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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유해한 남자]는 화가 펠릭스 발로통의 소설이다. 40대에 쓴 소설이고 출간은 사후에 이루어졌다. 화가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엿볼 수 있지만 엄연히 소설이다. 자크 베르디에라는 젊은 미술 평론가의 어린 시절과 20대에 일어난 몇 가지의 주요한 사건들을 담고 있다. 모두 자크 베르디에 주변인들의 죽음과 관련된다


친구의 뒤를 걷다 등 뒤로 지는 태양의 긴 그림자가 친구를 덮치자, 놀란 친구가 발을 헛딛고 난간 아래로 추락한다. 위층에 세든 마음씨 좋은 아저씨에게 편지를 전하며 그를 놀래키려고 뒤에서 그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자 날카로운 끌로 작업을 하던 아저씨가 그 소리에 놀라 끌이 손톱에 박혀 결국 죽음에 이른다. 젊은 미모의 모델이 화실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높은 의자에서 내려오며 베르디에의 손을 잡다가 놓쳐서 시뻘건 난로로 곤두박질치고 만다. 이와 같은 사고들이 잇따른다. 점점 침울한 외톨이가 되어가는 청년의 모습이 무척 안쓰러웠다


책 표지는 펠릭스 발로통의 자화상 클로즈 업인데, 움푹 팬 눈 밑의 그림자가 이 청년의 삶을 말해준다. 이 소설은 아름다운 문장이나 깊은 혜안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의도치 않은 사고 속에서 일찍이 삶의 어두운 면을 알아버린 소심한 남자의 치명적 방황이 있다. 그가 신의 저주를 받았는가? 그가 불운한 운명을 타고 태어났는가? 그건 모를 일이다. 펠릭스 발로통은 이런 죽음들이야말로 삶을 지배하는 일종의 조건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삶을 사는 것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바로 현대적 삶의 조건이라는 듯.


발로통이 그려낸 인물은 말을 해야 할 때 침묵하고 말하지 말아야 할 때 입을 연다. 기껏 무슨 말을 해야겠다고 되뇌다가 막상 발화의 순간이 오면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할 때 사랑(?)으로 타올라 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사람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조바심치다가 절망한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


발로통의 그림을 보면 가장 안락한 공간의 두 남녀의 다정한 포옹조차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을 전하고 있는, 일종의 수수께끼다.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발로통 그림은 우리 안의 탐정을 자극한다고 썼는데, 이 소설은 탐정의 돋보기 안경이나 마찬가지 일 듯하다. 발로통의 그림 세계를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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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루이스(Pierre Louis)는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면서 마지막 철자 's'를 발음할 때면 분노에 휩싸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결국 성을 갈아치우기로 한다. 그래서 루이스를 루이로만 발음하게끔 철자 i y로 바꾸고 그 위에 점까지 두 개를 찍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루이스라 부른다. (Pierre Louÿs)


피에르는 감각적인 사람이었는데 특별히 감각적이었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사랑은 감각의 시'라 썼던 보들레르의 제자가 말라르메라면 말라르메의 제자는 피에르 루이스다. 그러나 루이스는 마치 감각이야말로 사랑의 시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감각은 시적 상상력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의 몸은 감각을 실현하는 감각기계가 되었다. 감각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 중의 하나가 시가 되었고, 소설이 되었고, 익살과 풍자가 되었다. 거기엔 윤리나, 생의 의지 따위는 없다. 사랑이 윤리와 동의어인 세상에서 감각이라니. 관능의 감각이라니.


피에르 루이스는 관능의 삶을 살았다. 그는 색정광이었다. 독자들이 이 단어에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지 궁금하다. 누군가가 색정광이라 알려지면 그 사람의 책을 선택할 확률이 높을 것인지 현저하게 줄 것인지 알 수 없다. 성에 대한 상부구조와 토대가 극렬하게 불화하는 우리 사회에서 사드의 작품도, 조르주 바타유의 눈 이야기도 다들 읽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출판사가 대놓고 이 사람들을 색정광이라 칭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세기 어느 색정광의 빛나는 소설', 이런 문구는 본 적이 없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원제는 여인과 꼭두각시)>은 피에르 루이스 사후에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발간된 세기의 걸작, 수잔 손탁이 포르노그라피의 예술적 성과라 평가한 <세 자매와 어머니>, 그리고 하드코어에 가까운 풍자집 <어린 소녀들의 가정교육 지침서> 와는 다르게 그의 생전에 매우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서 출간되고 이후에도 공식적으로 대표되는 소설임을 밝혀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쓰고 나니 조금 더 비겁해진 느낌이다.


피에르 루이스 전문가 장 폴 구종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다. 피에르 루이스는 섹스의 끝이 어디인지 느끼고 싶었다. 인간의 성생활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섹스에 몰두했다. 일상적인 성생활의 모든 측면과 깊이를 경험해보고 싶었고 그것을 시와 사진으로 옮겼다. 상상력은 판타지와는 엄밀하게 구분해야 한다. 피에르 루이스의 상상력은 성적 판타지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환상과 상상은 분명 다른 것이다. 환상이 정서적인 측면이라면 상상은 다분히 이성적인 측면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는 느끼고 상상한다. 자신의 글과 사진, 섹스는 차이가 없다. 상상력의 윤활유일 뿐이다. 그가 이른 나이에 거의 절필했던 이유가 아닐지 짐작해본다. 당시 35만 부라는 막대한 성공을 거두고도 자신의 존재를 숨기거나 사생활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피했었다. 사생활을 보호할 수만 있다면 책 따위는 출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평생 읽고 썼다. 사람들은 피에르 루이스를 상상하는 인간이라 수식했다.


일종의 유희처럼, 말장난처럼, 특정한 분야의 감각에 집중되었으나 거기서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가 출현했다. 스타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물들을 바라보는 절대적인 방식이라 했던 플로베르에 따르면 피에르는 플로베르의 후예다. 물론 발자크의 후예는 아니다. 자신의 단편 소설 <가짜 에스더>(욕망의 모호한 대상)에 발자크를 등장시켰지만.


피에르는 중학교에서 만난 앙드레 지드의 첫 책에 서문을 썼고 두 번째 책에는 표지까지 만들어 줬다. 10대에 이미 수백 편의 시가 그의 노트를 채웠다. 우리가 한 번쯤 들어본 프랑스 시인들, 말라르메나 베를렌느, 르 콩트 릴 등 내로라하는 시인들이 청소년 피에르를 무척 좋아했던 모양이다. 지드와 피에르 루이스는 몇 년 후 결별하게 되고 평생 서로 만나지 않았다. 그게 그러니까. 앙드레의 성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봤다.


피에르가 스무 살 즈음에 지드와 함께 런던으로 가서 오스카 와일드를 만난다. 오스카는 피에르를 무척 좋아했다. 연정을 품은 건 아니었다. 오스카가 자기 희곡 살로메를 피에르에게 헌정했지만 이년 후에 피에르는 오스카에게 엄청난 실망을 하고 떠나게 된다. 오스카의 호텔에 침대 하나에 배게 두 개, 그리고 앨프리드 더글러스가 있다는 것을 피에르는 용납하지 못했다. 오스카는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 나는 단지 친구를 원할 뿐인데 참 어렵군, 그럼 나는 연인만 있을 팔자인가." 슬픈 이야기.

피에르 루이스는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던 걸까? 거참 자기는 사포를 그렇게 좋아하고 레즈비언 이야기를 시로 써서 당대의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면서 말이지.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되고, 남자와 남자는 안 된다 이거지? 이게 아직 내게 남은 미스터리 중의 하나다.


한 가지 더, 피에르와 드뷔시 사이의 우정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데, 그리스 레즈비언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시 <빌리티스의 노래> 3편에 드뷔시가 곡을 붙였다. 몇 년 후엔 이 둘의 관계도 끝나는데 이유는 드뷔시가 바람을 피워 부인과 이혼하고 젊은 여자에게 가버리자 피에르가 분노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피에르의 보수적 기질은 당시의 드레퓌스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프랑스를 완전히 양쪽으로 쪼갠 그때 반 드레퓌스 진영에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귀족의 혈통을 고집했다.


피에르는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할 시기에 주변과 절연하고 칩거에 들어간다. 그리스 고전문학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던 중에 당대의 유명한 논쟁을 촉발한다. “몰리에르는 코르네유 최고의 걸작이라는 표절 논쟁. 시인이자 소설가, 고대 그리스 문학 전문가였고 10여 개의 외국어, 무려 중국어도 할 줄 알았던 이 르네상스인에게 글쓰기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보는데, 그건 즐거움도 아니고 고통도 아니고, 뭔가 대단히 올바른 주장을 펼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자기 성찰도 아니면서, 성장은 더욱 아니었고, 그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결코 아니었으며, 특별한 이유, 써야 할 이유가 있거나 혹은 그런 이유를 애써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기가 느끼는 감각, 그걸 표현하고 싶다는 유일한 소망은 있었겠지만. 결국 쓰는 건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쓰는 게 삶이 되면 그런 삶은 참 가엾은 삶이 될 거라는 터무니없는 상상도 해본다.


그녀의 눈과 손가락은 더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온몸이 하나의 얼굴처럼, 얼굴 그 이상으로 풍부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머리카락으로 뒤덮인 얼굴은 마치 쓸모없는 물건처럼 어깨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갈라진 엉덩이에 미소가, 물결치는 허리엔 두 뺨의 홍조가. 그녀의 가슴은 두 개의 커다랗고 검은 눈처럼 앞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욕망의모호한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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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살면서, 내게는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친구가 없었다. 그러니 나의 성소수자 감수성이란 고작 몇 편의 영화나 소설이 전부다. 때론 상투적인 재현 속에서 때론 인간성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뛰어난 작품들을 통해 피상적으로 만났을 뿐이다.


인간사엔 정해진 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편이라 동성애나 성전환에 대해서 무심했다. 그것은 사생활의 영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니엘 보릴로와 카로린 메카리가 쓴 <호모포비>는 바로 나의 그런 생각 속에 자리한 혐오의 흔적을 찾아낸다.

저자들 본인이 성소수자로서 첨예한 갈등의 현장에 있기에 이 책의 기본 전제는 분명하다. 성적 지향에 따라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구분할 근거는 전혀 없다. 이는 논쟁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정상/비정상의 논쟁이야말로 이성애를 정상이라 여기는 다수가 부추기는 이데올로기 조작에 속할 뿐이며 이 책의 주요 관심도 아니다.


책은 동성애보다 동성애 혐오가 일으키는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를 짚어보면서 그 혐오의 기원과 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짧은 분량이지만 동성애라는 인간 행위를 모델로 삼은 인류 역사의 크로키로도 읽을 수 있다.

동성애가 규범 밖의 선택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서 이성애, 동성애의 구분조차 없었던 그리스, 로마 시대였지만 유달리 성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이었던 사회, 철저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는 혐오와 차별의 배아가 싹틀 토양을 마련하고 기독교 세계를 맞아들인다. 유대, 기독교의 가부장적 남성 지배체제가 공고해지면서 본격적인 동성애 혐오의 시대로 들어선다. 종의 보전이라는 지상의 가치는 어느덧 신의 의지가 된다. 중세와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와 과학, 철학, 의학, 이데올로기, 정치와 권력이 동성애를 정교하게 문제 삼고 폭력적으로 대처하는 방식을 감지할 수 있다.


사생활과 공적 사회의 완벽한 이분법에 근거한 19세기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자유주의 담론은 동성애를 선택으로 간주하면서 사생활의 배타적 영역에 위치 시킨다. 다시 말해 국가가 관여할 수 없는 개인의 신성한 영역임을 인정하지만, 사회적으로 합의되고 제도화된 이성애 외에 동성애가 외부의 공적 영역으로 표출되어서는 안 된다. 동성애자는 언제나 소수의 침묵 속에 머물러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 혐오는 일부 극단적인 예를 제외하고 모두 이 범주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동성애자의 사적인 행위와 사생활이 보장된다는 면에서 우리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다. 자유는 단지 그 실존에 대한 존중 이외에 다른 것을 강제하지 않기에 국가 또한 사생활의 한계 안에서만 동성애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무관심이나 의도적인 논외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와 같은 이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사생활, 특히 자신들의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의 보호와 인정, 안정을 구하기 위해 사생활 영역을 뛰어넘고, 국가는 제일 먼저, 이성애 커플의 부부, 가족으로서의 권리, 사회적 권리, 출산, 유산, 상속, 등의 유무형의 권리에 전적인 채무자가 된다. 그러나 동성의 결합은 사생활의 영역, 비밀의 영역에 남아있어야만 한다.


동성애자가 자신의 섹슈얼리티 선택했고, 그 선택으로 인해,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면, 이성애자인 나는 이성애라는 섹슈얼리티를 선택했기에 권리의 주체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나는 이성애를 선택했는가? 의문이다. 심지어 섹슈얼리티가 선택의 차원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 부여된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정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섹슈얼리티를 선택하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모두에게 같은 권리를 보장해야 하고 하나의 선택이 권리 행사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아야 하는 사회, 지금 현재 우리사회에 비추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 대목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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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포비
다니엘 보릴로.카롤린 메카리 지음, 김영신 옮김 / 불란서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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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쉬 걸>이란 영화를 본 후였는지, 저 유명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본 후였는지, 그도 아니면 <본즈 앤 올>을 본 후였는지는 모르겠다. 뜬금없이, , 미워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한 것은.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기에, 미워하는 건 이해는 하겠는데, 이처럼 지독하고 집요하게 한결같이 역사적으로 미워하고 있는 이 인간의 행위란 도대체 무얼까, 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이내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접기로 했다.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니까. 사랑을 하고 섹스를 하는 것. 때론 지루하고 뻔한 일 아닌가. 누구나 이미 본 '아주 오래된 연극'이란 것.

동성애가 대체 뭐야, 라고 묻는 순간 덫에 걸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다달았다. 그럼 남은 건, 도대체 왜, 그렇게 집요하게 미워하는 걸까였다. 이런 저런 책을 찾던 중에 발견한 책이 <호모포비>였다. 미워함의 역사적 기원과 양태를 알아가다보니 결국은 동성애자란 가부장제와 출산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일 뿐인데, 가부장제와 출산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진 나 같은 이성애자도 동성애자 처럼 미워함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아니, 확실히 난 미움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갇힌 동성애자는 분홍 삼각형 표식이 주어졌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들에게는 미국으로 갈 수도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동성애자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더우기 그들은 2017년이 되어서야 수용소의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당연한 인간적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것, 이 책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었다. 왜 미워하는가가 아니라 왜 권리를 주지 않는가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질문 일것이다.


책은 고대 성서시대와 그리스 로마, 기독교 시대를 거쳐 중세와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입장과 관점에서 동성애를 다루는 양태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근대에 들어, 과학과 의학, 이데올로기와 관료체제, 그리고 부르주아 시민사회가 형태를 달리하며 교묘하게 권리를제한하고 소외시키며 혐오를 조장하는 매커니즘을 볼 수 있다.


어떤 독자분의 혜안이 머리에 남는다. "<호모포비>는 동성애 혐오에 대해 이야기 하는 데 그건 곧 인간의 행위를 집요하게 부정하고 배격하는 또 다른 인간에 대한 이야기" 라는 구절. 


그리고 서점 직원의 다음과 같은 말도 인상적이다. "책을 읽다 보면 결국 동성애 혐오는 이성애 기준에서 다른 수많은 혐오와 차별들과 유기되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예를 들면, 성차별, 인종차별과 같이 말이다. 혐오는 혐오를 낳고 더욱이 여성과 아이, 약자로 흘러가는 매커니즘을 가진다. 특정 무언가를 옹호하는 글이 아니다. 혐오는 우리 모두에게 있기에 누구나 마주해야 하는 진실임을 잊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독을 권한다."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가 동성애와 이성애의 구분조차 무의미한 쪽을 향해, 생각보다 빨리 달려가고 있다. 혐오를 멈추고,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고, 무관심해지는 것. 내가 다른 이성애자에게 그들의 성애에 무관심한 것 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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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한 남자
펠릭스 발로통 지음, 김영신 옮김 / 불란서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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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발로통의 그림을 보는 일은 언제나 가고자 하는 곳에 닿지 못하면서도 지도를 유심히 살피는 것과 같다. 또는 분명 한 번은 와 본 곳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입구를 지나치거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쩔쩔매는 것이기도 하다. 좁은 화폭에서도 무수한 복선과 암시, 속임수가 지뢰처럼 화면 곳곳에 묻혀있다.


원색의 화려함으로 장식된 거실에서 손을 맞잡은 두 남녀의 모습이 사랑의 확인인지 파국의 전조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의 그림엔 언뜻 익숙한 이야기가 놓여 있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길을 잃고 망연히 서성거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리를 뜰 수도 없는 것이 원색과 흑백의 모호한 서사, 이미지와 표제의 충돌이 우리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물론 그대로 머무는 것 또한 쉽지 않은데 그 모호함은 우리가 수없이 보고 겪어온 바로 그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논리적 일관성이나 명백한 감정과 관계가 흔들리는 세계에 대한 재현은 사실적인 이미지 속에 배치된 어두운 그림자의 기묘한 조화 속에서나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호함 속에 짧은 삶을 살아낸 청년의 이름은 자크 베르디에. 펠릭스 발로통이 쓴 소설 [유해한 남자]의 인물은 자신의 선의나 사소한 행위가 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의식으로 어린 시절 일찍이 자신을 폐쇄한 청년이다. 자신의 단순한 행위들은 언제부터인가 타인에게는 모호한 행위, 치명적인 순간엔 유해한 행위가 되곤 했다. 그에게 세상은 명료한 그 무엇이 아니다. 무모한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혀 늘 자신을 번복하거나 포기하거나 혹은 다시 시작한다. 되풀이되는 자기 합리화, 그리고 부정과 추앙, 그 사이의 우연한 일탈은 마침내 사랑의 승리자가 되려는 순간 그 사랑을 죽음으로 인도한다. 그렇게 청년은 이해 불가의 세계에 던져진 태고의 저주가 된다.


그의 삶은 따뜻함이라곤 없던 고통의 연속이자 타인에게 다가서려 했으나 끊임없이 스스로를 밀어내버린 외롭고 메마른 삶이었다.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타인에게 이해받지도 못한 채 사랑의 갈망으로 삶을 마감한 청년의 삶에서 펠릭스 발로통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펠릭스 발로통은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이념론자"가 아니며, 일반적으로 무기력하고 허영심 많은 어리석은 자들이 흔히 그렇듯 이론들 속에서 영혼을 고갈시키지도 않는다.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비관적이다. 그러나 이 비관주의는 공격적이지도 않고 독단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이 정확한 남자는 최선의 상황에서도 낙관적인 기대로 자신을 속이지 않으며, 최악의 상황에서도 비관적이길 원치 않는다. 그는 매 순간 솔직함과 진실을 추구한다.”
-옥타브 미르보, 1910년 1월 10일에서 22일까지 파리 드루에 갤러리에서 열린 발로통 전시회 카탈로그의 서문.


참고로 [유해한 남자]를 자전적 소설이라 불렀지만, 자전적 소설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의견을 달리 할 수도 있겠다. 분명 [유해한 남자]는 펠릭스 발로통의 소설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어린 시절이나 청년기의 인물 묘사는 분명 젊은 발로통의 자화상 그대로다. 그리고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장면은 그의 초기 회화의 장면 속 이야기에 닿아 있다. 그리고 자크 베르디에가 젊은 미술평론가로서 내리는 홀바인과 앵그르에 대한 평가는 발로통의 그것과 정확히 같다. 그런 이유를 들어 자전적 소설이라 소개해도 될 만하다고 생각했던 점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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