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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평점 :
여러분 모두 수학을 경험해 보았을 겁니다. 수학이 싫은 사람은 수학을 고역으로 여길 테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마 게임쯤으로 생각하겠죠. 일리있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수학에는 또 다른 면이 있어서 그걸 느끼려면 무한을 생각해야 하죠. 어느 위대한 인물은 무한이 인류의 정신에 가장 큰 영감을 준 관념이라고 했어요. 맞는 말이에요. 무한은 인류의 정신을 가장 강하게 압박해온 관념, 인간의 정신력을 절대 한계까지 몰아붙여온 관념이라는 점! 또 무한은 수학의 내면이 허약하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개념이기도 하죠. -p134, 러셀의 강연 장면 중에서
수학적으로 '무한'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한대를 나타내는 부호 - ∞ -와 함께 뒤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끝없음으로 표현되는 '더 큰 무한' -예를 들면 자연수의 경우 한없이 커지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상태-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알고는 있지만 미처 의식으로 또렷하게 떠올리지 못했던 또 다른 개념의 무한이 있음을 이 책을 보면서 문득 깨닫게 됩니다. 자연수 3과 4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실수 3과 4사이에는 역시 무한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더 작은 무한'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 별 것이 아닌 자각이지만, 여태껏 무한의 개념을 대하면서 앞의 개념만을 생각하던 내 자신이 다시 한 번 깨이는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마도 지금까지의 수학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많은 인물들의 시작도 바로 이러한 깨임의 즐거움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러한 단순한 즐거움에 머물지 않고 희열을 넘어 광기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을 몰고 가고는 하였던 듯 하니, 위대한 성취의 이면에는 평범한 이들이 느끼는 첫자락의 작은 쾌락 이상의 무엇인가가 숨어있다고 하는 것이 진실일 것입니다.
만화로 표현된 수학 이야기, 수학의 토대 또는 논리에 대한 이야기. 엄격하게 말하면 이 책은 수학의 역사 -특히 논리적인 토대의 역사-에 대한 책이지, 수학 자체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끔씩 수학의 본 얼굴이 잠깐씩 보이기는 하지만, 주된 내용은 수학의 확고한 논리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수학자들의 투쟁(?)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의할 점은 현실적인 개연성을 토대로 하기는 했지만, 수학의 역사에서 있었던 사실 자체를 그대로 나타낸 이야기들이 아니라 작가들에 의해서 '수학의 토대를 찾아서'라는 주제에 맞게 어느 정도 각색되어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을 새기고, 책 속으로의 여행을 떠난다면 이 책을 통해서 정말로 흥미로운 개념들과 인물들을 만나는 즐거운 시간을 마음껏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수학의 토대에 대한 치열한 공방, 무한, 자기언급, 실재와 지도의 관계, 러셀의 역설과 수학적 직관주의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기 어려웠던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을 대할 수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 칸토어, 프리게, 러셀, 비트겐슈타인, 힐베르트, 괴델, 푸앙카레, 폰 노이만, 그리고 튜링 등 수학의 역사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만났던 이들을 수학이라는 창을 통해서 대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야기의 전개를 통해서 어려운 공식과 반복되는 계산으로 일그러진 수학이 아닌, 삶의 일부로서 살아 숨쉬는 수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을 것 같습니다.
형식적인 면에서, 러셀의 어느 대학 강연 모습과 수학의 토대를 찾기 위해 일생을 불사른 사람들의 이야기, 저자들이 이 책을 구상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서로 얽혀서 진행되는 이 책의 다층적인 구조는 이야기의 흥미로운 진행을 떠나 저자들이 숨겨놓은 나름의 의도가 있을 듯 한데, 옮긴이는 이를 '자기언급'의 개념을 들어 슬쩍 언급하고 넘어 갑니다. 러셀의 역설이나 에우불리데스의 거짓말쟁이 역설의 핵심이 '자기언급'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저자들이 책을 만드는 과정을 스스로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자기언급'의 형식에는 결국 자신들의 원대한 계획이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수학의 원리'라는 책의 집필을 통해 수학의 근본적인 토대에 도달하고자 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사실처럼, 시작만 한 채 마무리하지 못하였음을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마무리 될 수도 없음을 은연 중에 내비추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