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아이들 (반양장)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미 오~~래 저 이야기이지만, 대학에 입학해서 1학년 1학기 때 들은 강의에서 느낀 감동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문학의 이해'라는 과목이었는데, 고등학생 티를 못벗은 내게는 일종의 지적 쇼크로 다가왔다.
그 당시 내게는 또래들에 대해 일종의 '지적 자만'과 같은 것이 있었는데....

티없이 자유롭고, 동시에 엄청난 지성을 소유하고 계셨던 교수님의 모습에서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를 느낀 것이다.
낡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며 수줍은 웃음을 짓고 계신 백발의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난 이 강의를 통해, '고수'를 직접 만났고 이후에는 내 생각이 남들의 생각보다 더 우월하고 옳다는 태도를 탈탈 털어 버렸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 학기 강의였다. 그 주인공은 국문과 김인환 선생님이시다.

교수님은 언젠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소설로 쓸 수 있어야 진짜 알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소설이 다른 형태의 글쓰기보다 우월하다는 뜻은 물론 아니셨고,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들간의 관계(이론)에 대한 앎이 현실의 삶에 적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개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보편의 이론(앎)이 특수한 상황(삶)에 적용되면서 그 존재가치가 검증되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히로세 다카시의 '체르노빌의 아이들'이라는 소설은 이러한 "문학적 검증과정"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본래 소설가는 아니고, 저널리스트인 히로세 다카시 씨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건에 대한 정보를 세세하게 수집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체르노빌 사고에 대한 정확한 정보들이 히로세씨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비극적 사고에 대한 진실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은폐되거나 완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로세씨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체르노빌에 대한 모든 정보를 '소설'로 쓰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복잡다단한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있게 만든 프로세스의 오류나 피해에 대한 설명 등은 완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규명한다고 해도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없다는 것도 계산했을 것이다.

평화소설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 소설에서 소설가가 쓴 극적인 구조나 기교있는 문장력같은 것들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뒤 벌어지는 참혹한 피해의 과정이 세세하고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 가족의 비극적 이야기는 마치 이웃의 피해(당장 내게도 닥칠 수 있는...)와 같이 다가온다.

원자력 발전은 결코 청정한 그린에너지가 아니다. 당장의 경제적 이익을 기반으로 사탕발림되어 있는 원자력 발전에 대한 어떠한 긍정적 이야기도 믿어서는 안된다. Risk는 감수하기보다는 회피하는 것이 올바른 전략이자 태도이다. 특히 그 위험이 클수록 말이다.

이 서재의 이야기가 너무 추상적이어서 공감을 얻을 수 없는가? 그렇다면,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한 가족의 특수한 이야기는 공감을 주고, 그 공감을 통해 보편적 태도를 형성하게 해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