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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모호한 대상
피에르 루이스 지음, 김영신 옮김 / 불란서책방 / 2021년 5월
평점 :
자의식을 압도하거나 휘발시키는, 넘쳐나는 감각의 소유자 피에르 루이스. 그에게 여성은 단지 관능의 매개이자 피사체일 뿐이다. 여성에 대한끝없는 갈망을 언어와 이미지로 표현하고 대상을 느끼며 대상의 내부로 들어가 자신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러나 여성은 언제나 알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존재였으므로 그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시도가 된다. 감각과 피사체를 향한 강박은 더욱 강화되고, 그만큼 피사체, 대상에 집착하는 악순환으로 빠져들어 피에르 루이스는 결국 자신에게 무감해지고 자신을 폐쇄하고 말았다. 소설의 원제는 <la femme et le pantin>, 직역을 하면 <여인과 꼭두각시>쯤 된다.
피에르 루이스의 소설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흔히 벨 에포크라 불리던 시대의 부르주아 남성들의 내면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작가 자신의 내면이자 욕망이다.
부유하고 나이 든 남자가 우연히 만난 어린 여자에게 집착한다. 여자는 이 남자가 원하는 것을 훤히 꿰뚫고 있다. 어느 순간엔 적당히 받아주거나 사랑을 속삭이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 돈. 어느 순간엔 서슴없이 안면을 몰수하거나 종적을 감춘다. 남자가 집요하게 원하는 것은 절대 주지 않는다. 그럴수록 남자는 더욱 이 여자에게 집착하는 악순환으로 빠져든다. 변덕과 모순으로 가득한 이 여자는 악녀일까?
한편, 이 여자는 가난한 환경에서 어머니를 책임지고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강인한 여자인 동시에 주어진 삶을 최대한 즐기며 자신을 잃지 않는 여자이기도 하다. 여자는 단지 자신을 드러낼 뿐, 여자의 변덕, 모순, 변화무쌍한 얼굴은 그녀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소설의 화자인 남자의 의식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니까.
여자는 자신의 삶을 살뿐, 팜프파탈과는 거리가 멀다. 진짜 파탈한 건 대개 다 남자이고 이 소설에서도 남자는 상당히 바보스럽고 위협적이다. 세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당당한 부르주아 남성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낯선 여자, 뭘 해도 도저히 여자의 내면을 알 수도, 그녀의 몸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이 남자는 갈수록 피폐해지면서 욕망은 극에 달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을 떠올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남자는 무척 경험이 없는 남자다.)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이해불가의 영역인 타인의 내부를 향한 맹목적인 갈망과 집착. 이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거기엔 감정도 관계도 역사도 인간성도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아름다운 시대'가 만들어낸 무중력의 세계, 타인을 통해 자신의 내부를 밝히려는 강박.
루이 브뉘엘은 이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사에 남을 역작을 만들어냈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
그런데 이야기의 여주인공, 한 인물을 두 사람의 배우가 연기를 하도록 했다. 왜 두 명일까?원작 소설의 1인칭 시점은 남자 주인공에게 강력한 동조를 불러일으키고 남자 주인공이 느끼는 대로 무의식적으로 여성 인물을 대상화하고 판단하게 된다. 남자의 시선. 루이 브뉘엘은 바로 이 남자의 시선을 문제 삼았던 것은 아닐까.
편집을 통해서 소설보다 화자의 흔적을 잘 지워내는 영화의 관습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난해하다고 느낄 정도로 한 인물에 두 명의 배우를 기용했다. 한 명의 여배우가 연기해도 충분할 여자 주인공의 변덕과 모순적인 태도의 변화를 두 명의 다른 배우가 연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이 여인이 보이는 모든 태도는 오로지 남자의 의식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변덕, 모순적인 태도는 단지 남자가 느끼는 것일 뿐이다.
감독은 그 남자의 내면을 포착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녀가 누군인지는 작가, 독자, 화자, 관객, 감독조차 알 수가 없다. 그녀는 변덕을 부리는 여자도 아니고, 모순적인, 혹은 다면적인 얼굴을 지닌 여자도 아니고, 그냥 우리가 모르는 여자일 뿐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모르는 여자에게 늘 집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욕망이란 알 수 없는 대상에서 시작된다.
감독이 이 소설을 선택한 이유는 이 소설이 흔치 않게 남자의 의식 속에 자리한 여자, 남자가 의식하는 여자, 그러니까 모르는 여자에 대한 강렬한 욕망의 흐름을 아주 잘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와 욕망의 본질이 모두 움직임에 있다는 것, 움직이는 욕망을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남다른 일이 될 터이니. 그러나 이 위대한 영화예술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영화와 욕망의 또 다른 본질, ‘본다’라는 행위를 통해 계급성과 권력의지까지 드러내는 아주 이질적인 영화를 역사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