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없음은 없음만 낳느니라. -1막 1장 90행, 리어  

 멀쩡한 왕국을 세 딸에게 분할하여 양도하겠다고 생각한 리어왕이 딸들에게 요구하는 양도에 합당한 조건은 말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짐을 가장 사랑하는지, 그래서 효성과 자격 갖춰 요구하는 딸에게 최고상을 내릴 수 있도록.'-. 그러한 요구에 대해서 맏딸 고너릴과 둘째 딸 리건은 듣는 귀가 즐거워질 달콤한 말로 아버지 리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진실한 마음이 담긴 고백이라면 더할 나위없이 감동스러울 수도 있을 그러한 사랑 표현에는 실제로 리어왕 자신이 듣고 소유하고 싶었을 그런 간절하고 깊은 사랑은 담겨 있지 않습니다. 다만 양도되는 땅과 권력에 눈이 먼 탐욕스런 마음을 감춘 공허하게 울리는 허영에 찬 말뿐인 것이지요. 이에 반해 셋째 딸 코딜리아는 말이 진실과 외양을 왜곡하여 전달할 수 있음을 깨닫고는 허영에 찬 말보다는 사랑의 침묵을 택합니다 - 코딜리안 뭐라 하지? 사랑으로 침묵하라 (1막 1장 62행)-. 그리고 당당하게 화려한 미사여구를 담은 사랑의 표현을 요구하는 아버지 리어에게 '없습니다, 전하.'라고 대답하고는 도리에 따라 아버지를 사랑할 뿐 자신의 마음을 겉치레를 섞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의 진심어린 행위에 담길 수 밖에 없는 것임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리어왕의 반응은 '없음은 없음만 낳느리라'는 냉당한 말과 함께 아무런 재산의 양도도 없이 코딜리아를 성밖으로 내어쫒아버리는 것입니다. 역자는 이러한 리어왕의 주제를 '사랑의 비어있음'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독자로서 이를 생각하면서 읽는다면, 이 작품속 주인공들의 삶과 말속에 '있음'과 '없음' -특히 코딜리아의 '있음'과 '없음', 그리고 리어왕의 있음'과 '없음'-의 의미에 대한 성찰만으로도 훌륭하게 이 작품을 읽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코딜리아의 '없음'과 리어왕의 '있음'이 동일한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극의 초반에 없음이 없음으로 강렬하게 대립하며 파국으로 내달려가는 것은, 결국 코딜리아나 켄트의 진심어린 간언을 무시하는 리어왕의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오만과 딸들의 배신에서 생긴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고 광기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리어왕의 성격적 결함이라는 측면에서 이 작품의 비극적 서사를 따라가는 것도 이 작품을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일 듯 합니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또 다른 포인트는 서로 쏙 빼닮은 주플롯-두 딸의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간 리어왕의 몰락과 광기어린 삶과 세 딸이 얽힌 이야기-과 부플롯-아들 에드먼드의 감언이설에 놀아나 큰아들 에드거를 쫒아내고, 에드먼드의 배신으로 반역자로 몰려 눈알이 뽑혀 쫒겨난 글로스터와 두 아들이 얽힌 이야기-이 서로 얽혀 동일한 주제를 교묘하게 연계시키면서 심화시켜간다는 점에도 있다 -셰익스피어 그림으로 읽기, 권오숙, p79-고 합니다. 이외에 르네상스 시대에 자신의 노력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와 권력을 성취하려는 르네상스형 자아창출자의 전형으로서의 에드먼드의 모습을 통해서 신분이 세습되는 중세시대의 틀을 깨고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전조가 표현되고 있다는 점, 다른 셰익스피어 작품 속에서처럼 광대-바보-를 통해서 신분이 높은 이들의 근엄한 척하는 삶속에 덕지덕지 붙은 허위와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점 등도 유의해서 살펴본다면 이 작품을 더 깊이있게 대할 수 있는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쌍한 코딜리아! 하지만 안 그래, 왜냐하면 내 사랑은 분명히 내 입보다 무거울 테니까. -1막 1장 76-78행, 코딜리아 

 목숨 걸고 판단컨대 막내딸의 사랑은 가장 적지 아니하며 조용한 목소리로 공허한 말 않는다고 인정 없진 않습니다. -1막 1장  152-155행, 켄트 

 그래도 전하께 간청컨대 의도 없이 말로만 기름 치는 기술이 제게 없기 때문에 -좋은 뜻이 있으면 전 말에 앞서 실천하니까요.- 이건 밝혀 주십시오. 전하의 은총을 제게서 앗아간 건 사악한 오점이나 살인 혹은 추잡함, 부정한 행위나 천한 짓이 아니라 그것이 없기에 제가 더욱 부자인 늘 조르는 눈빛과, 못 가져서 전하의 사랑을 잃었지만 안 가져서 저는 기쁜 혀라는 사실을. -1막1장 225-235행, 코딜리아 

 시간은 숨어 있는 흉계를 드러내고 감춰진 잘못을 창피 주며 비웃지요. -1막 1장 282-283행, 코딜리아 

 아저씨 없음을 이용할 줄 알아? (광대) 글쎄 몰라. 없음에선 없음만 나오니까. (리어) -1막4장 128-129행 

 그녀의 찌푸린 눈살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을 때 당신은 괜찮은 친구였는데, 이젠 값없는 숫자 영이 됐어. 난 지금 당신보다 낫다고, 난 바보지만 당신은 없음이니까. -1막 4장 182-185행, 바보 

 가장 천한 거지들의 쓸데없는 물건에도 여분은 있는 법. 인간에게 본능만 채우라고 한다면 사람 목숨 짐승 값이 아니냐. -2막 4장 262-265행, 리어 

 바람아 불어라. 빰 터지게! 사납게 불어라! 하늘과 바다의 폭풍우야, 첨탑들이 잠기고 풍향계가 다 빠질 때까지 내뿜어라! 참나무 쪼개는 벼락의 선구자, 생각보다 더 빠른 유황색 번갯불아, 내 흰머리 태워라! 만물을 뒤흔드는 천둥아, 둥글게 꽉 찬 세상 납작하게 깨부숴라! 조물주의 틀을 깨고 배은의 인간 빚는 모든 씨앗 한꺼번에 엎질러라! -3막 2장 1-9행, 리어 

 벌거숭이 몸으로 극도로 매서운 하늘과 맞서느니 넌 차라리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게 낫겠다. 인간이 이것밖에 안된다는 말이냐? 애를 잘 고찰해 봐. 넌 누에에게 비단도, 동물에게 가죽도, 양에게 양털도. 고양이에게 사향도 빚진 게 없구나. 하! 여기 우리 셋은 변질됐어, 넌 물 그 자체이고. 문명을 떨쳐버린 인간은 바로 너처럼 불쌍한 알몸의 두발 짐승에 지나지 않아. 벗자 벗어, 빌린 것들을! 자, 여기 단추를 끌러다오. -3막 4장 99-107행, 리어 

 이렇게 멸시받고 그 사실을 아는 것이 겉 아첨에 속 멸시보다는 낫구나. 운며의 여신이 포기한 맨 밑바닥 인생은 언제나 희망품고 공포 속에 살진 않아. 통탄할 변화는 최상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최악은 웃음으로 되돌아가는 법. 그럼, 불어라, 내 가슴에 안기는 실체 없는 바람이여. 최악으로 떠밀려 간 비참한 이 몸은 너에게 빚진 게 없단다. -4막 1장1-9행, 에드거 

 인간은 가는 것도 온 것처럼 견뎌야만 합니다. 다 때가 있지요. -5막 2장 9-11행, 에드거 

 운명은 한바퀴를 다 돌았고 난 여깄소. - 5막 3장 172행, 에드먼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