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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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한 세계에서 무한의 영역으로 나아가기.

 비범한 통찰력의 소유자인 리프킨은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그는 유한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생산 분배하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기본적으로 유한한 것이 가지는 슬프고, 고통스럽고, 아쉽고, 다툼이 따르는 본질을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는 흔히 무한정한 것으로 생각되던 것들에 대한 유한성을 이야기했고(엔트로피), 배타적인 소유라는 형식으로 향유하는 물질적인 것들과 무한 공유가 가능한 문화적, 정신적 가치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소유의 종말), 유한한 자원인 석유에너지의 고갈과 그것에 따른 다툼과 같은 사회적 현상들을 주목한 후, 지속가능하고 무한한 에너지 형태인 수소를 지목했다(수소혁명).

 이외에도, 더 이상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가치를 생산하는 것에만 매이지 않아도 되는 세상(노동의 종말), 위의 모든 이야기들을 아우를 수 있어 보이는 생태학적 관점을 논의했다(육식의 종말).

 이 모든 사유들은 희소한 자원과 그것으로 나타나는 삶의 양태들에 대한 테두리를 넘어서고 싶은 갈망들이고, 근본적으로는 유한한 것들이 낳는 슬픈 현실들을 타개하기 위한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의 따뜻한 마음은 매우 현실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의 옳은 것은 추구하기 때문이다(그렇지 않은 탐욕의 소유자들도 많지만...).

내 것을 빼앗기지 않고도 남과 같이 공유할 수 있으려면, 바로 무한의 영역으로 나아가야만 하며, 무한의 영역으로 나아가지만 지속 가능한 삶을 전제로 하는 것은 생태학적 관점이다.

(누구나 다 마더 테레사가 될 수는 없는 법이고, 곳간에서 인심나지 뒷간에서 인심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토록 넘어서길 원하는 유한한 것은 대개 완고한 물질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무한 공유 가능한 것은 좀더 자유롭고, 비정형적이고, 정신적이고, 비물질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듯이... 개개인의 인생이라는 유한성을 넘어서는 것은 결국은 정신적 가치인데 이것이 감성의 영역에서는 예술로, 이성의 영역에서는 지식(학문,과학)의 형태로 나타난다.

 새로운 사유와 정신적 가치들의 생산이 그 자체로 목적인 동시에 의미있는 교환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멋진 신세계" 였기 때문에 나는 리프킨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이에 리프킨은 모든 관계와 경험까지도 상품화하는 문화 자본주의 시대의 돈의 힘을 경계하는 내용도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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