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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인류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는 이미 1970년대부터 멸종 단계에 접어들었다. 한국에선 최근에서야 여기저기서 제기되는 ‘기후위기’와 연관된 측면이 크다. 과학적으로 측정된 여러 지표들을 문제 삼으며 인류의 존립과 지구의 환경에 대해 얘기하는 것인데, 그 자체로 시급하고 위중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논의하는 걸 보면서 항상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인류는 왜 과학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확장으로 발생한 문제를 ‘과학’과 ‘자본’에 기대어 해결하려 드는가, 하는 점이다. 




왜 과학은 더 인류를 멸망케 하는가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온 데에 과학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18세기 이후 급진적으로 발전한 과학은 아주 짧은 시간에 인류의 생활 양태와 그로 인한 의식의 변화를 가능케 했다. 지금은 그 발전 단계의 시간적 폭이 갈수록 좁아지고, 빨라지고 있다. 한 세대를 거쳐야 할 문제가 두 세대 이상까지 아우르게 되면서 동시대 자체가 크게 분열하고 갈등하게 되는 요소로 작용하게도 되었다. 그런 점에서 세대나 계급, 경제적 부와 빈곤의 극단적 대치는 과학 발전의 속도에 못 미치는 인간 인식 또는 심리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따져볼 여지도 다분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산책하는 침략자>(2017)는 그것의 한 모델이 될 법한 영화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일본 내에서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독특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초창기 로망 포르노에서부터 호러, 멜로, 스릴러 등 기존 장르를 매개 삼아 자신만의 특출한 영화적 감각을 표출했는데, <산책하는 침략자>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좀 더 특이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신체강탈 외계인이라는 SF영화의 오랜 클리셰를 바탕으로 호러와 블랙코미디, 누아르와 로맨스를 자유자재로 버무린 솜씨가 가히 ‘장인’스럽다 할 만하다. 심각할 수 있는 주제를 경쾌하게, 자칫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을 장면을 심도 있게 우려내면서 130분을 충만하게 채운다.


영화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특유의 미스터리 스릴러 풍으로 시작한다. 어항 속의 금붕어가 나오고 돌연 어느 주택에서 토막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일가족 중 교복을 입은 소녀 하나만 피투성이가 되어 살아남는다. 외상은 없어 보인다. 소녀는 피칠갑을 한 채 어느 좁은 국도를 무심하게 걷는다. 자동차들이 소녀를 피하려다 서로 충돌한다. 소녀는 아랑곳 않는다. 재미있다는 듯 입가에 미소마저 가득하다. 그러면서 오프닝 타이틀이 뜬다. 이거 무슨 영화지? 싶은 호기심을 당기기에 아주 효과적인 연출이다.




괴이한 감독, 스스로 장르가 되다


다음 장면, 한 젊은 부부가 병원에서 진찰 중이다. 평범한 직장인인 신지(마츠다 류헤이)와 광고 디자이너인 나루미(나가사와 마사미) 부부다. 신지의 상태가 이상하다. 외출했다 돌아와선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버렸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뿐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아내도 못 알아본다. 나루미는 속이 끓어오른다. 시쳇말로 ‘진상’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일을 따내야 하는 나루미는 자신의 일을 감당하기도 벅찬 상태다. 신지는 걷는 법, 먹는 법뿐 아니라 언어부터 다시 배워야 할 상황. 나루미는 신지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말할 정도다. 관계의 붕괴를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편, 주간지 기자 사쿠라이(하세가와 히로키)는 토막 살인 사건 현장에 취재차 갔다가 이상한 소년을 만난다. 대뜸 반말부터 해대는 이 소년의 이름은 아마노(타카스기 마히로). 토막 살인 사건에서 살아남아 경찰에 인계된 소녀를 같이 찾으러 가자고 한다. 소녀의 이름은 타치바나 아키라(츠네마츠 유리), 오프닝 장면에서 피칠갑으로 길을 걷던 바로 그 아이다. 얼떨결에 아마노와 동행하게 된 사쿠라이는 아마노로부터 자신과 타치바나가 외계인이라는 얘길 듣는다. 요는, 평범한 지구인의 몸속에 잠입했다는 것. 목적은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서라나.


​누구라도 믿기 힘든 얘기다. 그럼에도 사쿠라이는 좋은 기삿거리라 여겨 아마노와 함께 타치바나를 찾게 되는데, 실로 믿을 수 없는 상황들이 계속 벌어지자 사쿠라이도 점점 아이들에게 동화되어 간다. 그건 신지 부부도 마찬가지. 신지는 어느 정도 지구인의 습성에 적응해 가면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기 시작한다. 신지 역시 나루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나, 믿기 힘든 건 나루미도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신지의 이상한 능력을 목격하면서 슬슬 신지의 편이 되어간다. 


아저씨! 나 외계인이에요


대략의 설정이 이러하다. 언뜻 보기에 초등학생에게나 먹힐 만한 만화 같은 얘기지만, 영화의 디테일들을 살피면 짐짓 숙고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다분하다. 외계인이 돼버린 인물들은 지구인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재점검을 유도한다. 가령, ‘나’와 ‘너’. ‘소유’와 ‘사랑’ 등 사람이 익히 알고 있어 재고조차 않는 단어들의 기본 의미와 맥락을 새삼 따져 묻는 식이다. 인류 문명의 발달이 언어가 발명된 이후, 급격하게 빨라졌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저 하나의 생명체였던 존재가 언어를 익히면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도 부언할 필요가 없다. 언어를 통해 인간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개념을 익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삶을 개진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언어의 규칙과 쓰임을 망각하게 된다면 인간은 어찌 되겠는가. 모든 게 혼란이자 최초로 되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랬을 때 세계는 외려 더 적나라하게 그 진상을 드러내게 될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 집단과 집단 사이의 반목, 다른 생명체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 등 모든 것이 언어를 기반하고 결국 또 다른 언어로 개념화되어 일정한 질서 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런데 그 질서가 과연 온당하고 자연의 원리에 부합하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인간의 질서에 의해 자연이 망가지고 지구가 병들어간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선 지구를 살려야 한다고 외치는 말들이, 그 절박한 사정과 의미에도 불구하고, 때로 공허하게 들리는 건 바로 그런 연유다. 


영화에서 외계인들은 지구 침략을 목적으로 지구인의 몸속에 잠입했다고 말한다. 왜 침략하려 하는지, 어떻게 지구인들을 몰살시키려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없다. 그러다 후반부에 이르면 지구를 침략하려는 자는 오히려 지구인들이고 인류를 몰살시키려 하는 자 역시 지구인들이라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오래전부터 영화에서 외계인이란 설정은 대기권 바깥을 상상하여 거꾸로 발명해 낸 ‘자신의 안의 다른 존재’였다. 영화 속 외계인이 원생대의 생물이나 유인원과 흡사한 외형을 갖게 된 것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관습적으로 디자인된 탓이다. 


외계인은 ‘내 안의 다른 존재’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바로 그러한 영화적 관습을 까발리고 뒤집어 버린다. 외계인은 지구인의 외형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다만,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보기에 지구의 위기와 병폐를 전체적으로 통찰해 낼 뿐이다. 산속에선 산이 안 보이고 물속에선 바다를 아우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자신조차 지구 안의 생물에 불과하면서도, 때로 더 지구에 해로울 수 있는 지식과 기술로 지구를 진단하고 해부하려 한다. 그러한 행위는 빙하가 녹는다고 북극에다가 냉방기를 틀어놓는 식의 자가당착이 될 위험도 다분하다. 사람은 과연 지구를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까.


섣불리 답을 내긴 어렵다. <산책하는 침략자> 역시 분명한 답은 내놓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의 막바지에 다다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는 건 그 어떤 언어적 해법보다 명확한 답이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영화 속 외계인들이 사람을 감화시키는 방식 같은 것. 상대의 이마에 검지를 대면 갑자기 상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며 순식간에 다른 인성으로 변한다. 영화가 실제로 그런 식으로 보는 이를 감화시키는 게 가히 놀랍고도 황망했다. 더 자세한 건 영화를 보면 안다. 힌트를 하나 주자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신지를 비롯한 외계인들이 아니고, 다름 아닌 나루미라 보는 게 타당하다. “온 인류를 사랑하는 건 쉽다. 그러나 자신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정말 어렵다.” 도스토옙스키가 한 말이다. 영화를 보고 새삼 떠올랐기에 첨언한다. (죽지 않는 시인의 영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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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스트라스버그, 스텔라 애들러, 해롤드 클러먼이라는 제자들을 배출하고 이제는 헐리우드의 일급 감독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리처드 볼레스라브스키(Richard Boleslavsky, 1889~1937)는 1937년 조앤 크로퍼드 주연의 영화를 촬영하던 도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스승은 잊혔지만 스승이 가져온 것은 살아남았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최초로 미국 땅에 전달한 이 책, 『연기6강(Acting: The First Six Lessons)』이 그것이다.


이 책은 1933년 뉴욕의 Theatre Arts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됐다. 교재가 아니었다. 볼레스라브스키가 1920년대 내내 Theatre Arts Monthly에 기고한 연기론 칼럼들을 엮은 것이었다. 형식은 대화였다. 교사인 저자와 열정적이지만 재능이 불분명한 젊은 여배우 사이의 여섯 번의 대화. 그 대화 안에 농축된 수업이 미국 연기 교육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군인이었다가 배우가 됐다가 연기 스승이 된 사람

본명은 볼레스와프 리샤르트 스르제드니츠키(Boleslaw Ryszard Srzednicki). 1889년 2월 4일, 당시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폴란드계 가톨릭 가문에서 태어났다. 트베르 기병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 장교의 길을 걷던 그는 연기에 이끌려 방향을 틀었다. 1906년, 모스크바 예술극장(Moscow Art Theatre, MAT)의 스쿨에 입학해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i)와 그의 조교 레오폴트 술레르지츠키(Leopold Sulerzhitsky) 아래에서 훈련을 받았다. 1909년, 스타니슬랍스키의 유명한 투르게네프 연출작 '시골에서의 한 달(A Month in the Country)'에서 주역 벨랴예프를 맡았다. 학생으로서 MAT 무대에서 주역을 받은 것은 드문 영예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볼레스라브스키는 러시아 제국군 기병 중위로 동부 전선에서 싸웠다. 1917년 10월혁명 이후 러시아를 떠났다. 이후 바르샤바, 프라하, 파리, 베를린을 거쳤다. 폴란드에서 영화 연출을 시작했고, 1921년에는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의 승리를 다룬 반다큐멘터리 영화 '비스와의 기적(Cud nad Wisla)'을 만들었다. 1922년에는 덴마크 감독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Carl Theodor Dreyer)의 독일 영화 'Die Gezeichneten'에 배우로 출연했다. 같은 해 9월, 뉴욕에 도착했다.


아메리칸 래버러토리 시어터 — 메소드의 발원지

1923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미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볼레스라브스키는 이 순회공연에 배우 겸 스타니슬랍스키의 조교로 합류했다. 공연 이후, 프린세스 시어터에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소개하는 강연 시리즈를 열었다. 이 강연이 미국 연극 후원자 미리엄과 허버트 스톡턴(Miriam and Herbert Stockton)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이들의 재정 지원으로 아메리칸 래버러토리 시어터(American Laboratory Theatre, 이하 '랩')가 설립됐다.


볼레스라브스키는 유학 동료 마리아 우스펜스카야(Maria Ouspenskaya)와 함께 랩을 이끌었다. 랩의 학생 명단은 후일 미국 연극사의 목차가 됐다.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 스텔라 애들러(Stella Adler), 해롤드 클러먼(Harold Clurman). 이 세 사람은 모두 랩의 동문으로, 1931년 그룹 시어터(Group Theatre)를 창설했다. 그룹 시어터는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미국 연기에 최초로 체계적으로 적용한 앙상블 단체였다. 스트라스버그는 훗날 이 시스템을 '메서드(The Method)'로 발전시켜 액터스 스튜디오(Actors Studio)에서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 더스틴 호프먼 세대를 훈련했다.


​랩은 1930년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발성 영화의 등장으로 할리우드에서 극작가와 연출가 수요가 급증했고, 볼레슬라프스키는 영화 연출 계약을 받아 뉴욕을 떠났다. 1930년 컬럼비아 픽처스를 시작으로 MGM, 20세기 폭스, RKO 등 주요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1932년 'Rasputin and the Empress'는 배리모어 3남매(에텔, 존, 라이어널)가 함께 출연한 유일한 영화로, 당시 화제를 모았다. 이후 'The Painted Veil'(1934, 그레타 가르보), 'Les Miserables'(1935, 프레드릭 마치와 찰스 로튼), 'Theodora Goes Wild'(1936, 아이린 던)를 연출했다.


여섯 번의 대화, 하나의 철학

『연기6강』은 교사인 저자(I)와 젊은 여배우 '크리처(The Creature)' 사이의 대화 여섯 편으로 이루어진다. 수업의 제목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1. 집중(Concentration), 2. 감정의 기억(Memory of Emotion), 3. 극적 행동(Dramatic Action), 4. 성격화(Characterization), 5. 관찰(Observation), 6. 리듬(Rhythm).


여섯 항목은 독립된 기술이 아니다. 하나의 신념에서 파생된 여섯 갈래다. 그 신념을 볼레슬라프스키는 이렇게 요약했다. "연기는 예술을 통해 탄생하는 인간 영혼의 삶이다(Acting is the life of the human soul receiving its birth through art)." 기술보다 내면이 먼저다. 테크닉 이전에 진실이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이 여섯 수업 전체를 관통한다.


첫 번째 수업 '집중'에서 볼레스라브스키는 집중을 "영혼에 대한 정신적 집중"으로 규정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오직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야 감지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능력. 두 번째 수업 '감정의 기억'은 이 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챕터다. 리 스트라스버그가 메서드를 발전시키는 데 직접적인 출발점이 된 개념이 여기 있다. 배우는 과거의 감정 경험을 저장하고, 필요할 때 정확하게 불러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무대 위에서 없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 실제로 경험했던 감정의 기억을 재활성화한다는 원리다.


세 번째 수업 '극적 행동'은 내면 충동이 어떻게 무대 위의 행동으로 전환되는지를 다루고, 네 번째 '성격화'는 캐릭터를 실제 삶의 역사를 가진 인물로 구축하는 방법을 다룬다. 다섯 번째 '관찰'은 볼레스라브스키가 삶을 연구하는 방식 자체를 요구한다. 배우는 언제나 세상을 관찰하는 눈을 열어두어야 한다. 마지막 '리듬'은 한 공연 안의 감정적 흐름과 긴장의 파동을 다룬다.


​대화 형식이 가르치는 것

이 책의 형식 자체가 내용과 맞닿아 있다. 교사는 크리처에게 직접 답을 주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고, 연습을 지시하고, 크리처가 스스로 경험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도록 이끈다. 볼레스라브스키가 스타니슬랍스키에게 배운 방식 그대로다. 배우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감각으로 습득한다.


Goodreads의 독자 평들이 이 지점에서 일관되게 갈린다. 대화 형식이 "이론을 살아 있게 만든다"고 평가하는 쪽이 있고, "교사가 크리처에게 지나치게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답한다"고 불편함을 표하는 쪽이 있다. 이 분열 자체가 볼레스라브스키가 의도한 방식이다. 연기를 가르치는 책이 독자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Powell's Books의 소개 문구는 이 책의 성격을 정확하게 요약한다. "집중, 감정의 기억, 극적 행동, 성격화, 관찰, 리듬에 관한 여섯 편의 미니어처 드라마들. 이것들은 모든 배우 앞에 놓인 도전을 증류해낸다." 수업이 아니라 드라마라고 부른 것은 정확하다. 읽는 동안 독자도 크리처와 함께 교사의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 책은 1933년 이후 90년 넘게 절판된 적이 없다. Theatre Arts 출판사에서 출간된 뒤, Taylor & Francis 등 여러 출판사를 통해 계속 찍혔다. 현재는 Theatre Arts Book 시리즈 판본이 가장 널리 유통된다. 2013년에는 초판 원본 책의 형태, 색상, 활자, 심지어 종이 질감까지 초판 발행 당시의 모습을 물리적으로 완전히 똑같이 재현한 복제본도 나왔다. 그리고 2024년 드디어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Goodreads 리뷰의 공통 평가는 "연기에 관심이 없어도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이다. 집중, 감정 기억, 관찰이라는 주제가 연기 기술에 국한되지 않고 삶의 태도 자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몇 시간 만에 읽혔는데, 읽는 내내 '나 자신의 이야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독자 반응이 반복된다.


한편 학술적 평가는 좀 더 복잡하다. 스타니슬랍스키 연구자들은 볼레스라브스키가 스타니슬랍스키의 초기 개념, 특히 감정 기억(정서 기억, affective memory)에 특별히 큰 비중을 뒀다는 점을 지적한다. 스타니슬랍스키 자신은 이후 신체 행동 방법(Method of Physical Actions)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초기의 감정 기억 중심 접근을 일부 수정했다. 스트라스버그는 볼레슬라프스키의 감정 기억 개념을 발전시켰지만, 스타니슬랍스키의 후기 수정을 사실상 무시한 채 '메소드'를 구축했다. 이 계보상의 분기점에서 볼레슬라프스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은 셈이다.


마흔여덟 살의 죽음, 그리고 남은 것

1937년 1월 17일, 조앤 크로퍼드와 윌리엄 파월 주연의 'The Last of Mrs. Cheyney'를 촬영하던 중 볼레스라브스키는 심장마비로 숨졌다. 마흔일곱 살이었다. 영화는 조지 피츠모리스와 도로시 에이즈너가 마무리했다. 그의 아들 얀은 당시 생후 18개월이었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7021번지에 별이 새겨져 있다.


볼레스라브스키는 생전에 세 권의 책을 남겼다. 1932년 자전적 1차대전 회고록 'Way of the Lancer'와 'Lances Down'(모두 헬렌 우드워드와 공저), 그리고 1933년 『연기6강』. 소설가 휴 월폴(Hugh Walpole)은 1937년 소설 'John Cornelius'를 볼레슬라프스키를 추모하며 헌정했다.


그가 없었다면 스트라스버그는 어떻게 됐을까. 그 질문에 스트라스버그 본인은 이렇게 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거기서(아메리칸 래버러토리 시어터에서) 우스펜스카야와 볼레스라브스키에게 나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원칙들을 배웠다." 메서드가 말론 브란도를 만들었고, 그것이 현대 영화 연기의 기준이 됐다. 그 연쇄의 최초 연결고리가 1933년에 출간된 이 얇은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방법

『연기6강』은 연기를 배우는 사람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볼레스라브스키가 '크리처'에게 가르치는 것들 — 집중, 관찰, 감정의 저장과 재생, 리듬 — 은 어떤 창조적 작업에도 적용 가능한 원칙들이다.

분량은 짧다. 빠르면 하루에 읽힌다. 그러나 각 챕터를 읽은 뒤 볼레슬라프스키가 크리처에게 제시한 연습들을 실제로 시도해보지 않으면 텍스트의 절반만 접한 셈이다.

볼레스라브스키의 이 책은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진입로로 읽어도 좋다.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논쟁적이며, 그래서 가장 중요한 진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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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을 모방하기 보다는 자연과 일치하기를 원한다."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그가 남긴 말 중 하나다.브라크에게 회화는 자연을 복제하는 일이 아니었다. 자연과 화음을 남기는 일이었다. 그 차이가 그의 생애 전체를 관통한다.

화가의 단상집이라는 장르는 낯설었다. 파울 클레(Paul Klee),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같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 이론을 글로 남겼다. 브라크는 이론을 쓴 것이 아니라 단상을 남겼다. 다른 의도다.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진지하게, 보이는 진실 하나하나를 고정하려는 의지였다. 그 35년의 직무가 『낮과 밤(Le jour et la nuit)』이다.


1882년 5월 13일, 브라크는 파리 근교 아르장퇴유(Argenteuil)에서 태어났다. 르아브르에서 성장했다. 조부와 부친이 건물 도장업을 하면서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한 집안이었다. 브라크는 르아브르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오통 프리에즈(Othon Friesz), 라울 뒤피(Raoul Dufy)와 함께 미술을 배웠다. 이 시절의 훈련, 즉 장인의 눈으로 타일을 다루고 표면을 가공하는 습력이 후일 그의 회화에 직접 반영됐다는 평이 프랑스 미술계에서 공통적 견해다.


1900년 파리로 이주한 브라크는 아카데미 앙베르(Academie Humbert)에서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프랑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를 만났다. 1906년 에스타크(L'Estaque) 해안 풍경화로 야수파(Fauve) 스타일에 진입했다가, 1907년이 그의 회화 인생의 분기점이 된다. 엑스(Aix)에서 폴 세잔(Paul Cezanne)의 회고전을 보고,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소개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아틀리에에서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을 목격했다. 이 조우가 브라크의 경로를 완전히 바꿨다.



큐비즘의 탄생 — 피카소와의 시절

1907년 11월,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피카소를 만났다. 브라크는 에스타크에서 시도한 풍경화 연작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화에 반응했다. 1908년 가을, 드니엘-앙리 카날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 갤러리에서 브라크의 첫 전시가 열렸다. 비평가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은 브라크의 건물 피사체들을 "작은 큐브들(petits cubes)의 집합"이라 평했다. 큐비즘(Cubisme)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비롯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스스로 자신들의 협업을 "로프로 연결된 등반자들(La Cordee)"에 비유했다. 1908년부터 1914년까지, 두 사람은 여름을 세레(Ceret)와 소르그(Sorgues)에서 함께 작업하며 큐비즘 분석기를 전개했다. 1912년 브라크는 파피에 콜레(papier colle), 즉 신문지나 인쇄 종이를 화면에 직접 붙이는 기법을 최초로 도입했다. 이것이 현대 콜라주 기법의 기원으로 평가받는다. 피카소는 훗날 편지에서 브라크를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한 여성(la femme qui m'a le plus aime)"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두 사람의 관계의 깊이를 전하는 동시에, 큐비즘 혁명에서 브라크의 기여가 피카소에 비해 과소평가되는 경향에 대한 미묘한 인정이기도 했다.



일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전쟁 — 두개골 천공 수술과 35년의 준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브라크는 보병 제224연대로 징집됐다. 피카소는 아비뇽 역에서 군복 차림의 브라크를 전송했다. 두 사람이 수년간 이어온 대화는 그 순간 끊겼다.

1915년 5월 11일, 브라크는 뇌빌-생-바스트(Neuville-Saint-Vaast) 전투에서 두부에 중상을 입었다. 전사한 것으로 여겨져 방치됐다가 다음 날 들것병들에게 발견됐다. 두개골 천공 수술(trepanation)을 받고 이틀간의 혼수상태 끝에 의식을 되찾았다. 회복에 1917년까지 걸렸다.


바로 이 1917년,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와 함께 평상의 단상들을 정리해 문학 잡지 『노르-쉬드(Nord-Sud)』 제10호에 발표했다. 제목은 「회화에 대한 사상과 성찰(Pensees et reflexions sur la peinture)」. 이 글이 이후 35년간 작성된 단상들의 출발점이 된다. 전쟁이 붓을 빼앗았지만, 성찰은 계속됐다.


전후 브라크의 회화는 큰 변화를 거쳤다. 큐비즘의 납작한 기하학에서 점차 곡선으로 돌아오고, 단일한 색채로 화면을 통일하는 대상을 고집했다. 인물, 정물, 비둘기. 같은 대상을 수년간 반복해 그렸다. 브라크에게 싫증은 없었다. 다음 단계는 언제나 안에서 발견해야 했다.


그의 단상들도 같은 방식으로 성장했다. 1917년부터 단상을 쓰기 시작한 브라크는 1952년까지 35년 동안 이 작업을 이어갔다. 하루에 하나를 쓰기도 하고, 몇 달에 하나를 쓰기도 했다.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 단상들은 노트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 임리에서 나온 것을 다듬고 완성하는 방식으로 겹쳐졌다.

주제도 회화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보이는 것에서 숨겨진 것으로, 지식에서 감성으로, 단순에서 복잡으로. 브라크의 단상은 회화의 주제와 거의 하나로 이어진다. 색, 구도, 관점, 언어, 자연, 시간, 남기는 것과 사라지는 것. 판단하지 않는다. 단정짓지 않는다. 하나의 주제를 여러 개의 신중한 문장으로 접근한다.


『낮과 밤』 

브라크는 정식 논문이나 에세이를 쓰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짤막한 노트에 문장을 적었다. 대부분은 한 단락 안에 담겼다. 그 중 일부를 선별해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를 통해 있는 그대로 내놓았다. 브라크 스스로 고른 제목 '낮과 밤(le jour et la nuit)'에 주제 정의가 담겨 있다. 내려앉는 것과 떠오르는 것, 보이는 것과 숨은 것, 시작과 끝, 있는 것과 없는 것.​


쪽 수는 초판 기준 56쪽이다. 형태는 인-12판(In-12)으로 손안에 들어오는 소형 판본이다. 작가의 드로잉 2점이 수록되어 있다. 1952년 8월 4일 인쇄를 마쳐 발행됐다. 라피마-나바르(Lafuma-Navarre) 순지 100부 한정판(tirage de tete)과 일반지 판 두 종으로 발행됐다. 현재도 갈리마르 파리 서점 공식 판매 목록에 올라 있다.


브라크의 아포리즘은 두 가지 구조를 가진다. 

첫째, 개념들을 반의의 쌍으로 충돌시킨다. 

"언제나 두 가지 생각, 하나를 무너뜨릴 또 하나의 생각을 가져야 한다.(Il faut toujours avoir deux idees, l'une pour detruire l'autre.)" 

둘째, 직접적인 관찰로 곧장 들어간다.

 "감정은 덧붙여지거나 모방할 수 없다. 감정은 배아고 작품은 부화(l'eclosion)다."


프랑스 아포리즘 전문 매체 Aphorismundi의 평가다. "브라크는 17세기 모랄리스트들의 진정한 계승자로, 리듬감 있고 종종 이분법적인 아포리즘 안에서 인간과 세계 표상에 연관된 복잡한 개념들을 정의하려 한다." 이 평은 브라크의 글쓰기가 단순한 화가의 메모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짚는다.


​루브르로 — 생애 말년의 영예

​1937년 카네기 국제 미술전 카네기상(Prix Carnegie), 194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1952년에는 루브르 박물관 관장 조르주 살레(Georges Salles)의 의뢰로 루브르 앙리 2세 홀(salle Henri-II) 천장에 새(Oiseaux) 테마의 장식화 작업을 맡았다. 1953년 제막식이 열렸다. 피카소는 자신이 선택되지 않은 것에 불쾌해하며 브라크가 자신의 비둘기(colombes)를 베꼈다고 비난했다. 브라크는 피카소에게 답하지 않았다.


1961년, 루브르에서 회고전 「브라크의 아틀리에(L'Atelier de Braque)」가 열렸다. 살아 있는 화가로서 루브르에서 개인전을 연 최초의 예술가였다. 사망 2년 전의 일이었다. 1963년 8월 31일, 브라크는 파리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였다. 그가 살던 파리 거리명은 훗날 조르주-브라크(rue Georges-Braque)가로 바뀌었다.


1963년 9월 3일, 루브르 콜로나드 앞에서 국장이 열렸다.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문화부 장관이 추도사를 낭독했다. 말로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의 어떤 국가도 자국에서 세상을 떠난 화가에게 이러한 성격의 헌사를 바친 적이 없다. 프랑스의 명예에 빅토르 위고라는 이름이 있다. 이제 브라크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프랑스인들에게 말해야 한다. 한 국가의 명예는 무엇보다 그 국가가 세계에 무엇을 주는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말로의 추도사 전문은 현재 malraux.org 공식 아카이브에서 열람할 수 있다.


​화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

​『낮과 밤』은 순서대로 읽히지 않는다. 어떤 페이지를 열어도 된다. 다음 페이지의 단상이 앞의 페이지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브라크 스스로도 선형적으로 이어지도록 쓴 텍스트가 아니다. 단상들은 여러 주제를 오가면서 반복하고, 서로 충돌하고, 때로는 돌고 돌아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브라크에게는 천천히 읽는 독자가 더 잘 맞는다. 하나의 단락을 읽고 잠시 멈추는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 5단락씩 읽어도 되고, 집어들고 필요할 때 열어봐도 된다. 추상적인 것도 많지만, 직접적인 것이 더 많다. 브라크는 주제를 열어 놓고 미끄러져 들어가는 일을 독자에게 넘기는 편이다.


단상은 스케치보다 짧다. 그 압축이 브라크만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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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영화를 본다는 것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시적인 영화 에세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영화적인 시집이 될 것이라는 소개 문구가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정확하게 압축한다. 강정은 1992년 등단 이래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해온 시인이다. 록밴드 '엘리펀트 슬리브'의 보컬이기도 하고, 연극 무대까지 넘나든 이 경계 없는 예술가가 이번엔 영화 에세이를 냈다. 244쪽의 이 책은, 영화를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시인이자 음악가인 저자는, 세상의 빛보다 어둠에서 더 선명하게 타오르는 영화들의 초상을 에세이로 써 내려간다. 영화가 남긴 진동과 침묵을 붙잡는 저자에게 영화의 모든 장면은 몸으로 기록된다. 꿈처럼, 혹은 고백처럼. 그에게 영화란 체험에 가깝다. 


스크린 앞에 앉아 무언가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잔상과 진동을 언어로 옮겨 적은 것이 이 책이다. 영화 '비평'도 아니고, 영화 '소개'도 아니다. 시인이 영화를 통과한 흔적, 그 체험의 기록이다. 강정의 글은 영화 앞에서 분석자의 자리가 아니라 목격자의 자리에 선다. 그 차이가 이 책을 여타의 영화 에세이와 다르게 만드는 출발점이다.


이 책이 다루는 영화들의 목록을 보면 강정이 어디를 향하는지가 단번에 선명해진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을 시작으로, 줄랍스키의 〈포제션〉, 레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를 비롯해 유럽과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들 그리고 한국 영화 〈발레리나〉를 거쳐 마침내 〈조커〉에 이르기까지, 그가 선택한 영화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어둠의 이야기들이다. 


〈포제션〉의 안제이 줄랍스키, 〈홀리 모터스〉의 레오 카락스, 〈거울〉의 타르코프스키. 이들은 모두 불편하고 낯설고 보기 쉽지 않은 영화를 만든 감독들이다. 강정은 이 어둡고 거친 영화들을 의도적으로 고른다. 그 의도는 단순한 취향의 표명이 아니다.


"세상에도,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속에도 '어둠'은 항상 존재한다는 근본 사실을 상기"하며 그 어둠 속에서 인간 존재의 상처, 욕망, 구원, 사랑을 시인의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간다. 여기서 '어둠'은 단순히 암울하거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어둠을 먹고 사는 물질적 환영"으로 정의하는 저자에게 '어둠'은 단순한 물리적 암흑을 넘어서 현실이 감추고 있는 것, 진짜 현실을 숨기고 있는 베일이며, 영화는 그 어둠 속에 빛을 비추어 인간의 얼굴을 다시 본다. 


어둠이 없으면 영화도 없다. 스크린의 빛은 언제나 어둠을 배경으로만 존재한다. 극장의 암전, 필름의 공백,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어둠 — 강정은 이 물리적 사실을 영화 미학의 핵심으로 끌어올린다. 빛을 말하기 위해 어둠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논리다.


책에 수록된 영화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킬러, 조커, 괴물, 혁명가, 정신병자다. 이들은 사회의 정상 테두리 밖에 있거나, 그 테두리 자체의 모순을 폭로한다. 강정이 이 인물들에게 매혹되는 것은,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가장 정면으로, 가장 적나라하게 살아내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정상성 바깥에 놓인 인물들을 통해, 정상성 안에 갇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거울 앞에 선 관객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강렬한 이미지는 '거울'이다. 강정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에서 길어올린 이 이미지는 책 전체를 지배하는 메타포가 된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을 보고 저자는 "거울은 고요한 평면이나 그 안엔 온갖 시간과 사물과 사람의 잔영들로 요란스럽다. '사랑'을 비추면 '증오'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슬픔'을 던지면 '욕망'이 반사되기도 한다"고 기록했다. 저자는 영화 자체를 거울로 본다.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 내면의 가장 어두운 부분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영화를 거울로 보는 시선은, 영화를 단순한 오락이나 예술 감상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락으로서의 영화 앞에서 관객은 편안하게 수용하는 쪽에 선다. 거울로서의 영화 앞에서 관객은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 거울 앞에 서면 나를 보게 된다. 강정에게 영화 보기는 그래서 하나의 자기 대면이다. 독자는 어느 순간, 스크린이 아니라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강정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영화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이 책이 단순한 영화 감상문과 구별되는 가장 핵심적인 지점이다. 영화에 대한 글이지만, 결국 그것은 인간에 대한 글이고, 더 좁혀 말하면 나에 대한 글이다.


조커라는 핵심, 그리고 질문


이 책의 심장부는 〈조커〉와 〈조커: 폴리 아 되〉를 다룬 두 편의 글이다. 강정은 이 두 편에서 책 전체의 논지를 가장 날카롭게 벼린다.

조커는 "사회적 인습 바깥으로 배제되어야 할 존재"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사회적 인습과 규율 및 편견 등을 뒤엎는 예상치 못한 대중적 역린"이다. 

조커는 '나쁜 놈'이 아니다. 혹은 단순히 나쁜 놈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자, 우리 사회가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이다. 강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관객을 향해 직접 질문을 겨냥한다.

"거기, 판결의 총신을 겨누며 슬며시 웃거나 화내고 있는 자, 당신 또한 조커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이것은 도발이 아니라 진지한 물음이다. 우리가 스크린 위의 조커를 보며 공감하거나 두려워한다면, 그 공감과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외부의 무언가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내부의 무언가를 건드린 반응이 아닌가.


일관된 주제를 반복하면서 명확해지는 것은 "영화 자체가 조커"라는 저자의 깨우침이다. 영화는 관객을 유혹하고, 허구로 현실을 뒤바꾸며, 스스로 가면을 쓴다.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 자체를 지배한다. 

영화가 조커라는 명제는 이 책에서 가장 도발적이고 동시에 가장 설득력 있는 통찰이다. 영화는 우리를 웃기고 울리고 흥분시키면서, 동시에 현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조금씩 재구성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의해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강정은 이 역설을 시인의 언어로 날카롭게 포착한다.

더 나아가, 영화와 현실 사이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것은 무대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 스크린 안과 밖의 경계가 흐릿해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 질문이 이 책의 마지막 울림이다. 


음악과 자본주의, 이기 팝과 자무시


이 책은 순수한 영화 미학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강정이 뮤지션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이 책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펑크록 대부 이기 팝의 삶과 음악을 다룬 짐 자무시 다큐멘터리 〈김미 데인저〉를 보며 자본주의 사회의 절박한 문제들을 새로운 각으로 예리하게 설파하기도 한다.


이기 팝은 주류 바깥에서 스스로를 태워온 예술가다. 자무시는 그런 이기 팝의 삶을 카메라로 응시한 감독이다. 강정이 이 교차점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읽는 방식은, 영화와 음악과 사회가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얽히는 강정 특유의 방법론을 보여준다. 어느 챕터에서도 강정의 글은 영화 이야기로 시작해 그보다 훨씬 넓은 곳에서 끝난다.


'죽지 않는 시인'의 의미


책 제목 『죽지 않는 시인의 영화』는 여러 겹으로 읽힌다. 영화 속 인물들은 죽는다. 조커도, 〈포제션〉의 인물들도, 〈발레리나〉의 킬러도. 그러나 그들이 필름 위에 새겨진 이미지는 죽지 않는다. 상영이 끝나도, 극장 불이 켜져도, 그 잔상은 관객의 몸 어딘가에 남아 계속 진동한다.


"영화는 망상의 거울이고, 그 거울은 결국 나 자신이다"라고 정의하는 필자는 스크린 위 죽지 않는 영혼들의 이야기 속에서 '죽지 않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책 곳곳에 투시하고 있다. khan

죽지 않는 시인은 강정 자신이기도 하다. 글이 살아 있는 한, 시인도 살아 있다. 강정은 영화를 씀으로써 자신을 쓴다. 이 책은 영화 에세이의 형식을 빌린 시인의 자화상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 존재의 어둠을 들여다보고,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을 언어로 붙잡으려는 한 시인의 치열한 작업이다.


 『죽지 않는 시인의 영화』에는 영화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광과 여운, 그 흔적이 한 편의 시처럼 놓여있다. 영화를 사랑하되 그 어두운 면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싶은 독자, 시인의 언어로 영화를 읽는 경험을 원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오래 남는 책이 될 것이다. 읽고 나면 영화관 불이 꺼지는 순간, 이제 조금 다른 무언가를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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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의 일기장


봉준호 감독은 이 책을 추천하며 '시네필의 일기장'이라고 불렀다. 이 표현이 책을 정확하게 해석해준다. 한상훈은 30여 년간 극장을 제집 드나들듯 다닌 인물이다. 영화계 종사자도 아니고, 비평으로 밥을 먹는 사람도 아니다. 그냥 영화가 좋아서, 극장이 없으면 살 수 없어서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에게 극장은 직장이 아니라 집이었다. 살아가는 이유였고, 버텨내는 방식이었다. 이 책은 그 30년의 흔적이다. 


책은 네 개의 파트로 구성된다. 1부 「극장전」, 2부 「미치광이 같은 사랑」, 3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4부 「어느 가족」이 그것이다. 각 파트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화와 저자의 삶이 맞닿는 지점을 기록한다. 학술적 분석도 아니고, 세련된 영화 에세이도 아니다. 저자는 이를 일기 같은 문체로 풀어내며 독자에게 "왜 우리는 영화를 보는가, 영화의 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1부 「극장전」 극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룬다.


1부는 말 그대로 극장을 무대로 한 사건과 감정의 기록이다. 제목들이 이미 흥미롭다. '어느 걸작주의자의 강박증', '눈물이 주룩주룩 나, 스코티 그리고 매들린', '영화광은 어떻게 뱀파이어가 되는가'. 이 소제목들에서 이미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난다. 걸작에 집착하고, 히치콕의 〈현기증〉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영화에 피를 빨린다.


1부에는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감독들이 대거 등장한다. 홍상수, 나루세 미키오, 존 포드. 특히 인상적인 것은 홍상수 감독과의 우연한 조우, 류이치 사카모토를 찾아서, 페드로 코스타 감독의 조언, 박찬욱 감독과의 인연 같은 챕터들이다. 세계적인 감독들과 우연히, 혹은 필연처럼 마주치는 이 일화들은 저자가 극장을 얼마나 집요하게 다녔는지를 방증한다. 극장에 항상 있었으니까 그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이 에피소드들의 진짜 의미다. 


'할머니와 〈미나리〉' 챕터도 주목할 만하다. 영화를 가족과 함께 보는 경험이 어떻게 전혀 다른 감각을 만들어내는지를, 저자 특유의 솔직한 문체로 담아낸다. 이 1부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강박'에 가깝다. 좋은 영화를 봐야 한다는 강박, 좋아하는 감독을 한 번이라도 봐야 한다는 강박. 그가 남긴 글에는 멋진 미사여구가 없다. 때로는 너무 솔직하고, 때로는 벅차게 무너진다. 그 솔직함이 오히려 이 파트를 읽히게 만든다.


2부 「미치광이 같은 사랑」 영화와 자신을 동일시하다


2부는 저자가 가장 깊이 사랑하는 영화들에 대한 글을 모았다. 특히 저자가 자신과 동일시하다시피 하는 히치콕의 〈현기증〉과 주인공 '스코티', 그리고 저자의 인생 영화인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저자의 삶으로 분석된다. 


〈현기증〉을 다룬 챕터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영원히 헤매다'는 이 책에서 가장 강렬한 글 중 하나다. 저자는 히치콕의 주인공 스코티가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그 환상을 쫓는 이야기를 자신의 삶과 겹쳐 읽는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경험, 스크린 속 인물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 이것이 저자에게 영화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핵심 장면이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다룬 '간절한 기도'는 또 다른 결이다. 핵전쟁의 공포 앞에서 한 남자가 신과 거래를 하는 이 영화를, 저자는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 절망과 연결 짓는다. 영화가 어떻게 삶의 어떤 감각을 대신 표현해주는지, 그 체험이 얼마나 강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글이다.

나루세 미키오를 다룬 '흐르는 강물처럼',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를 다룬 '진실과 마주하는 법', 후侯孝賢(허우 샤오시엔)의 〈안녕, 용문객잔〉을 다룬 '극장의 유령', 그리고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기생충〉까지를 아우르는 '내 기억 속의 영화 음악들'까지 이어지는 2부는, 저자의 시네필리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보여준다. 일본 고전 영화의 정서, 타이완 뉴웨이브의 공간감, 러시아 영화의 영성, 헐리우드의 자기고백 — 이 모든 것을 저자는 자신의 삶으로 흡수해 다시 언어로 내놓는다. 


3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떠난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3부는 추모의 글들이다. 근래 세상을 떠난 배우들과 감독을 위한 추모의 글로 채웠다. 알랭 들롱, 지나 롤랜즈 등 기라성 같은 배우와 오시마 나기사, 데이빗 린치 같은 독보적인 감독들을 위한 존경과 감사를 담았다. 


오시마 나기사를 추모하는 '영원히 젊은 영화를 만든 거장', 장 폴 벨몽도를 기리는 '내 기억 속에 〈네 멋대로 해라〉로 박제된 배우', 엔니오 모리꼬네에게 바치는 '포에버 시네마 천국', 존 카사베츠의 〈오프닝 나이트〉와 함께 지나 롤랜즈를 추모하는 글, 알랭 들롱을 향한 '그는 시네마였다', 그리고 데이빗 린치를 추모하는 '〈스트레이트 스토리〉, 나 그리고 어머니'까지, 추모의 대상은 다양하지만 글의 온도는 한결같다. 


이 챕터들에서 주목할 것은 추모와 더불어 저자의 삶을 꺼낸다는 점이다. 데이빗 린치를 추모하는 글에 어머니가 등장하고, 장 폴 벨몽도에 대한 글에 저자 자신의 젊은 시절이 겹쳐진다. 추모는 결국 기억이고, 기억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다. 이 파트를 통해 저자는 영화와 삶이 얼마나 촘촘하게 얽혀 있는지를, 간접적이지만 가장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4부 「어느 가족」 책의 심장

가장 밀도 있고 저자의 진솔함이 묻어나는 4부는, 영화를 주제로 삼은 글 중에서 독보적이라 할 만큼 독자의 심금을 울릴 만한 글을 모았다. 이 파트가 이 책의 진짜 핵심이다. 

영화와 저자의 삶이 가족사 안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어왔는지, 평생 소원했던 아버지와의 첫 화해,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순간마저 영화로 기록되는 놀라운 광경, 그리운 어머니와의 애틋한 사연도 영화와 함께 펼쳐진다. 


'아버지와의 첫 포옹' — 이 챕터 제목만으로도 이미 무언가가 밀려온다. 평생 어색하고 먼 관계였던 아버지와,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 처음으로 무언가 닿는 순간을 저자는 담담하게 기록한다.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어머니의 16mm 필름'은 떠나보냄의 슬픔을 필름과 이미지의 언어로 풀어낸다.

영화 〈벌새〉를 통해 청년기를 다시 바라본 이야기도 실렸다. '02호에 살았던 내가 1002호에 살았던 은희에게'라는 긴 제목의 이 챕터에서, 저자는 〈벌새〉의 주인공 은희를 통해 자신의 젊은 시절을 소환한다. 영화가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게 해주는 그 경험 — 이것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감각이다. 


4부에서 이 책은 단순한 영화 에세이를 넘어선다. 영화가 어떻게 한 인간의 가장 내밀한 삶 속으로 들어와 상처를 보여주고, 화해를 이끌고, 이별을 견디게 해주는지를 — 이론이 아니라 실제 경험으로 — 써내려간다.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이 책은 '시네필의 일기장'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이 적잖게 담겨 있다. 그것이 이 책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강점이다. 영화에 대한 보편적인 통찰을 기대한다면 다소 좁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영화와 맺어온 30년의 관계를, 이렇게 날것 그대로 담아낸 책은 흔치 않다. 


그는 스크린 속 땀과 고통을 자신의 삶에 포개어 읽었고, 그렇게 체화된 고통과 숨결은 그의 문장 속에 차분히 각인되어 있다. "영화가 삶을 바꿨다"는 익숙한 말보다, "삶이 끝까지 영화를 놓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더 어울리는 사람. 


시네필이라면 자신을 보는 것 같아 불편할 만큼 솔직한 책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정도의 독자라면, 한 인간의 사랑이 이렇게까지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책이다. 어느 쪽이든, 읽고 나면 극장에 가고 싶어진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제 역할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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