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살면서, 내게는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친구가 없었다. 그러니 나의 성소수자 감수성이란 고작 몇 편의 영화나 소설이 전부다. 때론 상투적인 재현 속에서 때론 인간성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뛰어난 작품들을 통해 피상적으로 만났을 뿐이다.
인간사엔 정해진 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편이라 동성애나 성전환에 대해서 무심했다. 그것은 사생활의 영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니엘 보릴로와 카로린 메카리가 쓴 <호모포비>는 바로 나의 그런 생각 속에 자리한 혐오의 흔적을 찾아낸다.
저자들 본인이 성소수자로서 첨예한 갈등의 현장에 있기에 이 책의 기본 전제는 분명하다. 성적 지향에 따라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구분할 근거는 전혀 없다. 이는 논쟁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정상/비정상의 논쟁이야말로 이성애를 정상이라 여기는 다수가 부추기는 이데올로기 조작에 속할 뿐이며 이 책의 주요 관심도 아니다.
책은 동성애보다 동성애 혐오가 일으키는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를 짚어보면서 그 혐오의 기원과 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짧은 분량이지만 동성애라는 인간 행위를 모델로 삼은 인류 역사의 크로키로도 읽을 수 있다.
동성애가 규범 밖의 선택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서 이성애, 동성애의 구분조차 없었던 그리스, 로마 시대였지만 유달리 성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이었던 사회, 철저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는 혐오와 차별의 배아가 싹틀 토양을 마련하고 기독교 세계를 맞아들인다. 유대, 기독교의 가부장적 남성 지배체제가 공고해지면서 본격적인 동성애 혐오의 시대로 들어선다. 종의 보전이라는 지상의 가치는 어느덧 신의 의지가 된다. 중세와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와 과학, 철학, 의학, 이데올로기, 정치와 권력이 동성애를 정교하게 문제 삼고 폭력적으로 대처하는 방식을 감지할 수 있다.
사생활과 공적 사회의 완벽한 이분법에 근거한 19세기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자유주의 담론은 동성애를 선택으로 간주하면서 사생활의 배타적 영역에 위치 시킨다. 다시 말해 국가가 관여할 수 없는 개인의 신성한 영역임을 인정하지만, 사회적으로 합의되고 제도화된 이성애 외에 동성애가 외부의 공적 영역으로 표출되어서는 안 된다. 동성애자는 언제나 소수의 침묵 속에 머물러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 혐오는 일부 극단적인 예를 제외하고 모두 이 범주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동성애자의 사적인 행위와 사생활이 보장된다는 면에서 우리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다. 자유는 단지 그 실존에 대한 존중 이외에 다른 것을 강제하지 않기에 국가 또한 사생활의 한계 안에서만 동성애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무관심이나 의도적인 논외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와 같은 이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사생활, 특히 자신들의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의 보호와 인정, 안정을 구하기 위해 사생활 영역을 뛰어넘고, 국가는 제일 먼저, 이성애 커플의 부부, 가족으로서의 권리, 사회적 권리, 출산, 유산, 상속, 등의 유무형의 권리에 전적인 채무자가 된다. 그러나 동성의 결합은 사생활의 영역, 비밀의 영역에 남아있어야만 한다.
동성애자가 자신의 섹슈얼리티 선택했고, 그 선택으로 인해,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면, 이성애자인 나는 이성애라는 섹슈얼리티를 선택했기에 권리의 주체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나는 이성애를 선택했는가? 의문이다. 심지어 섹슈얼리티가 선택의 차원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 부여된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정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섹슈얼리티를 선택하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모두에게 같은 권리를 보장해야 하고 하나의 선택이 권리 행사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아야 하는 사회, 지금 현재 우리사회에 비추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 대목으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