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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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중반은 아마도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있어 가장 자유로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군대-권위주의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단단한 지층 사이에 존재했던 일종의 해방의 시기였던 듯 하다.

그 당시에는 혼돈과 질서가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나름 여유롭고 사회적으로도 지금과 같이 불안이 많지 않았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의 형용사는 그 시기에 존재했던 모든 절대적인 가치를 부정하거나 상대화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시각적으로 비유한다면 90년대 초중반은 두 개의 치밀하고 빈틈없이 무두질된 가죽이 바느질 된 야구공의 seam(솔기) 부분 같다고나 할까?

정치(힘)와 경제(돈)라는 두가지 가치 사이에 문화라는 이름으로 해방의 시간과 공간이 잠깐 열린 것이다.

이 시절 대한민국 문화계의 최고 스타는 단연 작가 장정일과 영화감독 장선우였다.

이 듀오는 때마다 문제작을 만들어 내며, 대한민국에 문화적 창의력을 불어 넣은 사람들이다.

 

장정일은 시와 소설 등에서 발군의 창의력을 선보였고, 사회적 규범과 대중의 시선 등 그 무엇에도 구애됨 없이 그의 생각을 극단까지 끌고 갔다. 장선우는 장정일 등 작가들이 만들어 낸 상상력을 영화라는 파급력이 큰 매체로 바꾸어 나갔다.

그러다가 장정일은 거짓말처럼 법의 잣대로 상상력을 재단받으며 창작활동이 뜸해졌고,

장선우는 성냥팔이 소녀가 독한 방식으로 재림하면서 빛을 잃게 되었다.

잠시 보였던 대한민국의 불안없는 자유로움의 가능성은 IMF 이후에 신자유주의 행보를 거듭하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 출생률은 세계 최저 수준, 원정출산에 영어발음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혀를 수술하는.....

 살기 싫고 그 근본을 뿌리가지 부정하고 싶은 국가가 된 것.)

 

그 장정일이 10년 만에 장편소설을 지었다고 한다.

제목은 "구월의 이틀".

열아홉 성인도 아니고, 청소년도 아닌 경계선에 선 아이들 혹은 남자들이 펼쳐내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11월의 이틀만에 읽은 이 소설은 이전의 장정일의 소설과는 달랐다.

과거의 소설들이 한 개인이 점유하고 있는 심리적 공간을 끝없이 수직적으로 파헤치는 것이었다면,

이번 소설에는 사회적-역사적 맥락이 명확하고 등장인물들은 이러한 사회적 맥락에 의해 조형되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2006년 출간된 장정일의 '공부'라는 책을 보면서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었다.

그의 공부는 역사와 사회, 정치 등 인문/사회과학 분야에 치우쳐 있다. (이전 독서일기를 보면 거의 문학 작품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됨. 작중 인물 '은'의 독서법은 거의 장정일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여전히 등장인물 간에는 장정일 특유의 괴팍한 인간관계가 설정되어 있긴 하지만 그러한 내용조차도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작가 후기에서도 작가 장정일은 '우익청년 탄생기'를 써보고 싶다고 했다. 우익 청년 탄생기라... 정말 흥미로운 주제다.

 '공부'에 나오는 박정희와 바그너, 촘스키, 레드컴플렉스, 마키아벨리, 이종오에 대한 관심을 보면 당연히 튀어나올 수 있는 이야기 거리인 것이다.

 

그러나 '은'이라는 존재는 지나치게 이질적인 자아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가 창조한 '은'은 아마도 대한민국판 히틀러의 현신일 것 같다.

미술에 천착하고 시를 좋아하는 소심한 문학적 인간인데, 다른 한편에서는 '힘에의 의지'가 한창 때의 나치와 동급일 정도이다.

작가는 이 책의 속편을 기획하고 있는 듯 하다. 벌려놓은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 할까 궁금하다.

 

그리고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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