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정전 문학동네 루쉰 판화 작품집
루쉰 지음, 이욱연 옮김, 자오옌녠 판화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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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네 건달들은 그 정도에서 그칠 인간들이 아니어서 아Q를 놀리다가 결국 때리기까지 했다. 아Q는 형식적으로는 졌다. 동네 건달들은 아Q의 누런 변발을 틀어쥐고는 벽에다 네다섯 번 소리가 날 정도로 찧고 나서야 아주 만족스럽게 승리한 기분을 느꼈다.   아Q는 잠시 서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들놈에게 맞은 셈이네. 요즘 세상은 정말 개판이라니까.....' 그리고 나서 그도 아주 만족스럽게 승리한 기분이 되어 돌아갔다. ..... 버러지라고 해도 동네 건달들은 놔주지 않았고 가까운 담벼락에다 머리를 대여섯 번 짓찧고 나서야 만족스럽게 승리했다는 듯이 떠났다. 이번에야말로 아Q를 제대로 혼내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십 초도 못되어 아Q 역시 만족해하며 떠났다. 그는 스스로를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데에는 자기가 첫째가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더구나 '스스로를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데에는'이라는 말을 제외하면, '첫째가는 사람'이라는 말만 남으니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도 첫째가는 사람이 아닌가? "네깟 것들이 무엇이라고 감히?" 

 불굴의 정신승리법으로 무장한 민초..... 이 사람은 자신의 근본 -제대로 된 성이나 이름, 출신지등-이 알려지지도 않은, 딱히 직업이 없어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날품을 파는, 그리고 마땅한 거처가 없어 동네 사당에 몸을 의탁해 사는 '아Q'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눈에 보일 때, 일감이 있어 그의 손길이 필요할 때 잠시 생각할 뿐, 자신들의 일상에서는 이 사람의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존재감도 없고, 자신에 대해서도 딱히 내세울게 없으며, 건달들에게 시시때때로 얻어맞는 초라한 민초라지만 그 나름의 세상을 편히 살아가는 비법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승리법..... 앞에서 언급한 그 누구에게도 지지않고 자신을 승리자로 이끌수 있는 '위대한(?)' 정신승리법으로 무장한 그는 적어도 자신에게는 '대단한(?)' 존재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의 초반부는 정신승리법으로 무장한 아Q가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개인사적인 서술이 이어집니다. 

 마을에서의 초라한 실패를 뒤로하고 -정신승리법으로 무장한 아Q는 스스로를 승리자로 만족해하였겠지만 - 소리없이 사라졌던 아Q가 다시 마을에 나타난 시점에서 '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아Q로 대표되는 민초가 사회적인 격변이 일어나는 시기에 자신을 추스리던 정신승리법을 극복하고 정말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물음과 함께 사회적인 격변의 중심에 자기 기만에 빠져있던 아Q가 내던져지고 시험을 받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에서 혁명당의 모습을 보았던  아Q가 처음부터 혁명을 갈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혁명은 반란이고 반란은 그를 더욱 힘들게 할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혁명에 부정적이었지만, 혁명이라는 말이 자오 나리를 비롯한 있는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을 보고는 '혁명도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빌어먹을 것들을 혁명해 버리자'고 생각하고서는 자신으로부터 생성된 알맹이가 없는 타인의 혁명에 동참하고자 나섭니다. 이 민초에게 혁명이라는 것은 평소 자신을 무시하던 녀석들을 하둥대게 만드는 힘이 있는 도구라는 사실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고 또한 원하는 여자를 소유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인식될 뿐, 그 이상의 내적 사고와 외적 행동의 발전이나 변화의 싹은 눈을 씻고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혁명의 공간은 아Q의 입장에서는 갈아엎어야 할 대상이었던, 물질을 소유했다고 또는 더 많이 배웠다고 으시대던 이들이 다시 모양만 바꿔 자리를 차지한 것이었기에, 그가 그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혁명의 깃발을 내세우든지 이미 펼쳐진 혁명의 공간에서 자리를 다시 꿰차고 앉은 이들에게 굽신거리며 자기 자리를 만들어 줄것을 부탁하는 것일터인데, 아Q가 혁명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후자의 길을 택하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혁명은 그리 진행되었지만, 그 공간에서도 약자로서 남아있는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변화마저도 이끌어내지 못한 무능한 아Q를 위한 배려는 남아있지 않고, 그의 삶이 혁명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혁명의 공간 안에서도 힘없는 씁쓸한 희생자로 끝나고 맙니다.  

 이 소설이 중국의 신해혁명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씌여졌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민초를 상징하는 아Q의 모습과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에 대한 작가의 기록은 실제 역사적인 사건이라던 신해혁명의 왜곡된 모습에 대한 작가의 절망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Q처럼 많은 이들에게 혁명이 단순한 주인 바꾸기, 권력자 교체라는 의미에서 이해되었지만 실제로 혁명이 추구해야 할 것은 그러한 단순한 것이 아니고, 실제 혁명에서는 그러한 단순한 권력 교체마저 이루어지 못하고 겉모양만 약간 바꾸었을 뿐이라는 것이 그러한 절망감 속에 담긴 저자의 인식인 것 같습니다. '혁명이라는 사회적인 흐름속에서 아Q와 같은 민중이 그 주체가 된다는 사실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실제 소설속에서 기득권자들이나 그 권속들이 직책만 바꿔서 혁명의 주체로서 뻔뻔하게 앞장 선 것과 달리, 흐름이 바뀌어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민중들에게 권력이 넘어가 기존의 권력자들이 쫓겨나고 새판이 짜였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는 혁명의 열매를 누리는 주체만 바뀌었을 뿐 알맹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이다. 혁명에서 중요한 것은 그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보다 그 혁명을 이끄는 주체들의 정신이 어찌 개조되었고, 그러한 정신과 사상의 개조가 사회에 어떤 근본적이고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 소설과 달리 아Q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혁명당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서 그가 말하던대로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뻐기며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 이상을 이룰 수 없다면 그것은 혁명이라기보다는 권력이 바뀐 것 뿐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인식이 혁명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정신승리법으로 무장한 위대한 민초 아Q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 소설은 다른 의미로는 민중들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던 위대한 혁명에 대해 과감하게 사망선고를 내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때의 혁명은, 아Q라는 덜떨어진 사람이 처형되는 것을 볼려고 다리품을 팔며 헛고생만 하다가 끝난, 그리고 처형의 방법으로는 총살보다는 목을 치는 것이 더 볼거리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정도를 담고 있는 빛바랜 기억일 뿐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작가가 보기에는 혁명에 들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그리 보일 뿐이라고 외치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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