 그녀는 1904년 2월과 3월 초 프랑스에서 더 많은 강연을 했으나, 그 후 중병에 걸렸다. 그녀는 회복되었고, 대중이 치명적일 것이라 예상했던 그녀의 병세가 널리 알려진 후 전설적인 인물을 보기 위해 과거처럼 엄청난 군중이 몰려들었다. 아마 사람들은 이제 전설을 보러 온 것일 뿐이었겠지만, 어쨌든 수많은 이들이 모여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연말에 그녀는 알제리로 떠났고, 프랑스로 돌아오던 중 마르세유에서 병이 났다. 이 병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1905년 1월 9일, 그녀는 마르세유의 호텔 드 로아지스(Hotel de l'Oasis)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은 그녀가 좋아했을 법한 장관 중 하나가 되었다. 적기와 수많은 꽃, 그리고 노동조합, 사회주의 단체, 무정부주의자, 반종교 단체 대표 등 2,000명의 조문객과 함께 장례 행렬은 마르세유에서 묘지까지 1킬로미터에 달했다. 추모식이 프랑스 전역과 런던 등지에서 거행되었다. 1월 20일 그녀의 유해는 이장되어 파리로 옮겨졌고, 이틀 후 르발루아 페레(Levallois-Perret)에 있는 어머니 곁에 묻혔다. 언론은 이것이 빅토르 위고의 사망 이후 최대 규모의 장관이었다고 전했다. 같은 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군중이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달하려다 벌어진 대학살은 또 다른 '피의 일요일'로 영원히 각인되었다
오늘날 미셸의 고향인 브롱쿠르(Vroncourt)에는 그녀의 동상이 서 있고, 마을을 지나는 거리에는 그녀의 이름이 붙어 있다. 르발루아 페레에 있는 그녀의 묘지는—1905년에 묻힌 곳이 아니라 1936년 인민전선 시절에 옮겨진 새 묘지이다—여전히 익명의 손길이 놓아둔 꽃들로 채워져 있다. 그녀의 이름을 딴 지하철역과 거리도 만들었지만, 둘 다 파리 시 경계 바로 바깥에 걸쳐 있다. 그녀는 이제 전설이다. 그녀가 그 전설의 일부를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다. 루이즈 미셸은 영웅적이었으나, 그녀 자신이 말했듯
"영웅주의란 없다. 사람들은 그저 사건에 매료될 뿐이다."
흔히 하나의 사건에 대해 여러 버전의 서술이 존재했는데, 이는 드문 경우이지만 큰 틀에서 항상 서로 일치하면서도 각기 새로운 세부 사항을 덧붙이고 있었다. 몇몇 시들은 서사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아 생략했다. 게다가 미셸의 시가 여러 편 수록되어있다. 물론, 에디스 토마스는 미셸의 "가장 훌륭한 시는 단연코 그녀의 삶"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미셸은 분명 이 회고록의 후속편을 쓸 의도가 있었다. 이 책을 출간하고 10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으나, 결국 실현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녀의 시와 편지들을 제외하면, 여기에 실린 『루이즈 미셸 자필 회고록(Mémoires de Louise Michel écrits par elle-même)』이 혁명가이자 시인, 그리고 몽상가였던 매혹적인 여성의 가장 주요한 자전적 기록이다.
1886년 이 회고록을 출간했을 때 그녀는 쉰여섯 살이었으며, 여전히 많은 세월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언급했던 두 번째 회고록을 쓰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녀가 남긴 이 회고록은 인간의 꿈을 향한 기념비로 서 있다. 변방의 보잘것없는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가 자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자유까지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음을 교조적 이론이 아닌 마음에 이끌려, 미셸은 자신의 회고록과 삶을 통해 증명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번역본은
MÉMOIRES DE LOUISE MICHEL
ÉCRITS PAR ELLE-MÊME
F. Roy, libraire-éditeur, Paris, 1886
참고는
The Red Virgin, Memoirs of Louise Michel,
edited and translated by Bullitt Lowry and Elizabeth Ellington Gunter. The University of Alabama Press.1981
위 글은 Bullitt Lowry and Elizabeth Ellington Gunter의 Translators' Introduction & Epilogue에서 갈무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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