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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볼레슬라브스키가 대화 형태로 쓴 책 『연기 6강』은 배우가 연기를 하기 위해 가져야 할, 훈련해야 할 모든 것을 알려준다. ‘연기 예술의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다. 하지만 연기 기술은 하고자 한다면 익힐 수 있고, 발전시킬 수 있다’라는 전제하에 자신의 재능을 발산하기 위해 자기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먼저 묻는데, 사실 뜨끔했다. 


제목은 강의라고 되어 있지만 연기를 배우러 온 어린 배우와의 대화를 통해 진정한 배우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잘 짜인 희곡이라 읽는 재미가 있어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읽는 동안 연기하는 나 자신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며 반성하고, 좌절하고, 다시 힘을 내기도 했다. 연기 기술의 핵심인 ‘집중과 관찰, 경험과 기억, 움직임과 균형, 창조와 투사’를 훈련하는 방법을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어 연기에 관해 이 책보다 더 잘 말할 수 있을까 할 정도다. 물론 연기가 손에 잡히는 게 아니라서 당사자가 되어 직접 훈련받지 않으면 알 듯 모를 듯하지만 연기가 막힐 때 책의 내용을 곱씹는다면 분명 도움이 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뒤늦게 연기를 시작하면서 부족한 연기를 어찌하나? 연기를 좋아하는 만큼 재능이 많은 것도 아닌데 배우를 하는 게 맞나? 고민이 많았다. 이 책을 통해 내가 한참 안일했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배우가 되려면 어떤 마음과 정신으로 어떻게 훈련해야 하는지 마음을 더 다잡을 수 있었다.


연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도, 연기를 오랫동안 해 온 사람들에게도 배우로서 늘 옆에 두고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배우가 내 길이 아니구나.’ 하며 다른 길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이 또한 나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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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포비
다니엘 보릴로.카롤린 메카리 지음, 김영신 옮김 / 불란서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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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쉬 걸>이란 영화를 본 후였는지, 저 유명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본 후였는지, 그도 아니면 <본즈 앤 올>을 본 후였는지는 모르겠다. 뜬금없이, , 미워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한 것은.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기에, 미워하는 건 이해는 하겠는데, 이처럼 지독하고 집요하게 한결같이 역사적으로 미워하고 있는 이 인간의 행위란 도대체 무얼까, 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이내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접기로 했다.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니까. 사랑을 하고 섹스를 하는 것. 때론 지루하고 뻔한 일 아닌가. 누구나 이미 본 '아주 오래된 연극'이란 것.

동성애가 대체 뭐야, 라고 묻는 순간 덫에 걸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다달았다. 그럼 남은 건, 도대체 왜, 그렇게 집요하게 미워하는 걸까였다. 이런 저런 책을 찾던 중에 발견한 책이 <호모포비>였다. 미워함의 역사적 기원과 양태를 알아가다보니 결국은 동성애자란 가부장제와 출산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일 뿐인데, 가부장제와 출산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진 나 같은 이성애자도 동성애자 처럼 미워함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아니, 확실히 난 미움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갇힌 동성애자는 분홍 삼각형 표식이 주어졌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들에게는 미국으로 갈 수도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동성애자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더우기 그들은 2017년이 되어서야 수용소의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당연한 인간적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것, 이 책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었다. 왜 미워하는가가 아니라 왜 권리를 주지 않는가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질문 일것이다.


책은 고대 성서시대와 그리스 로마, 기독교 시대를 거쳐 중세와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입장과 관점에서 동성애를 다루는 양태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근대에 들어, 과학과 의학, 이데올로기와 관료체제, 그리고 부르주아 시민사회가 형태를 달리하며 교묘하게 권리를제한하고 소외시키며 혐오를 조장하는 매커니즘을 볼 수 있다.


어떤 독자분의 혜안이 머리에 남는다. "<호모포비>는 동성애 혐오에 대해 이야기 하는 데 그건 곧 인간의 행위를 집요하게 부정하고 배격하는 또 다른 인간에 대한 이야기" 라는 구절. 


그리고 서점 직원의 다음과 같은 말도 인상적이다. "책을 읽다 보면 결국 동성애 혐오는 이성애 기준에서 다른 수많은 혐오와 차별들과 유기되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예를 들면, 성차별, 인종차별과 같이 말이다. 혐오는 혐오를 낳고 더욱이 여성과 아이, 약자로 흘러가는 매커니즘을 가진다. 특정 무언가를 옹호하는 글이 아니다. 혐오는 우리 모두에게 있기에 누구나 마주해야 하는 진실임을 잊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독을 권한다."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가 동성애와 이성애의 구분조차 무의미한 쪽을 향해, 생각보다 빨리 달려가고 있다. 혐오를 멈추고,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고, 무관심해지는 것. 내가 다른 이성애자에게 그들의 성애에 무관심한 것 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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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한 남자
펠릭스 발로통 지음, 김영신 옮김 / 불란서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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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발로통의 그림을 보는 일은 언제나 가고자 하는 곳에 닿지 못하면서도 지도를 유심히 살피는 것과 같다. 또는 분명 한 번은 와 본 곳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입구를 지나치거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쩔쩔매는 것이기도 하다. 좁은 화폭에서도 무수한 복선과 암시, 속임수가 지뢰처럼 화면 곳곳에 묻혀있다.


원색의 화려함으로 장식된 거실에서 손을 맞잡은 두 남녀의 모습이 사랑의 확인인지 파국의 전조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의 그림엔 언뜻 익숙한 이야기가 놓여 있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길을 잃고 망연히 서성거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리를 뜰 수도 없는 것이 원색과 흑백의 모호한 서사, 이미지와 표제의 충돌이 우리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물론 그대로 머무는 것 또한 쉽지 않은데 그 모호함은 우리가 수없이 보고 겪어온 바로 그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논리적 일관성이나 명백한 감정과 관계가 흔들리는 세계에 대한 재현은 사실적인 이미지 속에 배치된 어두운 그림자의 기묘한 조화 속에서나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호함 속에 짧은 삶을 살아낸 청년의 이름은 자크 베르디에. 펠릭스 발로통이 쓴 소설 [유해한 남자]의 인물은 자신의 선의나 사소한 행위가 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의식으로 어린 시절 일찍이 자신을 폐쇄한 청년이다. 자신의 단순한 행위들은 언제부터인가 타인에게는 모호한 행위, 치명적인 순간엔 유해한 행위가 되곤 했다. 그에게 세상은 명료한 그 무엇이 아니다. 무모한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혀 늘 자신을 번복하거나 포기하거나 혹은 다시 시작한다. 되풀이되는 자기 합리화, 그리고 부정과 추앙, 그 사이의 우연한 일탈은 마침내 사랑의 승리자가 되려는 순간 그 사랑을 죽음으로 인도한다. 그렇게 청년은 이해 불가의 세계에 던져진 태고의 저주가 된다.


그의 삶은 따뜻함이라곤 없던 고통의 연속이자 타인에게 다가서려 했으나 끊임없이 스스로를 밀어내버린 외롭고 메마른 삶이었다.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타인에게 이해받지도 못한 채 사랑의 갈망으로 삶을 마감한 청년의 삶에서 펠릭스 발로통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펠릭스 발로통은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이념론자"가 아니며, 일반적으로 무기력하고 허영심 많은 어리석은 자들이 흔히 그렇듯 이론들 속에서 영혼을 고갈시키지도 않는다.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비관적이다. 그러나 이 비관주의는 공격적이지도 않고 독단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이 정확한 남자는 최선의 상황에서도 낙관적인 기대로 자신을 속이지 않으며, 최악의 상황에서도 비관적이길 원치 않는다. 그는 매 순간 솔직함과 진실을 추구한다.”
-옥타브 미르보, 1910년 1월 10일에서 22일까지 파리 드루에 갤러리에서 열린 발로통 전시회 카탈로그의 서문.


참고로 [유해한 남자]를 자전적 소설이라 불렀지만, 자전적 소설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의견을 달리 할 수도 있겠다. 분명 [유해한 남자]는 펠릭스 발로통의 소설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어린 시절이나 청년기의 인물 묘사는 분명 젊은 발로통의 자화상 그대로다. 그리고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장면은 그의 초기 회화의 장면 속 이야기에 닿아 있다. 그리고 자크 베르디에가 젊은 미술평론가로서 내리는 홀바인과 앵그르에 대한 평가는 발로통의 그것과 정확히 같다. 그런 이유를 들어 자전적 소설이라 소개해도 될 만하다고 생각했던 점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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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모호한 대상
피에르 루이스 지음, 김영신 옮김 / 불란서책방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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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을 압도하거나 휘발시키는, 넘쳐나는 감각의 소유자 피에르 루이스. 그에게 여성은 단지 관능의 매개이자 피사체일 뿐이다. 여성에 대한끝없는 갈망을 언어와 이미지로 표현하고 대상을 느끼며 대상의 내부로 들어가 자신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러나 여성은 언제나 알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존재였으므로 그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시도가 된다. 감각과 피사체를 향한 강박은 더욱 강화되고, 그만큼 피사체, 대상에 집착하는 악순환으로 빠져들어 피에르 루이스는 결국 자신에게 무감해지고 자신을 폐쇄하고 말았다. 소설의 원제는 <la femme et le pantin>, 직역을 하면 <여인과 꼭두각시>쯤 된다.


피에르 루이스의 소설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흔히 벨 에포크라 불리던 시대의 부르주아 남성들의 내면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작가 자신의 내면이자 욕망이다.
부유하고 나이 든 남자가 우연히 만난 어린 여자에게 집착한다. 여자는 이 남자가 원하는 것을 훤히 꿰뚫고 있다. 어느 순간엔 적당히 받아주거나 사랑을 속삭이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 돈. 어느 순간엔 서슴없이 안면을 몰수하거나 종적을 감춘다. 남자가 집요하게 원하는 것은 절대 주지 않는다. 그럴수록 남자는 더욱 이 여자에게 집착하는 악순환으로 빠져든다. 변덕과 모순으로 가득한 이 여자는 악녀일까?


한편, 이 여자는 가난한 환경에서 어머니를 책임지고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강인한 여자인 동시에 주어진 삶을 최대한 즐기며 자신을 잃지 않는 여자이기도 하다. 여자는 단지 자신을 드러낼 뿐, 여자의 변덕, 모순, 변화무쌍한 얼굴은 그녀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소설의 화자인 남자의 의식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니까.


여자는 자신의 삶을 살뿐, 팜프파탈과는 거리가 멀다. 진짜 파탈한 건 대개 다 남자이고 이 소설에서도 남자는 상당히 바보스럽고 위협적이다. 세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당당한 부르주아 남성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낯선 여자, 뭘 해도 도저히 여자의 내면을 알 수도, 그녀의 몸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이 남자는 갈수록 피폐해지면서 욕망은 극에 달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을 떠올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남자는 무척 경험이 없는 남자다.)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이해불가의 영역인 타인의 내부를 향한 맹목적인 갈망과 집착. 이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거기엔 감정도 관계도 역사도 인간성도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아름다운 시대'가 만들어낸 무중력의 세계, 타인을 통해 자신의 내부를 밝히려는 강박.
루이 브뉘엘은 이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사에 남을 역작을 만들어냈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


그런데 이야기의 여주인공, 한 인물을 두 사람의 배우가 연기를 하도록 했다. 왜 두 명일까?원작 소설의 1인칭 시점은 남자 주인공에게 강력한 동조를 불러일으키고 남자 주인공이 느끼는 대로 무의식적으로 여성 인물을 대상화하고 판단하게 된다. 남자의 시선. 루이 브뉘엘은 바로 이 남자의 시선을 문제 삼았던 것은 아닐까.


편집을 통해서 소설보다 화자의 흔적을 잘 지워내는 영화의 관습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난해하다고 느낄 정도로 한 인물에 두 명의 배우를 기용했다. 한 명의 여배우가 연기해도 충분할 여자 주인공의 변덕과 모순적인 태도의 변화를 두 명의 다른 배우가 연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이 여인이 보이는 모든 태도는 오로지 남자의 의식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변덕, 모순적인 태도는 단지 남자가 느끼는 것일 뿐이다.


감독은 그 남자의 내면을 포착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녀가 누군인지는 작가, 독자, 화자, 관객, 감독조차 알 수가 없다. 그녀는 변덕을 부리는 여자도 아니고, 모순적인, 혹은 다면적인 얼굴을 지닌 여자도 아니고, 그냥 우리가 모르는 여자일 뿐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모르는 여자에게 늘 집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욕망이란 알 수 없는 대상에서 시작된다.


감독이 이 소설을 선택한 이유는 이 소설이 흔치 않게 남자의 의식 속에 자리한 여자, 남자가 의식하는 여자, 그러니까 모르는 여자에 대한 강렬한 욕망의 흐름을 아주 잘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와 욕망의 본질이 모두 움직임에 있다는 것, 움직이는 욕망을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남다른 일이 될 터이니. 그러나 이 위대한 영화예술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영화와 욕망의 또 다른 본질, ‘본다’라는 행위를 통해 계급성과 권력의지까지 드러내는 아주 이질적인 영화를 역사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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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뱃속
미셸 옹프레 지음, 이아름 옮김 / 불란서책방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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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뱃속>에서, 인간은 곧 그가 먹는 것이다. 삶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 최초의 미식 평론가 브리야 사바랭에 따르면 먹는 것으로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디오게네스, 루소, 칸트, 푸리에, 니체, 마리네티, 사르트르의 식생활과 취향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데카르트와 헤겔, 스피노자, 사드 등 여러 철학자의 식습관도 짤막하게 소개한다.


그렇다고 이 책이 철학자들의 숨겨진 면, 그들이 실제 무얼 먹었는지 등에 관심을 둔 가벼운 에세이는 아니다. 서구 철학의 주요한 철학자들의 철학과 삶의 태도가 일상에서 어떻게 관철되고 또 어떻게 엇나가는지 관찰한다. 음식에 대한 태도와 그들의 철학적 삶 사이의 조화와 부조화, 식생활과 관념,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실제적 삶 속에서의 철학의 지위를 다시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서구 철학사의 다양한 논쟁, ‘본질주의자’와 ‘실존주의자’, ‘쾌락주의자와 경건주의자’, ‘형이상학자와 과학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음식과 식생활의 취향을 통해 들려주기에 자연스레 서구 철학의 역사를 일별할 수 있다.


불과 문명에 대한 절대 거부 속에 고독하게 미식을 즐긴 잡식의 대가, 디오게네스는 자신의 식생활 취향과 삶을 완벽하게 일치시킨 인물이다. ‘인간에게 최초의 양식은 우유’라 주장한 루소는 기본적으로 채식 동물의 구강과 위장 구조를 갖고 태어난 인간이 문명의 발달을 통해 변화해 가는 과정을 짧지만 장대하게 보여준다. ‘인류의 구원은 무엇을 먹느냐에 달려 있다’고 설파한 니체는 정작 자신의 관념과 식생활을 조화시키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


어마어마한 술꾼이었던 칸트는 말년에야 조화를 되찾고, 푸리에는 음식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삼는다. 마리네티는 취향의 예술을 위해 음식에 대해 가능한 실험을 극단으로 밀고 간다. 최악의 인물은 사르트르, 그는 도대체 먹지도 씻지도 않는 인물로 그려지면서 언제나 몇몇 음식에 대한 거부와 혐오 속에서 인생을 공포로 떨었던 인물로 묘사된다.


행위와 사유의 분리가 불가능한 본질적 개념으로서의 삶을 현실 너머에서 사유하지 않고, 상황과 환경의 압박에도 순응하지 않는 삶,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살아보며 배운다. 그러나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뭔가 거창하고 거대한 일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일상적 삶의 경험이 바로 우리 삶의 영역이듯, 일상의 작은 행위들이야말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세계에 대해서도 진정한 정치적 행위가 되지 않을까.


<철학자의 뱃속>은 의심 많은 철학자가 선배 철학자들의 위장을 조사한 책이다. 구체적 일상을 철학의 주요한 화두로 삼는 이 철학자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로 가득한 형이상학적 성찰과 뱃속의 행복을 별개로 분리하지 않는다. 이 철학자는 바로 공격적인 성향의 논쟁가 미셸 옹프레. 반항적 기질로 논쟁을 통해 미디어를 능숙하게 다루는 그는 일상과 현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철학을 주장하며 마르크스, 프로이트, 사르트르, 푸코, 들뢰즈를 일종의 환상이자 사기꾼으로 격렬하게 비난한 바 있다. 반면 에피큐로스는 아버지로 니체나 푸르동은 스승으로 여긴다.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보다는 서민적인 푸르동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지식인들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노란 조끼] 운동에 그 누구보다 먼저 지지 의사를 밝힌 사람은 프랑스 서민 대중의 삶, 그 삶의 조건을 현실적으로 변화시키려 2002년에 프랑스 최초로 문을 연 [캉 시민 대학]의 설립자 옹프레였다. 일상에 밀접한 정치, 예술, 철학, 음악, 미식 등을 주제로 컨퍼런스를 열고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곳이다. 2006년엔 [미식 대학]의 문을 열면서 먹는 것에서 인간의 삶이 시작되고 끝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책 <철학자의 뱃속>은 그의 첫 책으로 1984년에 쓰였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던 베스트셀러였고 이 책을 통해 옹프레는 대중이 주목하는 철학자로서의 화려한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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