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만 우는 새가 있다. 나이팅게일이다. 그런데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고, 한 프랑스 작가는 썼다. 옛날 옛적 나이팅게일은 낮에 울고 밤에는 잠을 잤다. 그러던 어느 봄밤, 포도나무 덩굴손이 다리를 휘감았다. 잠결에 묶인 새는 사력을 다해 풀려났지만, 그 후로 다시는 무방비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서 밤마다 깨어 노래한다.


이 우화를 쓴 사람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다. 1908년, 그녀는 이 짧은 콩트 한 편으로 자신의 첫 단편집 제목을 정했다. 『슬픔의 긍지(포도나무 덩굴손)』(Les Vrilles de la vigne). 


콜레트는 1873년 부르고뉴의 작은 마을 생소뵈르앙퓌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잃은 퇴역 군인이었고, 어머니 시도는 정원 식물과 동물들을 아꼈던 사람이다. 이 어머니의 존재는 평생 콜레트의 글에서 떠나지 않는다.


스무 살에 그녀는 열네 살 연상의 작가 겸 출판업과 음악비평을 하던 앙리 고티에 빌라르와 결혼한다. 필명 ‘윌리’. 사교계에서 이름값 있던 이 남자는 젊은 아내를 방에 가두고 매일 글의 분량을 채우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렇게 나온 게 클로딘 연작이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네 권. 학교 다니는 소녀의 발칙한 성장담은 파리를 흔들었다. 옷깃 디자인이 ‘클로딘 칼라’라는 이름을 얻었을 정도로 당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책은 모두 윌리의 이름으로 나갔다. 남의 이름으로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콜레트의 출발점은 또렷해진다. 그녀의 문장은 처음부터 자기 것이 아니었다. 빌려준 사람의 서명 아래 묻혀 있었다.


풀려난 새


1906년, 콜레트는 윌리와 이혼한다. 인세는 전 남편이 챙겼다. 그녀에게 남은 건 글솜씨뿐이었고, 그걸로 당장 먹고살 길이 없었다. 그래서 무대에 올랐다. 뮤직홀 마임 배우로, 종종 가슴을 드러내는 파격적인 공연으로 물랭루주에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귀족인 마틸드 드 모르니, 일명 ‘미시’와의 관계도 이 시기에 시작된다.


이 무렵 콜레트는 잡지 세 곳, 『르 메르퀴르 뮈지칼』,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 『라 비 파리지엔』의 청탁을 받아 짧은 글들을 발표한다. 처음부터 한 권의 책으로 기획된 글들이 아니었다. 1905년에서 1907년 사이 띄엄띄엄 쓴 산문, 콩트, 대화체 스케치가 1908년 한데 묶여 『슬픔의 긍지(포도나무 덩굴손)』이 된다.


이 시점에서 나이팅게일 우화로 돌아가야 한다. 묶여 있다가 풀려난 새는 더 이상 예전의 잠을 잘 수 없다. 콜레트의 이혼과 정확히 겹치는 그림이다. 윌리 밑에서 보낸 시간을 ‘순진하고 무방비한 잠’으로, 거기서 빠져나온 뒤의 글쓰기를 ‘깨어 있는 밤의 노래’로 치환한 것이다. 그녀는 이 비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적는다. “나는 더 이상 행복한 잠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더 이상 포도나무 덩굴손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을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는다. 어느 쪽도 부풀리지 않는다.




줄거리 없는 책


『슬픔의 긍지』를 처음 펼치는 독자는 종종 당황한다. 이야기가 끝까지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스물두 편의 이야기. 분명한 장 구분도 없다. 표제작 같은 우화가 있는가 하면, 개와 고양이가 주고받는 대화체 글도 있다. 가족 풍경과 해변 마을 스케치를 섞어놓은 글도 있다.


이 책을 소설처럼 읽으면 실패한다. 콜레트는 이야기를 짓지 않았다. 기억과 감각의 단편을 늘어놓았다. 책 앞쪽은 우화와 알레고리에 가깝고, 뒤로 갈수록 관찰과 성찰의 톤으로 옮겨간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1인칭의 내밀한 목소리 하나뿐이다. 누가 읽어도 이건 콜레트 자신이 말하고 있다는 걸 안다.


후대 독자 중에는 이 책을 콜레트 입문서로 권하는 이들이 많다. 짧은 형식이 그녀의 본령이라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실제로 그녀가 가장 빛나는 지점은 장편의 서사 구조보다 짧은 산문의 밀도에 있었다. 자연, 동물, 사랑, 자유. 이 책에는 콜레트라는 작가를 이루는 모든 재료가 작은 다발로 묶여 있다.


권두에 놓인 「포도 덩굴손」은 이 책 전체를 읽는 열쇠로 거듭 언급된다. 프랑스 고등학교 문학 교재들이 이 짧은 텍스트 하나를 두고 따로 분석을 붙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한 동물 우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장을 보면 이유가 드러난다. 잠든 새의 다리를 휘감는 덩굴손을 콜레트는 시고 떫은 산미가 톡 쏘면서도 갈증을 가시게 하는 식물로 묘사한다. 고통과 쾌감을 한 단어 안에 욱여넣는다. 자연 묘사 하나에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시각이 동시에 걸려 있다. 같은 책의 다른 글에서도 이런 감각의 밀도는 일관되게 나타난다. 콜레트의 문장이 ‘관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노골적인 장면 묘사 때문이 아니라, 풍경 하나조차 몸으로 받아들이는 이 감각의 과잉 때문이다.


새가 풀려난 뒤에도 자유를 공짜로 얻지 않았다는 점도 짚을 만하다. 다리는 끈에 얽히고, 날개는 힘을 잃었다고 묘사된 그 새는 사투 끝에 빠져나온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묶였던 흔적을 몸에 새긴 채로 얻는다. 이혼 후 무일푼으로 무대에 서야 했던 콜레트의 현실과 이 문장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가벼운 작가라는 오해


콜레트는 생전에도 평가가 엇갈렸다. 사랑과 욕망을 다루는 작가라는 꼬리표 때문에 일부 비평가들은 그녀를 ‘가벼운’ 작가로 분류했다. 작가 캐서린 앤 포터는 뉴욕 타임스에 지드와 프루스트가 생존해있을 때도 이미 콜레트는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소설 작가”라 불렀다. 1935년 벨기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 1945년 공쿠르 아카데미 회원, 1949년에는 그 아카데미의 회장. 1948년에는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그녀를 둘러싼 그림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점도 정직하게 짚어야 한다. 비시 정권 시기 친나치 매체에 글을 기고했고, 일부 작품에는 반유대주의적 서술이 남아 있다. 자유와 해방의 작가라는 이미지와 이 사실은 쉽게 포개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프랑스가 그녀에게 국장으로 예우했다는 것. 그는 점령기 파리의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 그의 남편을 살려냈다. 


그녀가 기고한 글들은 전시 일상을 살아가는 여인들의 애잔한 풍경들이었다. 선동적인 글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기 작가들 사이에서도 해석은 엇갈린다. 어느 한쪽으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말년의 콜레트를 돌봤던 사람은 그의 연하 남편, 그리고 장 콕토같은 주변의 수많은 작가들이었다. 미국 작가 트루먼 카포티는 오직 콜레트를 보려고 대서양을 건넌다. 


1954년, 콜레트는 파리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가톨릭교회는 두 번의 이혼 전력을 이유로 종교장을 거부했다. 대신 프랑스는 여성 문인으로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국장을 치러주었다. 거부와 인정이 같은 죽음 위에 동시에 내려앉은 셈이다.


『슬픔의 긍지』를 백 년도 더 지난 지금 읽는 이유는 이 책이 그리는 그림이 여전히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이름 뒤에서 쓰던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되찾는 과정, 그 과정이 결코 매끈하지 않다는 사실. 자유를 얻은 뒤에도 예전의 무방비한 평온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감각. 이건 백 년 전 파리의 한 여성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콜레트는 이 모든 걸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나이팅게일 한 마리가 덩굴손에 묶였다가 풀려나는 짧은 우화 하나로. 그녀는 이 책에서 자신이 더 이상 행복한 잠을 잘 수 없다고 썼지만, 동시에 더 이상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도 썼다. 그 둘 사이의 거리가 이 작가의 평생을 관통하는 거리이기도 하다. 『슬픔의 긍지』는 그 거리를 처음으로 자기 이름으로 기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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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인류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는 이미 1970년대부터 멸종 단계에 접어들었다. 한국에선 최근에서야 여기저기서 제기되는 ‘기후위기’와 연관된 측면이 크다. 과학적으로 측정된 여러 지표들을 문제 삼으며 인류의 존립과 지구의 환경에 대해 얘기하는 것인데, 그 자체로 시급하고 위중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논의하는 걸 보면서 항상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인류는 왜 과학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확장으로 발생한 문제를 ‘과학’과 ‘자본’에 기대어 해결하려 드는가, 하는 점이다. 




왜 과학은 더 인류를 멸망케 하는가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온 데에 과학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18세기 이후 급진적으로 발전한 과학은 아주 짧은 시간에 인류의 생활 양태와 그로 인한 의식의 변화를 가능케 했다. 지금은 그 발전 단계의 시간적 폭이 갈수록 좁아지고, 빨라지고 있다. 한 세대를 거쳐야 할 문제가 두 세대 이상까지 아우르게 되면서 동시대 자체가 크게 분열하고 갈등하게 되는 요소로 작용하게도 되었다. 그런 점에서 세대나 계급, 경제적 부와 빈곤의 극단적 대치는 과학 발전의 속도에 못 미치는 인간 인식 또는 심리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따져볼 여지도 다분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산책하는 침략자>(2017)는 그것의 한 모델이 될 법한 영화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일본 내에서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독특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초창기 로망 포르노에서부터 호러, 멜로, 스릴러 등 기존 장르를 매개 삼아 자신만의 특출한 영화적 감각을 표출했는데, <산책하는 침략자>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좀 더 특이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신체강탈 외계인이라는 SF영화의 오랜 클리셰를 바탕으로 호러와 블랙코미디, 누아르와 로맨스를 자유자재로 버무린 솜씨가 가히 ‘장인’스럽다 할 만하다. 심각할 수 있는 주제를 경쾌하게, 자칫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을 장면을 심도 있게 우려내면서 130분을 충만하게 채운다.


영화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특유의 미스터리 스릴러 풍으로 시작한다. 어항 속의 금붕어가 나오고 돌연 어느 주택에서 토막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일가족 중 교복을 입은 소녀 하나만 피투성이가 되어 살아남는다. 외상은 없어 보인다. 소녀는 피칠갑을 한 채 어느 좁은 국도를 무심하게 걷는다. 자동차들이 소녀를 피하려다 서로 충돌한다. 소녀는 아랑곳 않는다. 재미있다는 듯 입가에 미소마저 가득하다. 그러면서 오프닝 타이틀이 뜬다. 이거 무슨 영화지? 싶은 호기심을 당기기에 아주 효과적인 연출이다.




괴이한 감독, 스스로 장르가 되다


다음 장면, 한 젊은 부부가 병원에서 진찰 중이다. 평범한 직장인인 신지(마츠다 류헤이)와 광고 디자이너인 나루미(나가사와 마사미) 부부다. 신지의 상태가 이상하다. 외출했다 돌아와선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버렸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뿐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아내도 못 알아본다. 나루미는 속이 끓어오른다. 시쳇말로 ‘진상’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일을 따내야 하는 나루미는 자신의 일을 감당하기도 벅찬 상태다. 신지는 걷는 법, 먹는 법뿐 아니라 언어부터 다시 배워야 할 상황. 나루미는 신지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말할 정도다. 관계의 붕괴를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편, 주간지 기자 사쿠라이(하세가와 히로키)는 토막 살인 사건 현장에 취재차 갔다가 이상한 소년을 만난다. 대뜸 반말부터 해대는 이 소년의 이름은 아마노(타카스기 마히로). 토막 살인 사건에서 살아남아 경찰에 인계된 소녀를 같이 찾으러 가자고 한다. 소녀의 이름은 타치바나 아키라(츠네마츠 유리), 오프닝 장면에서 피칠갑으로 길을 걷던 바로 그 아이다. 얼떨결에 아마노와 동행하게 된 사쿠라이는 아마노로부터 자신과 타치바나가 외계인이라는 얘길 듣는다. 요는, 평범한 지구인의 몸속에 잠입했다는 것. 목적은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서라나.


​누구라도 믿기 힘든 얘기다. 그럼에도 사쿠라이는 좋은 기삿거리라 여겨 아마노와 함께 타치바나를 찾게 되는데, 실로 믿을 수 없는 상황들이 계속 벌어지자 사쿠라이도 점점 아이들에게 동화되어 간다. 그건 신지 부부도 마찬가지. 신지는 어느 정도 지구인의 습성에 적응해 가면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기 시작한다. 신지 역시 나루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나, 믿기 힘든 건 나루미도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신지의 이상한 능력을 목격하면서 슬슬 신지의 편이 되어간다. 


아저씨! 나 외계인이에요


대략의 설정이 이러하다. 언뜻 보기에 초등학생에게나 먹힐 만한 만화 같은 얘기지만, 영화의 디테일들을 살피면 짐짓 숙고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다분하다. 외계인이 돼버린 인물들은 지구인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재점검을 유도한다. 가령, ‘나’와 ‘너’. ‘소유’와 ‘사랑’ 등 사람이 익히 알고 있어 재고조차 않는 단어들의 기본 의미와 맥락을 새삼 따져 묻는 식이다. 인류 문명의 발달이 언어가 발명된 이후, 급격하게 빨라졌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저 하나의 생명체였던 존재가 언어를 익히면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도 부언할 필요가 없다. 언어를 통해 인간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개념을 익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삶을 개진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언어의 규칙과 쓰임을 망각하게 된다면 인간은 어찌 되겠는가. 모든 게 혼란이자 최초로 되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랬을 때 세계는 외려 더 적나라하게 그 진상을 드러내게 될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 집단과 집단 사이의 반목, 다른 생명체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 등 모든 것이 언어를 기반하고 결국 또 다른 언어로 개념화되어 일정한 질서 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런데 그 질서가 과연 온당하고 자연의 원리에 부합하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인간의 질서에 의해 자연이 망가지고 지구가 병들어간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선 지구를 살려야 한다고 외치는 말들이, 그 절박한 사정과 의미에도 불구하고, 때로 공허하게 들리는 건 바로 그런 연유다. 


영화에서 외계인들은 지구 침략을 목적으로 지구인의 몸속에 잠입했다고 말한다. 왜 침략하려 하는지, 어떻게 지구인들을 몰살시키려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없다. 그러다 후반부에 이르면 지구를 침략하려는 자는 오히려 지구인들이고 인류를 몰살시키려 하는 자 역시 지구인들이라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오래전부터 영화에서 외계인이란 설정은 대기권 바깥을 상상하여 거꾸로 발명해 낸 ‘자신의 안의 다른 존재’였다. 영화 속 외계인이 원생대의 생물이나 유인원과 흡사한 외형을 갖게 된 것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관습적으로 디자인된 탓이다. 


외계인은 ‘내 안의 다른 존재’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바로 그러한 영화적 관습을 까발리고 뒤집어 버린다. 외계인은 지구인의 외형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다만,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보기에 지구의 위기와 병폐를 전체적으로 통찰해 낼 뿐이다. 산속에선 산이 안 보이고 물속에선 바다를 아우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자신조차 지구 안의 생물에 불과하면서도, 때로 더 지구에 해로울 수 있는 지식과 기술로 지구를 진단하고 해부하려 한다. 그러한 행위는 빙하가 녹는다고 북극에다가 냉방기를 틀어놓는 식의 자가당착이 될 위험도 다분하다. 사람은 과연 지구를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까.


섣불리 답을 내긴 어렵다. <산책하는 침략자> 역시 분명한 답은 내놓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의 막바지에 다다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는 건 그 어떤 언어적 해법보다 명확한 답이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영화 속 외계인들이 사람을 감화시키는 방식 같은 것. 상대의 이마에 검지를 대면 갑자기 상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며 순식간에 다른 인성으로 변한다. 영화가 실제로 그런 식으로 보는 이를 감화시키는 게 가히 놀랍고도 황망했다. 더 자세한 건 영화를 보면 안다. 힌트를 하나 주자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신지를 비롯한 외계인들이 아니고, 다름 아닌 나루미라 보는 게 타당하다. “온 인류를 사랑하는 건 쉽다. 그러나 자신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정말 어렵다.” 도스토옙스키가 한 말이다. 영화를 보고 새삼 떠올랐기에 첨언한다. (죽지 않는 시인의 영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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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스트라스버그, 스텔라 애들러, 해롤드 클러먼이라는 제자들을 배출하고 이제는 헐리우드의 일급 감독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리처드 볼레스라브스키(Richard Boleslavsky, 1889~1937)는 1937년 조앤 크로퍼드 주연의 영화를 촬영하던 도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스승은 잊혔지만 스승이 가져온 것은 살아남았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최초로 미국 땅에 전달한 이 책, 『연기6강(Acting: The First Six Lessons)』이 그것이다.


이 책은 1933년 뉴욕의 Theatre Arts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됐다. 교재가 아니었다. 볼레스라브스키가 1920년대 내내 Theatre Arts Monthly에 기고한 연기론 칼럼들을 엮은 것이었다. 형식은 대화였다. 교사인 저자와 열정적이지만 재능이 불분명한 젊은 여배우 사이의 여섯 번의 대화. 그 대화 안에 농축된 수업이 미국 연기 교육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군인이었다가 배우가 됐다가 연기 스승이 된 사람

본명은 볼레스와프 리샤르트 스르제드니츠키(Boleslaw Ryszard Srzednicki). 1889년 2월 4일, 당시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폴란드계 가톨릭 가문에서 태어났다. 트베르 기병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 장교의 길을 걷던 그는 연기에 이끌려 방향을 틀었다. 1906년, 모스크바 예술극장(Moscow Art Theatre, MAT)의 스쿨에 입학해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i)와 그의 조교 레오폴트 술레르지츠키(Leopold Sulerzhitsky) 아래에서 훈련을 받았다. 1909년, 스타니슬랍스키의 유명한 투르게네프 연출작 '시골에서의 한 달(A Month in the Country)'에서 주역 벨랴예프를 맡았다. 학생으로서 MAT 무대에서 주역을 받은 것은 드문 영예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볼레스라브스키는 러시아 제국군 기병 중위로 동부 전선에서 싸웠다. 1917년 10월혁명 이후 러시아를 떠났다. 이후 바르샤바, 프라하, 파리, 베를린을 거쳤다. 폴란드에서 영화 연출을 시작했고, 1921년에는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의 승리를 다룬 반다큐멘터리 영화 '비스와의 기적(Cud nad Wisla)'을 만들었다. 1922년에는 덴마크 감독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Carl Theodor Dreyer)의 독일 영화 'Die Gezeichneten'에 배우로 출연했다. 같은 해 9월, 뉴욕에 도착했다.


아메리칸 래버러토리 시어터 — 메소드의 발원지

1923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미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볼레스라브스키는 이 순회공연에 배우 겸 스타니슬랍스키의 조교로 합류했다. 공연 이후, 프린세스 시어터에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소개하는 강연 시리즈를 열었다. 이 강연이 미국 연극 후원자 미리엄과 허버트 스톡턴(Miriam and Herbert Stockton)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이들의 재정 지원으로 아메리칸 래버러토리 시어터(American Laboratory Theatre, 이하 '랩')가 설립됐다.


볼레스라브스키는 유학 동료 마리아 우스펜스카야(Maria Ouspenskaya)와 함께 랩을 이끌었다. 랩의 학생 명단은 후일 미국 연극사의 목차가 됐다.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 스텔라 애들러(Stella Adler), 해롤드 클러먼(Harold Clurman). 이 세 사람은 모두 랩의 동문으로, 1931년 그룹 시어터(Group Theatre)를 창설했다. 그룹 시어터는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미국 연기에 최초로 체계적으로 적용한 앙상블 단체였다. 스트라스버그는 훗날 이 시스템을 '메서드(The Method)'로 발전시켜 액터스 스튜디오(Actors Studio)에서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 더스틴 호프먼 세대를 훈련했다.


​랩은 1930년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발성 영화의 등장으로 할리우드에서 극작가와 연출가 수요가 급증했고, 볼레슬라프스키는 영화 연출 계약을 받아 뉴욕을 떠났다. 1930년 컬럼비아 픽처스를 시작으로 MGM, 20세기 폭스, RKO 등 주요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1932년 'Rasputin and the Empress'는 배리모어 3남매(에텔, 존, 라이어널)가 함께 출연한 유일한 영화로, 당시 화제를 모았다. 이후 'The Painted Veil'(1934, 그레타 가르보), 'Les Miserables'(1935, 프레드릭 마치와 찰스 로튼), 'Theodora Goes Wild'(1936, 아이린 던)를 연출했다.


여섯 번의 대화, 하나의 철학

『연기6강』은 교사인 저자(I)와 젊은 여배우 '크리처(The Creature)' 사이의 대화 여섯 편으로 이루어진다. 수업의 제목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1. 집중(Concentration), 2. 감정의 기억(Memory of Emotion), 3. 극적 행동(Dramatic Action), 4. 성격화(Characterization), 5. 관찰(Observation), 6. 리듬(Rhythm).


여섯 항목은 독립된 기술이 아니다. 하나의 신념에서 파생된 여섯 갈래다. 그 신념을 볼레슬라프스키는 이렇게 요약했다. "연기는 예술을 통해 탄생하는 인간 영혼의 삶이다(Acting is the life of the human soul receiving its birth through art)." 기술보다 내면이 먼저다. 테크닉 이전에 진실이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이 여섯 수업 전체를 관통한다.


첫 번째 수업 '집중'에서 볼레스라브스키는 집중을 "영혼에 대한 정신적 집중"으로 규정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오직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야 감지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능력. 두 번째 수업 '감정의 기억'은 이 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챕터다. 리 스트라스버그가 메서드를 발전시키는 데 직접적인 출발점이 된 개념이 여기 있다. 배우는 과거의 감정 경험을 저장하고, 필요할 때 정확하게 불러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무대 위에서 없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 실제로 경험했던 감정의 기억을 재활성화한다는 원리다.


세 번째 수업 '극적 행동'은 내면 충동이 어떻게 무대 위의 행동으로 전환되는지를 다루고, 네 번째 '성격화'는 캐릭터를 실제 삶의 역사를 가진 인물로 구축하는 방법을 다룬다. 다섯 번째 '관찰'은 볼레스라브스키가 삶을 연구하는 방식 자체를 요구한다. 배우는 언제나 세상을 관찰하는 눈을 열어두어야 한다. 마지막 '리듬'은 한 공연 안의 감정적 흐름과 긴장의 파동을 다룬다.


​대화 형식이 가르치는 것

이 책의 형식 자체가 내용과 맞닿아 있다. 교사는 크리처에게 직접 답을 주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고, 연습을 지시하고, 크리처가 스스로 경험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도록 이끈다. 볼레스라브스키가 스타니슬랍스키에게 배운 방식 그대로다. 배우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감각으로 습득한다.


Goodreads의 독자 평들이 이 지점에서 일관되게 갈린다. 대화 형식이 "이론을 살아 있게 만든다"고 평가하는 쪽이 있고, "교사가 크리처에게 지나치게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답한다"고 불편함을 표하는 쪽이 있다. 이 분열 자체가 볼레스라브스키가 의도한 방식이다. 연기를 가르치는 책이 독자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Powell's Books의 소개 문구는 이 책의 성격을 정확하게 요약한다. "집중, 감정의 기억, 극적 행동, 성격화, 관찰, 리듬에 관한 여섯 편의 미니어처 드라마들. 이것들은 모든 배우 앞에 놓인 도전을 증류해낸다." 수업이 아니라 드라마라고 부른 것은 정확하다. 읽는 동안 독자도 크리처와 함께 교사의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 책은 1933년 이후 90년 넘게 절판된 적이 없다. Theatre Arts 출판사에서 출간된 뒤, Taylor & Francis 등 여러 출판사를 통해 계속 찍혔다. 현재는 Theatre Arts Book 시리즈 판본이 가장 널리 유통된다. 2013년에는 초판 원본 책의 형태, 색상, 활자, 심지어 종이 질감까지 초판 발행 당시의 모습을 물리적으로 완전히 똑같이 재현한 복제본도 나왔다. 그리고 2024년 드디어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Goodreads 리뷰의 공통 평가는 "연기에 관심이 없어도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이다. 집중, 감정 기억, 관찰이라는 주제가 연기 기술에 국한되지 않고 삶의 태도 자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몇 시간 만에 읽혔는데, 읽는 내내 '나 자신의 이야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독자 반응이 반복된다.


한편 학술적 평가는 좀 더 복잡하다. 스타니슬랍스키 연구자들은 볼레스라브스키가 스타니슬랍스키의 초기 개념, 특히 감정 기억(정서 기억, affective memory)에 특별히 큰 비중을 뒀다는 점을 지적한다. 스타니슬랍스키 자신은 이후 신체 행동 방법(Method of Physical Actions)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초기의 감정 기억 중심 접근을 일부 수정했다. 스트라스버그는 볼레슬라프스키의 감정 기억 개념을 발전시켰지만, 스타니슬랍스키의 후기 수정을 사실상 무시한 채 '메소드'를 구축했다. 이 계보상의 분기점에서 볼레슬라프스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은 셈이다.


마흔여덟 살의 죽음, 그리고 남은 것

1937년 1월 17일, 조앤 크로퍼드와 윌리엄 파월 주연의 'The Last of Mrs. Cheyney'를 촬영하던 중 볼레스라브스키는 심장마비로 숨졌다. 마흔일곱 살이었다. 영화는 조지 피츠모리스와 도로시 에이즈너가 마무리했다. 그의 아들 얀은 당시 생후 18개월이었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7021번지에 별이 새겨져 있다.


볼레스라브스키는 생전에 세 권의 책을 남겼다. 1932년 자전적 1차대전 회고록 'Way of the Lancer'와 'Lances Down'(모두 헬렌 우드워드와 공저), 그리고 1933년 『연기6강』. 소설가 휴 월폴(Hugh Walpole)은 1937년 소설 'John Cornelius'를 볼레슬라프스키를 추모하며 헌정했다.


그가 없었다면 스트라스버그는 어떻게 됐을까. 그 질문에 스트라스버그 본인은 이렇게 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거기서(아메리칸 래버러토리 시어터에서) 우스펜스카야와 볼레스라브스키에게 나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원칙들을 배웠다." 메서드가 말론 브란도를 만들었고, 그것이 현대 영화 연기의 기준이 됐다. 그 연쇄의 최초 연결고리가 1933년에 출간된 이 얇은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방법

『연기6강』은 연기를 배우는 사람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볼레스라브스키가 '크리처'에게 가르치는 것들 — 집중, 관찰, 감정의 저장과 재생, 리듬 — 은 어떤 창조적 작업에도 적용 가능한 원칙들이다.

분량은 짧다. 빠르면 하루에 읽힌다. 그러나 각 챕터를 읽은 뒤 볼레슬라프스키가 크리처에게 제시한 연습들을 실제로 시도해보지 않으면 텍스트의 절반만 접한 셈이다.

볼레스라브스키의 이 책은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진입로로 읽어도 좋다.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논쟁적이며, 그래서 가장 중요한 진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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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을 모방하기 보다는 자연과 일치하기를 원한다."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그가 남긴 말 중 하나다.브라크에게 회화는 자연을 복제하는 일이 아니었다. 자연과 화음을 남기는 일이었다. 그 차이가 그의 생애 전체를 관통한다.

화가의 단상집이라는 장르는 낯설었다. 파울 클레(Paul Klee),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같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 이론을 글로 남겼다. 브라크는 이론을 쓴 것이 아니라 단상을 남겼다. 다른 의도다.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진지하게, 보이는 진실 하나하나를 고정하려는 의지였다. 그 35년의 직무가 『낮과 밤(Le jour et la nuit)』이다.


1882년 5월 13일, 브라크는 파리 근교 아르장퇴유(Argenteuil)에서 태어났다. 르아브르에서 성장했다. 조부와 부친이 건물 도장업을 하면서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한 집안이었다. 브라크는 르아브르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오통 프리에즈(Othon Friesz), 라울 뒤피(Raoul Dufy)와 함께 미술을 배웠다. 이 시절의 훈련, 즉 장인의 눈으로 타일을 다루고 표면을 가공하는 습력이 후일 그의 회화에 직접 반영됐다는 평이 프랑스 미술계에서 공통적 견해다.


1900년 파리로 이주한 브라크는 아카데미 앙베르(Academie Humbert)에서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프랑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를 만났다. 1906년 에스타크(L'Estaque) 해안 풍경화로 야수파(Fauve) 스타일에 진입했다가, 1907년이 그의 회화 인생의 분기점이 된다. 엑스(Aix)에서 폴 세잔(Paul Cezanne)의 회고전을 보고,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소개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아틀리에에서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을 목격했다. 이 조우가 브라크의 경로를 완전히 바꿨다.



큐비즘의 탄생 — 피카소와의 시절

1907년 11월,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피카소를 만났다. 브라크는 에스타크에서 시도한 풍경화 연작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화에 반응했다. 1908년 가을, 드니엘-앙리 카날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 갤러리에서 브라크의 첫 전시가 열렸다. 비평가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은 브라크의 건물 피사체들을 "작은 큐브들(petits cubes)의 집합"이라 평했다. 큐비즘(Cubisme)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비롯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스스로 자신들의 협업을 "로프로 연결된 등반자들(La Cordee)"에 비유했다. 1908년부터 1914년까지, 두 사람은 여름을 세레(Ceret)와 소르그(Sorgues)에서 함께 작업하며 큐비즘 분석기를 전개했다. 1912년 브라크는 파피에 콜레(papier colle), 즉 신문지나 인쇄 종이를 화면에 직접 붙이는 기법을 최초로 도입했다. 이것이 현대 콜라주 기법의 기원으로 평가받는다. 피카소는 훗날 편지에서 브라크를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한 여성(la femme qui m'a le plus aime)"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두 사람의 관계의 깊이를 전하는 동시에, 큐비즘 혁명에서 브라크의 기여가 피카소에 비해 과소평가되는 경향에 대한 미묘한 인정이기도 했다.



일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전쟁 — 두개골 천공 수술과 35년의 준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브라크는 보병 제224연대로 징집됐다. 피카소는 아비뇽 역에서 군복 차림의 브라크를 전송했다. 두 사람이 수년간 이어온 대화는 그 순간 끊겼다.

1915년 5월 11일, 브라크는 뇌빌-생-바스트(Neuville-Saint-Vaast) 전투에서 두부에 중상을 입었다. 전사한 것으로 여겨져 방치됐다가 다음 날 들것병들에게 발견됐다. 두개골 천공 수술(trepanation)을 받고 이틀간의 혼수상태 끝에 의식을 되찾았다. 회복에 1917년까지 걸렸다.


바로 이 1917년,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와 함께 평상의 단상들을 정리해 문학 잡지 『노르-쉬드(Nord-Sud)』 제10호에 발표했다. 제목은 「회화에 대한 사상과 성찰(Pensees et reflexions sur la peinture)」. 이 글이 이후 35년간 작성된 단상들의 출발점이 된다. 전쟁이 붓을 빼앗았지만, 성찰은 계속됐다.


전후 브라크의 회화는 큰 변화를 거쳤다. 큐비즘의 납작한 기하학에서 점차 곡선으로 돌아오고, 단일한 색채로 화면을 통일하는 대상을 고집했다. 인물, 정물, 비둘기. 같은 대상을 수년간 반복해 그렸다. 브라크에게 싫증은 없었다. 다음 단계는 언제나 안에서 발견해야 했다.


그의 단상들도 같은 방식으로 성장했다. 1917년부터 단상을 쓰기 시작한 브라크는 1952년까지 35년 동안 이 작업을 이어갔다. 하루에 하나를 쓰기도 하고, 몇 달에 하나를 쓰기도 했다.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 단상들은 노트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 임리에서 나온 것을 다듬고 완성하는 방식으로 겹쳐졌다.

주제도 회화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보이는 것에서 숨겨진 것으로, 지식에서 감성으로, 단순에서 복잡으로. 브라크의 단상은 회화의 주제와 거의 하나로 이어진다. 색, 구도, 관점, 언어, 자연, 시간, 남기는 것과 사라지는 것. 판단하지 않는다. 단정짓지 않는다. 하나의 주제를 여러 개의 신중한 문장으로 접근한다.


『낮과 밤』 

브라크는 정식 논문이나 에세이를 쓰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짤막한 노트에 문장을 적었다. 대부분은 한 단락 안에 담겼다. 그 중 일부를 선별해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를 통해 있는 그대로 내놓았다. 브라크 스스로 고른 제목 '낮과 밤(le jour et la nuit)'에 주제 정의가 담겨 있다. 내려앉는 것과 떠오르는 것, 보이는 것과 숨은 것, 시작과 끝, 있는 것과 없는 것.​


쪽 수는 초판 기준 56쪽이다. 형태는 인-12판(In-12)으로 손안에 들어오는 소형 판본이다. 작가의 드로잉 2점이 수록되어 있다. 1952년 8월 4일 인쇄를 마쳐 발행됐다. 라피마-나바르(Lafuma-Navarre) 순지 100부 한정판(tirage de tete)과 일반지 판 두 종으로 발행됐다. 현재도 갈리마르 파리 서점 공식 판매 목록에 올라 있다.


브라크의 아포리즘은 두 가지 구조를 가진다. 

첫째, 개념들을 반의의 쌍으로 충돌시킨다. 

"언제나 두 가지 생각, 하나를 무너뜨릴 또 하나의 생각을 가져야 한다.(Il faut toujours avoir deux idees, l'une pour detruire l'autre.)" 

둘째, 직접적인 관찰로 곧장 들어간다.

 "감정은 덧붙여지거나 모방할 수 없다. 감정은 배아고 작품은 부화(l'eclosion)다."


프랑스 아포리즘 전문 매체 Aphorismundi의 평가다. "브라크는 17세기 모랄리스트들의 진정한 계승자로, 리듬감 있고 종종 이분법적인 아포리즘 안에서 인간과 세계 표상에 연관된 복잡한 개념들을 정의하려 한다." 이 평은 브라크의 글쓰기가 단순한 화가의 메모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짚는다.


​루브르로 — 생애 말년의 영예

​1937년 카네기 국제 미술전 카네기상(Prix Carnegie), 194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1952년에는 루브르 박물관 관장 조르주 살레(Georges Salles)의 의뢰로 루브르 앙리 2세 홀(salle Henri-II) 천장에 새(Oiseaux) 테마의 장식화 작업을 맡았다. 1953년 제막식이 열렸다. 피카소는 자신이 선택되지 않은 것에 불쾌해하며 브라크가 자신의 비둘기(colombes)를 베꼈다고 비난했다. 브라크는 피카소에게 답하지 않았다.


1961년, 루브르에서 회고전 「브라크의 아틀리에(L'Atelier de Braque)」가 열렸다. 살아 있는 화가로서 루브르에서 개인전을 연 최초의 예술가였다. 사망 2년 전의 일이었다. 1963년 8월 31일, 브라크는 파리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였다. 그가 살던 파리 거리명은 훗날 조르주-브라크(rue Georges-Braque)가로 바뀌었다.


1963년 9월 3일, 루브르 콜로나드 앞에서 국장이 열렸다.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문화부 장관이 추도사를 낭독했다. 말로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의 어떤 국가도 자국에서 세상을 떠난 화가에게 이러한 성격의 헌사를 바친 적이 없다. 프랑스의 명예에 빅토르 위고라는 이름이 있다. 이제 브라크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프랑스인들에게 말해야 한다. 한 국가의 명예는 무엇보다 그 국가가 세계에 무엇을 주는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말로의 추도사 전문은 현재 malraux.org 공식 아카이브에서 열람할 수 있다.


​화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

​『낮과 밤』은 순서대로 읽히지 않는다. 어떤 페이지를 열어도 된다. 다음 페이지의 단상이 앞의 페이지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브라크 스스로도 선형적으로 이어지도록 쓴 텍스트가 아니다. 단상들은 여러 주제를 오가면서 반복하고, 서로 충돌하고, 때로는 돌고 돌아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브라크에게는 천천히 읽는 독자가 더 잘 맞는다. 하나의 단락을 읽고 잠시 멈추는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 5단락씩 읽어도 되고, 집어들고 필요할 때 열어봐도 된다. 추상적인 것도 많지만, 직접적인 것이 더 많다. 브라크는 주제를 열어 놓고 미끄러져 들어가는 일을 독자에게 넘기는 편이다.


단상은 스케치보다 짧다. 그 압축이 브라크만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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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12월, 베르사유 군사법원에서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은 피고석에 섰다. 파리 코뮌(Paris Commune) 가담 혐의였다. 판사가 형량을 선고하기 전, 미셸이 먼저 말했다. 당신들이 나를 죽이길 거부한다면 내가 먼저 요구하겠다고. 종신 유형이 선고됐다. 미셸은 이 선고에 저항하지 않았다. 동료들이 총살당하는 마당에 자신만 가벼운 벌을 받는 것이 오히려 부당하다고 여겼다.


이 장면 하나가 루이즈 미셸이라는 인간을 압축한다. 두려움보다 원칙이 앞서고, 살아남는 것보다 신념을 지키는 것이 먼저였다. 그 원칙이 교사로서의 삶에서, 바리케이드에서, 유형지에서, 그리고 감옥 안에서 쓴 회고록에서 일관되게 이어진다.


사생아로 태어나 교사가 되다

1830년 5월 29일, 프랑스 북동부 오트-마른(Haute-Marne)의 브롱쿠르-라-코트(Vroncourt-la-Côte)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성주 집안의 하녀였고, 아버지는 그 집의 아들이었다. 미셸은 사생아였다. 성주인 조부모가 그녀를 거두어 길렀다. 조부모는 당시 기준으로 드문 자유주의적 교육을 미셸에게 제공했다. 그 교육이 이후 그녀의 모든 것을 결정했다.


어린 시절부터 빅토르 위고(Victor Hugo)에게 편지를 보냈다. 위고는 답장을 보냈고, 두 사람의 교류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위고는 미셸의 재판 과정을 보고 나서 용기를 ‘비로 마조르(Viro Major, 남자보다 위대한)’이라는 시로 기렸다. 1853년부터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865년에는 파리 몽마르트르(Montmartre)에 직접 학교를 열었다. 수업료를 낼 수 없는 노동자 자녀들을 받았다. 미셸에게 교육은 직업이 아니라 혁명의 준비였다.

파리에서 미셸은 혁명가들과 접촉했다. 1870년에는 여성권리협회(Association pour les droits des femmes) 창설에 참여했다. 보불전쟁(Franco-Prussian War, 1870~1871) 당시에는 파리 포위전에서 부상병 구호와 여성 위원회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1871년 3월, 코뮌이 시작됐다.


73일의 코뮌 — 바리케이드 위의 교사

파리 코뮌은 1871년 3월 18일 시작돼 5월 28일 진압됐다. 73일이었다. 미셸은 이 73일 동안 전선에 있었다. 몽마르트르 18구. 국민군(National Guard) 61대대와 함께 이시(Issy), 몽마르트르, 클라마르(Clamar) 전투에 참가했다. 남성 군복을 입고 바리케이드에 섰다.


프랑스 언론은 그녀에게 ‘라 비에르주 루주(La Vierge Rouge)’, 붉은 처녀라는 이름을 붙였다. 경멸과 공포가 섞인 호칭이었다. 미셸은 그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5월 24일, 어머니가 자신 대신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자 직접 경찰에 출두했다. 어머니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이것이 그녀가 체포된 경위였다. 경찰은 비열하게도 어머니를 인질로 삼아 루이즈 미셸을 검거한 것이다.


군사법원의 기소장은 미셸이 “군중의 열정을 자극하고, 무자비한 전쟁을 선동하며, 지옥의 음모로 인질들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적었다. 미셸은 이 기소 내용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진술했다. 종신 유형이 확정됐다. 사형을 면한 것에 대해서도 미셸은 감사를 표하지 않았다.


뉴칼레도니아 — 유형지에서 카낙 편에 서다

1873년 8월, 미셸은 유형선 비르지니(Virginie)호에 올랐다. 함께 탄 사람 중에는 아나키스트 나탈리 르멜(Nathalie Lemel)이 있었다. 르멜은 항해 중 미셸에게 아나키즘 이론을 전했다. 뉴칼레도니아 유형 시절, 그녀는 아나키즘으로 사상적 전환을 이룬다.


유형지에서 미셸은 카낙(Kanak) 원주민과 교류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기록했다. 1878년 카낙 봉기가 일어났을 때, 미셸은 프랑스 식민 당국이 아니라 카낙 편에 섰다. 유형수 신분으로 식민지 원주민의 저항을 지지한 것이다. 미셸은 카낙 어휘 수집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이 자료는 이후 프랑스-카낙 어휘 연구의 기초가 됐다.


유형지에서도 미셸은 아이들을 가르쳤다. 유형수 자녀들을 가르치고, 원주민 아이들을 가르쳤다. 식물 실험을 통해 열대 기후에 적합한 밀 품종을 개발하는 시도도 했고 식물의 전염병을 백신을 연구하기도 했다. 유형이 그녀의 삶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없다. 1880년 코뮌 참여자 전체에 대한 사면이 선포됐다. 미셸은 11월 9일 파리로 돌아왔다. 엄청난 군중이 마중을 나왔다.


감옥에서 쓴 책 — 회고록의 탄생

귀국 후 미셸은 강연과 저술을 이어갔다. 1883년 1월, 파리 앵발리드(Les Invalides) 광장 시위에서 군중을 이끌고 빵집 약탈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에서 6년 형을 선고받았다. 3년 복역 후 사면됐다. 이 복역 기간인 1883년에서 1886년 사이, 미셸은 회고록(Mémoires)을 집필했다.


책은 1886년 2월 11일, 출판사 루아(Roy)에서 출간됐다. “제1권”으로 표기됐다. 후속 권이 이어질 것을 예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행본 형태의 제2권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대신 1890년, 사회주의 신문에 69회 연재의 형태로 그 내용이 발표됐다. 이 연재분은 오랫동안 ‘실종된 제2권’으로 불렸다가 뒤늦게 발굴돼 <죽음을 향해: 미출판 회고록 1886~1890(A travers la mort: Mémoires inédits, 1886-1890)>으로 별도 출간됐다.


2021년에는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가 CNRS 연구원 클로드 레타(Claude Rétat)의 편집·주석 작업을 거친 폴리오 역사(Folio Histoire) 시리즈 304번으로 <회고록>(1886)을 재출간했다. 576쪽 분량이었다. 파리 코뮌 150주년을 맞아 다시 꺼내든 텍스트였다. 원래 출판 당시 협상 과정에서 미셸이 자신의 문체를 지키고 동료들의 기억을 보호하는 방식을 편집자와 직접 조율했다는 사실도 이 시기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루이즈 미셸 회고록 — 선형이 아닌 기억의 구조

회고록은 자서전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시간 순서대로 삶을 서술하지 않는다. 독자가 이미 알고 있다고 전제한 사건들 — 코뮌, 재판, 유형 — 을 비선형적으로 교차시킨다. 현재와 과거가 뒤섞이고, 회상과 선언이 한 문단 안에 공존한다. 독자 주석 없이 읽기 어려운 밀도다. 이것은 결함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미셸의 문체는 ‘불타오르는(enflamé)’ 것으로 당대 독자들에게 묘사됐다. 부드럽지 않고, 완충재가 없다. 페미니즘 사상, 아나키즘, 빈자에 대한 연대가 동시에 터져 나온다. 여성 교육에 대한 분노, 생라자르 감옥 여성 수감자들과의 대화, 코뮌 동료들에 대한 기억이 섞인다. 회고록은 개인의 삶을 집단의 싸움과 분리하지 않는다.


루이즈 미셸 회고록 안에 미셸의 페미니즘 선언이 압축된 문장이 있다. “노동자는 노예다. 그러나 노동자의 아내는 노예들 중의 노예다.” 이것은 수사가 아니었다. 미셸은 여성의 해방을 계급 해방과 분리된 별도의 과제로 보지 않았다. 두 가지가 동시에 실현되지 않으면 둘 다 불완전하다는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당대 여성 참정권 운동과는 다른 거리를 두었다. 의회 정치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회고록>이 출판됐을 때 독자들이 놀란 것은 정치적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서사의 신선함 때문이었다. 격식 있는 자서전도 아니었고, 정치 팸플릿도 아니었다. 혁명가의 내면과 일상이, 분노와 서정이, 이론과 기억이 하나의 목소리로 흘렀다. 1886년 당시 이런 형식의 여성 자서전은 거의 없었다.


빅토르 위고, 폴 베를렌 — 동시대가 그녀를 기린 방식

빅토르 위고는 미셸의 용기를 시로 남겼다. ‘비로 마조르(Viro Major)’라는 제목의 시에서 위고는 미셸을 이렇게 썼다. 그녀의 날들, 밤들, 모든 이에게 내준 걱정과 눈물, 타인을 돕는 가운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 위고는 아나키스트가 아니었다. 그러나 미셸에 대해서는 시인으로서의 판단을 내렸다. 이 여성은 영웅적이지 않은 것을 할 수 없다고.


시인 폴 베를렌(Paul Verlaine)은 1883년 재판 이후 미셸에게 시를 바쳤다. 1888년에는 샤를 기르(Charles Guyé)가 르아브르(Le Havre) 강연장에서 미셸에게 총을 쐈다. 두 발을 맞았다. 미셸은 부상 이후 법원에 출석해 가해자를 옹호하는 진술을 했다. 그는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이므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이 진술이 당대 신문들에 크게 보도됐다. 미셸이 생산한 가장 강력한 정치적 발언은 연설이나 글이 아니라 이런 행동들이었다.


런던 망명, 그리고 마지막 강연

1890년, 미셸은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자발적 망명이었다.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와 프랑스 당국의 압박을 피해 런던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1890년부터 1905년 사망 직전까지, 미셸은 프랑스와 유럽 각지를 돌며 강연을 이어갔다. 아나키즘, 여성의 권리, 노동자 연대가 강연의 중심 주제였다.


1905년 1월, 미셸은 마르세유(Marseille) 강연 중 쓰러졌다. 1월 9일, 마르세유에서 사망했다. 향년 74세였다. 장례식은 파리에서 열렸다. 세 세대에 걸친 혁명가들이 운집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 집회였다.

2020년에는 뱅크시(Banksy)가 지중해 난민 구조선에 미셸의 이름을 붙였다. 루이즈 미셸호. 여성 선장이 이끌고, 페미니즘·반인종차별·반파시즘 가치를 내건 배였다. 미셸이 1878년 카낙 봉기를 지지했던 것, 그리고 』회고록『에서 아랍 유형수들에 대해 쓴 것과 같은 결이었다. 억압받는 자들의 편이라는 원칙은 국적과 시대를 가리지 않았다.


회고록을 읽는다는 것

루이즈 미셀 회고록은 한 혁명가의 자기 서술이다. 그러나 자기 서술이기만 한 책은 아니다. 미셸이 기억하는 것은 개인의 삶이 아니라 집단의 싸움이다. 코뮌에서 함께 싸운 사람들, 유형지에서 함께 살아남은 사람들, 감옥에서 함께 복역한 사람들의 이름이 이 책을 채운다. 미셸 자신은 오히려 뒤로 물러난다.


독자가 시대적 맥락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읽는다면 이 책은 더 소중하게 다가설 것이다. 코뮌이 무엇이었는지, 등장하는 여러 인물이 누구인지, 뉴칼레도니아 유형이 어떤 조건이었는지. 그 맥락 없이 읽으면 인명과 지명과 사건이 연달아 쏟아지는 텍스트로 읽힌다.(한국어 번역본은 원본에 없는 이런 배경에 관한 주, 인물에 관한 주를 충실히 달아두었다) 그러나 그 맥락 안에서 읽으면, 이 책은 19세기 프랑스 하층 민중의 삶과 싸움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술한 기록이 된다.

미셸이 재판정에서 한 말이 회고록을 읽는 기준이 된다. “우리가 원한 것은 사회혁명이었다. 사회혁명은 내 가장 소중한 소망이다.” 이 소망은 책 전체에 걸쳐 반복된다. 분노로, 애도로, 서정으로, 때로는 구체적인 교육 방법론으로. 미셸에게 글쓰기는 싸움의 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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