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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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 p25 

 화사한 책표지와 어울리지 않게 이 책을 대하면서 가장 먼저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프로스트 (Robert Frost)의 '가지 못한 길 (The road not taken)'이라는 시였습니다. 시를 좋아해서라기 보다는, 내 또래라면 학창시절 어느 때쯤엔가 국어책에 실렸던 이 시를 배웠을 것이고, 그때는 시험을 보기 위해 시를 이리저리 분해해서 공부했을 터이지만, 생각지 못한 순간에 문득 떠오르는 것을 보니, 시인의 감성은 감수성이 스폰지 같았을 어린 영혼에 그대로 흡수되어 평생을 지속되고 있었던가 봅니다. 화사함보다는 가보지 못했던 길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담고 있었던 내용이지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고 말하는 저자의 속마음과 이 책을 손에 들고서 제목을 대하고 있는 내 마음 모두에 딱 들어맞는 느낌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는지..... 

 1부 자신만의 밑줄에서 작가는 현재 살고 있는 집과 마당, 그리고 그 마당의 잔디와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여, 공간으로는 자신의 고향 개성에서부터 서울과 구리, 지리산 자락의 시골마을을 넘어 일본의 홋카이도 여행의 기억까지 아우르고 있고, 시간으로는 아득한 기억으로 남은 개성에서의 유년시절, 해방과 중학교 졸업, 대학에 진학하자 마자 겪게된 6.25 전쟁을 거쳐 작가가 되고,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가 되고, 노작가가 된 현재의 자신에 이르기까지 마음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현재의 삶과 과거의 기억속에 담겨있는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때로는 해맑은 꿈을 품었던 소녀로, 때로는 자신의 가정에 닥친 어려움을 온몸으로 지탱해야 했던 억척스런 여인으로,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마당 잔디밭의 잡초와 씨름하는 평범한 노인으로.... 자식을 먼저 보내야만 했던 아픔을 품은 어머니로..... 두고 온 고향을 애타게 그려보는 실향민으로.... 2002 월드컵때는 축구의 맛에 빠져 마음만은 젊은이들과 똑같이 붉은 악마였던 축구팬으로.... 손자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기 그지없는 할머니로....  자신의 삶의 길목에 있었던 일들을 이리 소담스럽게 풀어낸 작가는 그래도 글의 처음에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고 꿈에 비해 현실에서 이룬 것들이 더 초라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읽는 이에게는 충분히 아름다워 보이고, 또한 밋밋한 삶에 의미를 묻게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따끔함과 주어진 삶을 더 따뜻하고 소중하게 살라는 노작가의 격려의 손길이 느껴지는 삶의 이야기들인데도 말입니다. 

 2부 책들의 오솔길에는 작가의 감성이 담긴 12권의 책에 대한 소개가 실려 있습니다. '서평도 독후감도 아니'라는 첫머리의 고백처럼 어떤 형식이나 틀을 갖춘 글이라기 보다는 '책을 읽다가 오솔길로 새버린' 듯한, 그리고 때로는 오솔길을 거닐다가 문득 생각난 책의 세계로 쏙 들어온 듯한 이야기들입니다. 책이야기라기 보다는 책을 핑계로 한 자신의 생각과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더 그럴듯해 보일 것 같습니다. 3부 그리움을 위하여에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살아있을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에 부친 추모의 글과 토지라는 커다란 유산을 우리에게 남긴 작가 박경리 선생에 대한 추도사, 철없이 명문대생이라는 허영에 들떠 있던 미군 PX 위탁매장의 점원시절 만났던 박수근 화백과의 만남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며 쓴 박수근 화백에 대한 추모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 글들은 그들이 묵묵히 만들어냈던 큰 그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미처 다 알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그들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끼친 풍성함이 얼마나 큰 감사의 제목이었는지를 새롭게 새기게 해 줍니다.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저자의 이 고백은 어느 날 갑자기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았을 때 손끝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이야기라기 보다는, 삶의 무게가 켜켜이 쌓이는 동안, 그리고 그 긴 시간동안 자신의 삶을 간간히 되돌아보았던 순간마다 마음 속에서 잔잔히 우러나오던 자연스러웠던 감정의 고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묵묵히 짊어지고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고백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인생의 선택의 순간에 용기를 내지 못했던 기억, 주변 환경에 의해서 가보고 싶었지만 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길, 젊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알고서도 나이를 핑계로 뒤로 미루기만 했던 꿈에 대한 회한(?) 등은 각각의 모양은 다를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한 구석에 고이 간직하며 살고 있는 것들일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이 훨씬 초라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가는 길목에서 요령을 피우지 않고 묵묵히 살아낸 삶의 열매들이 현재의 우리 자신과 가정, 그리고 우리 사회를 이만큼 풍요롭게 이룬 자산이 되었고, 지난 날의 삶의 이야기가 투박해 보이기는 하지만 겉만 번지르하게 변해가는 현실의 삶에 대해서 따끔한 가르침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비록 꿈에 비해서는 초라해 보일지라도 각자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보낼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여전히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 남기는 하겠지만, 그 아쉬움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이 아직도 꿈을 꾸고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성실히 살고 있다는 희망의 다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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