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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 저자의 『뱀파이어, 이미지에 관한 생각』(불란서책방, 2024)은 뱀파이어와 영화가 '이중적 질료성'이라는 공통 속성을 지닌다는 독창적 시각으로, 공포와 매혹의 존재인 뱀파이어를 통해 영화 이미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합니다. 


"이중적 질료성"은 김성태의 책에서 핵심 개념입니다. 


쉽게 말하면, 뱀파이어와 영화는 둘 다 "실체가 없지만, 특정 조건을 만나면 잠깐 존재를 얻는" 존재라는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뱀파이어는 낮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밤이 되면 육체를 입고 나타납니다. 영화 속 인물은 현실에 없는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스크린에 투영되는 순간 관객은 그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느낍니다. 


둘 다 "허구 속 존재"이면서, 특정 조건(밤/스크린)을 만나야만 비로소 질료, 즉 몸·실체를 얻는다는 점이 같습니다. 이게 바로 이중적 질료성의 핵심입니다.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관객과 뱀파이어의 관계를 "흡혈"에 빗댑니다. 뱀파이어가 인간을 자신의 최면 속으로 끌어들이듯, 영화도 관객을 스크린 앞에 붙들고 현실감을 이식합니다. 


그래서 "뱀파이어는 영화 자체이고, 관객은 흡혈의 대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죠.


이중적 질료성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개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꽤 정교한 '존재론적' '주장'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철학에서 질료(質料)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형상을 받아들이는 재료"를 뜻합니다. 조각상으로 치면 대리석이 질료이고, 그 돌에 새겨진 형태가 형상(形相)입니다. 그런데 뱀파이어와 영화는 질료가 두 겹으로 작동합니다. 


평소에는 질료가 없는 순수한 관념(이야기, 이미지)으로 존재하다가, 특수한 조건이 주어지면 일시적으로 질료를 얻어 현실에 침투합니다. 이 "이중성"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핵심입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침투가 완전한 현실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뱀파이어는 거울에 비치지 않고, 햇빛을 받으면 사라집니다. 영화 속 인물은 관객이 극장을 나서는 순간 다시 스크린 안으로 돌아갑니다. 둘 다 현실을 넘나들되, 결코 완전히 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 "경계에 머무는 존재"라는 특성이 두 존재를 더욱 묶어 줍니다.


또한 저자는 "매혹"이라는 공통점도 강조합니다. 뱀파이어는 공포스럽지만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관객은 스크린 위의 이미지가 허구임을 알면서도 울고, 웃고, 공포에 떱니다. 이 "알면서도 속는" 자발적 취약성이 흡혈의 메커니즘과 정확히 겹친다는 것이 저자의 통찰입니다.


결국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영화론입니다. 뱀파이어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영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우리가 왜 어두운 극장에 앉아 낯선 이야기에 감정을 내어주는지, 왜 허구인 줄 알면서도 스크린 앞에서 무력해지는지 — 그 불가사의한 경험의 구조를 "뱀파이어성"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은 이미 한 번씩 뱀파이어에게 목을 내어준 셈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도 기꺼이 극장에 앉는다는 사실이, 그 흡혈이 결코 불쾌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 책은 크게 두 개의 대부(大部)로 나뉘며, 그 앞에 짧은 서문 격의 글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전체 312쪽의 분량 안에서, 저자는 뱀파이어라는 존재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하는 1부에서 출발하여 뱀파이어-영화라는 등식을 다양한 작품에 적용하는 2부로 넘어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책은 "건너기 전의 다리 이 편에서"라는 제목의 서두로 시작합니다. 제목 자체가 의미심장한데, 저자가 앞으로 펼쳐갈 논의 전체를 "경계를 건너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뱀파이어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듯, 이 책 자체도 공포 문화사와 영화 철학 사이의 경계 위에 서 있음을 처음부터 예고합니다.

1부: 드라쿨레아에서 노스페라투로

1부는 뱀파이어라는 존재가 어디서 왔는가를 묻는 역사적·문화적 탐구입니다. 저자는 19세기와 20세기를 각각 하나의 장으로 나눠 다룹니다.

첫 번째 장에서는 뱀파이어 이미지의 기원을 중세 유럽의 공포 문화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합니다. 악과 마법, 마녀, 흑사병, 십자군 전쟁 등 중세인들의 실존적 공포가 어떻게 뱀파이어라는 형상 안에 응결되었는지를 설명하며, 특히 블라드 3세(Vlad the Dragon), 즉 역사 속 실존 인물 드라쿨 3세가 뱀파이어 신화의 토대에 어떤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분석합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신의 침묵 앞에서 생겨난 공백, 페스트가 만들어낸 죽음에 대한 공포가 뱀파이어라는 초자연적 존재를 필요로 했다는 논지는 단순한 괴물 기원론이 아니라 일종의 문명 공포사에 가깝습니다.

두 번째 장은 이 공포의 형상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영화의 탄생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다룹니다. 브램 스토커의 소설 속 드라큘라가 런던으로 '건너오는' 장면을 분기점으로 삼아, 뱀파이어가 근대 도시 문명 속으로 침투하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이어 무르나우의 무성영화 〈노스페라투〉(1922)와 〈파우스트〉를 경유하면서, 뱀파이어가 영화라는 매체를 만나 어떻게 새롭게 변형·재탄생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최면 이미지의 힘"을 다루는 소절은 이중적 질료성 개념의 직접적인 서막으로, 카메라 앞에 선 이미지가 관객을 최면 상태로 이끄는 구조를 뱀파이어의 흡혈 행위와 겹쳐 읽습니다.

2부: 어지러진 사건의 지평선

2부는 더욱 자유롭고 넓게 펼쳐집니다.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는 물리학적 개념, 즉 블랙홀의 경계면으로부터 은유를 빌려, 저자는 뱀파이어-영화의 속성이 구현된 다양한 영화 작품들을 하나씩 불러냅니다. 각 소절은 사실상 개별 영화론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거론되는 작품들이 흥미롭습니다. 뱀파이어 영화가 아니라 안토니오니의 〈Blow-Up〉,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그리고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을 연상케 하는 노스트로모(우주선 이름)가 등장합니다.

저자는 이 작품들에서 뱀파이어적인 것을 찾아냅니다. 〈Blow-Up〉에서는 스크린 속에 존재하지 않는 공(Ball), 즉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사물을 뱀파이어적 허구성의 사례로 읽고, 〈샤이닝〉의 오버룩 호텔에서는 과거가 현재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초시간적 공포를 분석합니다. "나포당함, 끌려감"이라는 소절 제목은 영화 관람의 경험 자체를 뱀파이어에게 붙들리는 감각으로 표현한 것으로, 앞서 다룬 이중적 질료성 개념이 구체적인 작품 분석을 통해 검증되는 부분입니다.

2부의 마지막은 프리츠 랑의 〈마부제 박사〉 시리즈와 영화 일반을 직접 등치시키는 논의로 마무리됩니다. 마부제는 변신과 최면, 타인에 대한 지배를 능력으로 삼는 악당인데, 저자는 그가 뱀파이어-영화의 속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캐릭터라고 봅니다. 영화 관객은 마부제의 피지배자이자, 스크린 앞의 흡혈 대상이라는 논지가 여기서 완성됩니다.

정리하자면, 1부에서 뱀파이어가 어떤 문화적 필요에 의해 태어났는지를 밝힌 뒤, 2부에서는 그 뱀파이어성이 영화라는 장치 안에서 어떻게 반복·심화되는지를 개별 작품들을 통해 입증합니다. 단순히 뱀파이어가 많이 나오는 영화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영화 관람이라는 행위 자체를 흡혈의 구조로 해석하는 영화 존재론에 가까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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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 고통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젯거리다. 고통을 자각하는 건 동물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의 뇌는 물리적 고통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과 세계 구조 사이의 연결성을 의식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보다 치명적이다. 동물은 고통에 즉물적으로 반응하다가 극에 달하면 죽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고통을 없애거나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강구해왔다. 그래서 고통이 완화되거나 사라지기도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전이되기도 한다.


기계와 섞여 변형되는 인간의 몸


신체의 고통은 몸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만물에게 불가피하다. 바이러스나 병원체에 의해서든, 사고에 의해서든, 또는 애초에 몸이 지닌 자기 재구성 과정의 한 방식으로든 고통은 상시적이다. 고통에 대한 불안이나 암시는 정신적 스트레스로도 이어진다. 병에 걸리지나 않을까, 혹은 사고나 자연재해에 희생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은 삶의 기본 전제마저 되짚게 만들기도 한다. 그에 대한 대처 능력을 마련하려는 것 자체가 때로 더 큰 고통을 생산하기도 한다. 고통은 삶의 기본 조건과도 같다. 그래서 고통은 모든 철학과 과학의 주요 전제가 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그로 인해 변형되는 인간의 물리적 형질 및 신체와 기계 문명 사이의 기묘한 접합 또는 분열 양상에 대해 줄곧 탐구해 온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짐짓 뚱딴지같으면서도 초지일관하는 면이 있다. 작품 대부분이 SF나 B급 호러 사이 어디에선가 혼자만의 괴이한 공간과 물질(특히 인체)을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SF나 호러 전문 감독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도 없다. B급 호러의 형식을 취한 초기 작품들도 특유의 신체 변형과 기계 문명의 뒤틀린 비전을 독특하게 뒤섞은 묵직한 메시지로 독창성을 드러냈었다. 그리고 그 괴이한 독창성이 온갖 편견과 숭앙의 갈림길이 되었다. “내 영화가 난해하다고? 이 사람아, 세상이 더 난해해!”라며 느긋하고 건조하게, 옆구리 쿡쿡 찌르는 듯한 일침을 나로선 꽤 즐기는 편이다. 


그중 <크래시>(1996)는 내게 아직도 각별하게 남아있다. 크로넨버그가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G. 발라드의 문제작(1973년에 초판이 나왔다)을 그대로 영상에 옮긴 작품이다. 소설이 발표됐을 때도, 영화가 개봉됐을 때도 극심한 논란이 일었다. 역겹고 비틀리고 왜곡된 성 관념으로 인간을 모욕하는 작품이라는 악평도 드셌다. 결국 엽기적인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하지 않겠냐는 비난인 것인데, 영화화되기 직전 제임스 발라드는 이런 발언을 했다. 


 "나는 『크래시』 도처에서 자동차를 하나의 성적 이미지로써 현대 사회의 삶에 대한 총체적 은유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 소설은 성적 내용과는 별도로 꽤나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크래시』가 테크놀로지를 근간으로 한 최초의 포르노그래피 소설이라 여기고 싶다. 어떻게 보면, 포르노그래피는 가장 옥죄고 무자비한 방식으로 인간이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이용하고 착취하는지를 다룬 가장 정치적 형태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 『크래시』 (제임스 발라드, 김미정 옮김, 그책, 2011) ‘들어가는 말’에서 


50년 전에 쓰인 원작 소설과, 3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 자동차와 섹스하며 기존 도덕률을 무참할 정도로 까뭉개는 그 작품의 강렬도는 여전히 유효하고 치명적이다. 남녀가 대놓고 보란 듯 벌거벗은 채 살을 섞는 영상은 이제 포르노그래피 축에도 못 낀다. 세계의 모든 사건과 사고를 전하면서 서로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가상 시스템의 전파력 자체가 무엇보다 농밀한 포르노그래피의 전시장인 것이다. 정치가, 언론이,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른 테크놀로지의 이념이 현재 그러하다. <크래시>는 그렇게 벌어지고 깨진 ‘틈’을 훤히 들여다보라고 쓰이고 만들어진 작품이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포르노그래피의 노예였다. 포르노그래피는 의외로 모든 걸 보여주지 않는다. 보지 말라고 눈 감게 하거나, 듣지 말라고 귀를 막는 게 포르노그래피의 진짜 목적이다. 내가 나임을, 그리고 당신이 당신 자신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순간, 망념의 쇼가 끝나고 진짜 인생이 시작될 테니까. 진짜 인생이 가득해지면 가짜로 꿀을 바르고 가짜로 피를 바른 것 앞에서 당신의 욕망은 세상의 ‘진짜’를 알려고 들 테니까. 그때, 세상은 멸망한다. 가치 판단은 없다. 멸망은 여전히 ‘근미래’다. 가깝지만, 아직 알 수 없는 미래. 이미 세상은 미래마저 잡아먹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크로넨버그는 집요하고 줄기차다. 인간의 육체와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를 뒤섞은 그만의 독특한 과학적이고도 묵시록적인 은유 체계가 <미래의 범죄들>로 향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 진화의 끝. 이 영화는 그가 평생(벌써 여든을 훌쩍 넘겼다) 만들었던 영화의 종합판으로 여겨진다. 


노년 거장, 자신의 작품들을 종합하다


2022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대되어 기예르모 델 토로가 격찬했다는 뉴스 한편엔 영화 시작 10분 만에 극장을 뛰쳐나간 관객이 수두룩했다는 소식도 있다. 과연 크로넨버그 영화다운 반응이다. 한국 개봉은 아직 예정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적인 의견을 여담 삼아 얹자면, <폭력의 역사>(2007) 이후 그의 페르소나가 된 비고 모텐슨은 이 영화에서 실제로 외모가 크로넨버그를 연상케 한다. 말을 타다가 허리를 다쳐 영화 중 절반 이상을 누워있는 연기로 일관했다는 건 굉장히 아이러니하기도 적확하기도 하다. 그가 연기한 행위예술가 사울 텐서는 여러모로 크로넨버그 자신의 모습이라 여겨졌다. 괴이하고 묵시록적인 주제를 상상 그 이상의 영상 테크닉으로 충격을 안겨주는 예술가의 초상. 이 영화가 왠지 자전적이라는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영화는 어느 바닷가에서 시작한다. 옆으로 뒤집힌 채 바다에 반쯤 침몰한 배(유조선?)가 보이고 한 아이가 갯벌에서 숟가락으로 진창을 뒤적거리고 있다. 멀리서 아이의 엄마가 아이에게 외친다. “아무거나 먹으면 안 돼!” 아이는 일견 평범해 보인다. 이 대사가 뭘 의미하는지는 얼마 안 가 밝혀진다. 곧이어 아이가 화장실에서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비스킷인 양 야금야금 뜯어먹는 장면이 나온다. 참다못한 아이 엄마가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그러면서 인간의 장기 변화로 인한 식성 및 성격, 나아가 신체의 변형을 모티프 삼아 행위 예술을 구현하는 사울 텐서의 작업장이 나온다. 


사울은 인간의 장기 형태로 꿈틀대는 침대에서 잠을 자는 중이다. 레아 세두가 연기한 조력자 카프리스가 곧바로 등장한다. 아무거나 먹는 아이와 사울의 퍼포먼스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밝히는 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생략하겠다. 그 이후 이야기들도 마찬가지다. 크로넨버그의 작품들은 스토리를 알려주는 것으로 힌트를 얻을 게 거의 없는 영화이다. 그의 작품은 직접 체험하는 것만이 제대로 된 감상법이라 할 수 있다. 그 체험은 단순히 객석에 앉아 눈과 귀를 열어 두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너무 황당하고 엽기적이어서 되레 내가 죽을 때까지 직접 확인할 수 없는 몸속 내장들을 들여다보는 느낌마저 든다. 그걸 어찌 일설로 다 안내할 수 있으랴. 


인간은 욕망으로 진화하여 욕망으로 종말한다


크로넨버그는 2013년 <코스모폴리스>를 만든 적 있다. 하루 종일 거대한 리무진에서 생활하며 온갖 투자를 통해 뉴욕을 지배하는 젊은 자본가가 주인공인 영화다. 이 영화 역시 그저 상류사회의 호화판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가 아니다. 크로넨버그는 일명 ‘바디호러’라 불리는 스타일의 영화 외에도 <스파이더>(2005), <폭력의 역사>(2007), <이스턴 프라미스>(2008) 등 인간의 심리 기저에 잠복한 폭력성과 피해의식, 그리고 그것들을 점점 극대화시키는 세계 전체의 체계와 자본의 음모 등을 끈적끈적하게 그려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카를 융의 애증 관계를 기묘한 심리 스릴러로 표현한 <데인저러스 메소드>(2012)는 그나마 온건(?)한 편에 속한다. 앞서 <미래의 범죄들>이 크로넨버그 영화의 종합판 같다는 건 그런 의미다. 


기계 문명과 인간 사이의 죽이고 살리고 먹고 먹히면서 첨단과 파멸을 공유하는 설정, 그리고 그 안에 내재한 인간의 원시적 섹슈얼리티와 폭력성에 대한 진단, 자연적 진화를 지나 점점 다른 물질로 변해가고 있는 인간에 관한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통찰들. 그런 주제를 믿기 힘든 물질들을 재구성해 각성케 하는 영화를 보다가 뛰쳐나가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미 자신도 모르게 얽혀있는 세계의 첨예한 음모에 질려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어느 심원한 밑바닥에서 캐어낸 진귀하고 색다른 구성체를 통해 인류의 미래를 끊임없이 반추하고 속도를 제어하는 각성의 진미를 느껴버린 사람 또한 별반 다를 것 없다. 세계는 이미 인간이 나아갈 바를 인간 스스로 정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 시발은 결국 인간의 욕망이었고, 그 종말 역시 인간의 욕망을 폭력으로 대체하는 인간의 오만에 의할 것이다. 


기계들이 있고 인간이 있다. 인간의 과학적 확증과 오만을 통해 만들어진 기계들은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해 왔다. 하지만 기계 문명이 진보할수록 거기서 발생한 본질적 폐해들이 거꾸로 증명된다. 그리고 그러한 역류가 악과 정의에 대한 새로운 표본을 제시하며 인간 자체를 병들게 한다, 문장이 복잡한가. 사실 자체가 복잡한 것인데, 인간 대부분은 그 사실 자체의 복잡성에 대해 숙고하는 걸 괴로워한다. 아무리 기계가 인간의 통증을 일시적으로 완화시켜 줄 수 있더라도, 모든 병이 그렇듯, 근본 치료는 인간이 왜 병들 수밖에 없는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거쳐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 성찰 자체가 만병통치의 중심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역시 인간에겐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복잡한 존재의 사슬을 잠시나마 일깨워주는 장면이 있다.


인간은 잘못 만들어진 로봇인가


​눈과 입을 꿰맨 채 온몸에 수십 개의 귀가 붙어있는 댄서가 춤을 추는 장면. 굉장히 명상적이고 종교적인 느낌마저 든다. 보지도 먹지도 못하게 구속된 육체로 수십 개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과연 어떤 소리일까. 춤은 격렬하기도 나긋하기도 하다. 댄서는 아무 표정이 없다. 물론, 수십 개의 귀는 사울이 인공적으로 장착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퍼포먼스가 그렇듯, 이것은 그저 하나의 쇼에 불과하다. 사실, 자본과 정치가 작동하는 체계도 쇼의 속성을 지녔다. 그리고, 영화도 당연히 쇼다. 그런데 그 쇼가 이미 몸과 정신에 내장된 실체처럼 세계라는 장기판을 들었다 놨다 하는 세상. 진실도 정의도 악도 폭력도 그렇게 꾸며지고 가공된다. 인간은 이제 만들어 붙여진 수십 개의 귀처럼 인간 스스로를 가공하고 고통을 위장한다. 위장함으로써 없애려 한다. 인간은 이제 잘못 만들어진 로봇과도 같다. 죽음을 물질화한 것을 먹고, 물질이 된 죽음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각은 역시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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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처음 어둠에서 탄생했다. 물론, 역사에 기록된 바로는 18951228일 프랑스 파리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상영한 것이 최초의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뤼미에르(Lumière)’을 뜻한다). 그들은 세상이라는 어두운 벽면에 새로운 문명의 빛을 쏘았다고도 할 수 있다. 정확히 130년 전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만이 아니다. 영화는 본래 어둠 속에 빛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영화가 지금도 그렇다. 영화 감상의 태도 및 생태계를 전면적으로 바꾸어 놓은 OTT 채널 감상 등 가정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어떤 물리적 조명(照明)의 유무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일종의 비유나 상징으로 여겨도 된다. 또는 그런 식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내 고집을 투사하는 것이라 봐도 부인하지 않겠다. 단지, 내게 영화란 어둠을 먹고 사는 물질적 환영이라는 사실만 강조하고 싶다.

 

나는 영화 평론가도 아니고, 영화 종사자도 아니다. 그저, 오랫동안 시를 쓰고 때로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영화와는 아주 가까울 수도 있고, 때론 상반되거나 빗나갈 수도 있는 예술적 지향을 지닌 사람일 뿐이다. 자신을 스스로 어떠어떠한 사람이라 규정하는 건 지나친 자기 비하나 자기 치장에 가까울 것이나, 내가 종종 이 세상의 중심에서 어느 정도 엇나간 위치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그 엇나간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 모음집이자, 엇나감의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에 대한 감상이라 해도 무방하다.

 

영화보다,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하고 황당무계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현실이다. 딱히 요즘만 그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소위 상식과 표준이라는 것 자체를 오도하고 호도하는 일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되레 상식과 표준의 본질을 따져 묻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상식과 표준자체가 때론 인간을 억압하고, 눈 귀를 가리며, 사지를 친친 감아 버리기도 한다. 영화는 그 이상한 현실의 역설을 역상으로 되비추는 거름판과도 같다. 그래서 생각해 보는바, 영화는 오히려 더 현실보다 낯설고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함으로써 현실이 가려버리는 어떤 흑막(?)들을 거꾸로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영화들은 그런 기준으로 내게 포착된 작품들이다.

 

반복건대, 영화는 어둠에서 처음 탄생했다. 어둠은 현실이 감추고 있거나 현실을 감추고 있는 무언가의 흑막과도 같다. 누가 조작했는지, 혹은 어떻게 사람의 눈 귀를 가리면서 허상의 빛에 홀리도록 만들었는지를 새삼 따지는 건 별로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세상에도,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속에도 어둠은 항상 존재한다는 근본 사실만 따져본다. 시공 포괄하여 세계는 어둠 속에서 작동한다. 삶과 세계의 이면과 후면이 모두 쉬이 판별할 수 없는 어둠 속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누군가 총을 쏘듯 빛을 쏜다. 현실에서 떼어낸 듯 여겨지는 어떤 형상과 소리와 이야기들이 허공에서 빛의 너울로 일렁인다. 현실을 투영했다는 그것으로 오히려 현실을 뒤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게 내가 영화를 감상하는 기본이다. 내게 영화는 망상의 거울과도 같다. 그러니까 그것은 나의 현실이기도, 나의 꿈이기도 하다. 그 모든 사념을 배반하는 심정으로 독자들은 이 책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하시라.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총 한 자루를 건네는 기분이다. 탄창엔 총알이 단 한 발 남았을 수도, 꽉 차 있을 수도 있다. 방아쇠를 당기면 진짜 죽을 수도, 다시 살 수도 있다. 죽든 살든, 새삼 현실도 영화도 더없이 낯설어진다면 이 책은 그나마 효능 있는 물건으로 누군가에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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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이미지에 관한 생각』 은 뱀파이어라는 매혹적이고도 기괴한 존재가 인류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어떻게 형상화되고 소비되어 왔는지를 다각도로 조명한 인문학 서적이다.

이 책은 단순히 괴물로서의 뱀파이어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적 맥락에 따라 변화해 온 뱀파이어의 '이미지'와 그 속에 투영된 인간의 욕망, 공포, 그리고 사회적 함의를 분석한다.

진화하는 괴물의 형상

민담 속의 흉측한 시체에서 시작해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거쳐, 현대의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주인공에 이르기까지 뱀파이어 이미지의 변천사를 다룬다. 회화, 문학,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매체에서 뱀파이어가 어떻게 재현되는지, 특히 고전 영화와 현대 대중문화 속 뱀파이어의 차이점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 뱀파이어는 인간 사회의 '타자'를 상징한다. 책은 뱀파이어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동시에 무엇을 갈망하는지를 인문학적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다.

뱀파이어의 원형이 된 동유럽의 민담과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어떻게 흡혈귀 전설로 둔갑했는지, 19세기 문학을 통해 뱀파이어가 어떻게 세련된 '귀족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지 분석하며 오늘날의 뱀파이어가 더 이상 공포의 대상만이 아니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고뇌를 하거나 대중의 선망을 받는 아이콘이 된 과정을 추적한다.

이 책은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통해 '본다는 것'과 '이미지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한다.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은 독자뿐만 아니라, 기호학이나 시각 문화 이론에 흥미가 있는 독자에게도 유익한 통찰을 제공한다.


저자 김성태는 뱀파이어라는 렌즈를 통해 인간 문명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단순한 장르 비평을 넘어 이미지가 권력을 획득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추적한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와 대중적 재미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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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이렇게 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이 글들은 영화에 관한 글이지만, 뭐에 관한 글이든 그렇습니다.
문자로도 가감없습니다. 문자가 씌여졌다고 실재하는 건 아닌거겠죠.
그럴 때가 더 많겠습니다만, 결국 문자 안에서 실체는 드러납니다.
실재하는지 실재하지 않는지.
그것이 살이고 피여서, 살아 움직이는지.
그런 글이 있습니다.
아니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책입니다.
무엇을 쓰더라도, 이렇게 썼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글입니다.
그건 저만의 생각입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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