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영화’를 말하는 동시에 ‘뱀파이어’를 말한다. 당연히 ‘뱀파이어’에 관한 방대한 자료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그의 탄생을 설명하기 위해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던 11세기 이전부터 근대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를 끌어온다. 드라큘라 가문의 시조는 물론 뱀파이어가 발아한 ‘악’을 다루며, 수 세기 동안 기록으로 남겨진 종교적 일화와 기사, 관련 자료들을 함께 제시한다. 중세와 근대를 지나오며 시대에 따라 변천한 악의 역사와 인간 의식의 변화는, 추상이 어떠한 방법으로 구체가 되어 개념으로 자리 잡아 우리 눈앞에 현현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면서, 뱀파이어와 영화가 갖는 인접성을 증명한다.
죽었거나 혹은 나쁘거나, ‘뱀파이어’
뱀파이어는 애초 산송장, 시체를 뜯어먹는 추잡한 괴물, 그러나 전혀 무섭지 않은 괴물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점차 우리가 익히 아는 속성들이 부여되더니 브램 스토커의 소설과 함께 지금의 뱀파이어, ‘용의 자식(악마의 자식-‘드라큘라’)’으로 자라났다. 악마의 자식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삶에 암약한 기독교적 악마도 아니다. 왜냐하면 뱀파이어는 눈에 보이는 십자가는 두려워하지만 정작 추상적 개념인 신앙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속성의 변화를 추적하면, 우리가 어떻게 (본질로서의) 추상과 현상의 세계를 넘나들고, 어떤 위치에서 대상의 의미를 규정해 왔는지 알게 된다. 근대는 추상에서 현상으로, 본질에서 질료의 세계로 관심이 넘어온 시기이며, 본질은 버리지 않되 실체로 여긴 것을 개념으로 수용한 시대로, ‘영화’가 탄생하여 인간 의식에 자리 잡는 과정과 흡사하다.
‘영화’ 역시 인간 의식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19세기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움직이는 이미지를 가질 생각을 했으며,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보이는 대로 기록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언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도구’가 되었다. 저자는 이 움직이는 이미지의 탄생이 어떻게 뱀파이어의 탄생과 겹치고, 뱀파이어가 ‘영화’ 안에서 어떻게 개념화되어 나타나는지, 둘의 유사한 작동 방식을 들어 설명한다. 단순히 우연의 관점에서 둘의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 물질세계 저편에 있는 의식, 혹은 추상인 ‘악’과, ‘악’이 현상에 작동하는 방식에 비추어 ‘뱀파이어’와 ‘영화’가 가진 동일한 탄생과 속성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누구도 쓰지 않은 책이다. ‘영화’를 미학적인 입장에서 설명하는 이론서는 많았지만, 인간 의식의 역사와 ‘영화’를 연관 지어 규정하고, 그 속성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탁월한 장치의 하나로서 ‘뱀파이어’를 제시한 사람은 없다. 빛과 어둠의 히야투스, 간섭, 교차, 서로에 대한 욕망, 이렇게만 말해도 ‘뱀파이어’와 ‘영화’는 얼마나 친숙한가! 게다가 어떤 소재를 다루고 어떤 이야기를 하든, ‘영화’는 계속해서 이 개념을 우리에게 전사하고 있다. 즉, 이는 과거 이야기가 아니며, 지금 여기, 우리 눈앞에 움직이는 ‘영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미지이며, 이미지의 힘이다.
뱀파이어와의 조우
오늘날 우리에게 뱀파이어는 호기심과 흥미를 제공하지만, 사실 악의 연대기를 몸에 지닌 중요한 문명사적 존재이다. 저자는 뱀파이어와 영화가 가진 개념적 장치의 유사성을 짚어내며 ‘뱀파이어’의 탐구가 곧 ‘영화’의 탐구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악’과 이 각각의 영화들, 놀랍게도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것이 도구적 관점에서의 ‘영화’임을 일깨운다.
‘영화’는 하나의 ‘말’이다. ‘영화’는 언어는 아니지만 자신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이 책은 ‘뱀파이어’와 ‘영화’의 연대, 그 은밀한 교접을 말한다. ‘영화’와 ‘뱀파이어’, 이들이 모두 19세기에 나왔다는 사실은, 이 시기가 인간 의식의 향방을 좌우한 중요한 분기였음을 시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뱀파이어’는 단순한 소재가 아닌 우리 의식의 작동 방식이며, ‘영화’는 그 근대의 작동 방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본질과 현상, 추상과 현실, 악과 인간 사이의 경계, <왕좌의 게임>의 북벽―사실성 없는 놀라운 얼음벽―은 이들 개념의 경계 위에 지어졌다. 이제 우리는 이 경계의 무너짐과 침투, 간섭, 뒤섞임 등에 대해 말할 것이며, 같은 경계를 지닌 영화들의 문제도 함께 들여다볼 것이다.
뱀파이어, 영화들, 그리고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동굴은 차원 너머에 있지 않다. <오즈의 마법사>의 회오리바람 속, 마법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둘 다,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에 보이지 않는 입구이다. 영화관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블루 벨벳>, <블로우 업>, <샤이닝>, <황혼에서 새벽까지>, <마부제 박사>, 그리고 <왕좌의 게임>까지, 이 책에서 언급하는 영화들은 모두 그 과정을 다루거나 더 나아가, 이 방 안에서 겪게 되는 앨리스와 도로시의 모험을 다룬다.
세계를 다루면서(<블루 벨벳>), 의식을 다루면서(<블로우 업>), 혹은 멕시코로 건너가다 잠시 들른 요란한 술집 이야기를 하면서(<황혼에서 새벽까지>), 오버룩 호텔의 끔찍한 공허, 즉 공포를 말하며(<샤이닝>), 저자는 이들을 통해, ‘작품으로서의 영화’ 안에 담긴 ‘도구로서의 영화’를 발견하고 그 전율을 독자와 공유한다. 그리고 역설한다. 이 감독들이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영화’가 우리를 보고 있다고 말이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영화’도 우리를 보고 있다. 지난 1세기 동안 인류가 미친 듯이 빨려들었던 이 몽롱한 세계, <마부제 박사>는 살았거나 죽었거나 우리를 그 세계로 끌어들인다. 뱀파이어! 마부제 박사! 그가 곧 ‘영화’이며, ‘영화’가 해온 일을 한다. 저자는 뱀파이어를 가리켜 노스페라투, 악과 삶, 실제로 우리 삶에 얹힌 두 차원의 묘한 뒤섞임을 선사하는 흡혈귀임을 밝히는 동시에 그의 또 다른 정체를 폭로한다. 그것이 바로, ‘영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