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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한 남자
펠릭스 발로통 지음, 김영신 옮김 / 불란서책방 / 2023년 6월
평점 :
펠릭스 발로통의 그림을 보는 일은 언제나 가고자 하는 곳에 닿지 못하면서도 지도를 유심히 살피는 것과 같다. 또는 분명 한 번은 와 본 곳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입구를 지나치거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쩔쩔매는 것이기도 하다. 좁은 화폭에서도 무수한 복선과 암시, 속임수가 지뢰처럼 화면 곳곳에 묻혀있다.
원색의 화려함으로 장식된 거실에서 손을 맞잡은 두 남녀의 모습이 사랑의 확인인지 파국의 전조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의 그림엔 언뜻 익숙한 이야기가 놓여 있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길을 잃고 망연히 서성거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리를 뜰 수도 없는 것이 원색과 흑백의 모호한 서사, 이미지와 표제의 충돌이 우리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물론 그대로 머무는 것 또한 쉽지 않은데 그 모호함은 우리가 수없이 보고 겪어온 바로 그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논리적 일관성이나 명백한 감정과 관계가 흔들리는 세계에 대한 재현은 사실적인 이미지 속에 배치된 어두운 그림자의 기묘한 조화 속에서나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호함 속에 짧은 삶을 살아낸 청년의 이름은 자크 베르디에. 펠릭스 발로통이 쓴 소설 [유해한 남자]의 인물은 자신의 선의나 사소한 행위가 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의식으로 어린 시절 일찍이 자신을 폐쇄한 청년이다. 자신의 단순한 행위들은 언제부터인가 타인에게는 모호한 행위, 치명적인 순간엔 유해한 행위가 되곤 했다. 그에게 세상은 명료한 그 무엇이 아니다. 무모한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혀 늘 자신을 번복하거나 포기하거나 혹은 다시 시작한다. 되풀이되는 자기 합리화, 그리고 부정과 추앙, 그 사이의 우연한 일탈은 마침내 사랑의 승리자가 되려는 순간 그 사랑을 죽음으로 인도한다. 그렇게 청년은 이해 불가의 세계에 던져진 태고의 저주가 된다.
그의 삶은 따뜻함이라곤 없던 고통의 연속이자 타인에게 다가서려 했으나 끊임없이 스스로를 밀어내버린 외롭고 메마른 삶이었다.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타인에게 이해받지도 못한 채 사랑의 갈망으로 삶을 마감한 청년의 삶에서 펠릭스 발로통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펠릭스 발로통은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이념론자"가 아니며, 일반적으로 무기력하고 허영심 많은 어리석은 자들이 흔히 그렇듯 이론들 속에서 영혼을 고갈시키지도 않는다.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비관적이다. 그러나 이 비관주의는 공격적이지도 않고 독단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이 정확한 남자는 최선의 상황에서도 낙관적인 기대로 자신을 속이지 않으며, 최악의 상황에서도 비관적이길 원치 않는다. 그는 매 순간 솔직함과 진실을 추구한다.”
-옥타브 미르보, 1910년 1월 10일에서 22일까지 파리 드루에 갤러리에서 열린 발로통 전시회 카탈로그의 서문.
참고로 [유해한 남자]를 자전적 소설이라 불렀지만, 자전적 소설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의견을 달리 할 수도 있겠다. 분명 [유해한 남자]는 펠릭스 발로통의 소설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어린 시절이나 청년기의 인물 묘사는 분명 젊은 발로통의 자화상 그대로다. 그리고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장면은 그의 초기 회화의 장면 속 이야기에 닿아 있다. 그리고 자크 베르디에가 젊은 미술평론가로서 내리는 홀바인과 앵그르에 대한 평가는 발로통의 그것과 정확히 같다. 그런 이유를 들어 자전적 소설이라 소개해도 될 만하다고 생각했던 점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