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 스토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11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모름지기 어떤 책이든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면 읽어낸 이에게 저자가 자신의 책을 통해 무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한 부분 -실제 내용이든, 아니면 단촐한 느낌이라도-을 남겨 조그마한 경의라도 표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가끔씩은 다 읽고 나서도 그냥 백지장처럼 아무것도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아무런 흔적도 남겨지지 않는 책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르 끌레지오의 <조서>가 그랬고, 아득한 학생 시절에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그리고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등이 그랬던 기억입니다. 분명 읽었는데, 때로는 열심히 밑줄을 그어보기도 하였는데, 머릿속에는 그저 몇가지 단어만 맴돌뿐, 하얀 백지장 위에 아무것도 쓸말을 찾지 못하였던 책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내 삶의 순간순간에 나타나곤 하면서 무언가 강렬함을 또는 거기에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회상을 가지게 만들던 책들...... 그리고 오늘 또 다시 그런 종류의 책을 이리 만나서, 앞에 놓아두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기억되는 독일의 통일 후에, 흡수당한 동독의 한 작은 도시 사람들의 이야기.... 책소개를 보면서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들보다 훨씬 더 그럴듯한 갈등과 감동과 스릴을 기대하였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통일의 과정에서 생겨난 혼란과 갈등 그리고 그것들을 헤쳐나가는 멋진 사람들 또는 낙오자들..... 소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런 식의 이야기들과 그런 식의 스토리의 전개를 기대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이야기' 속에는 내가 생각하던 그런 익숙한 것들은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너무 단순해서...... 아니면, 역설적으로 너무 복잡스러워서...... 아마도 둘다라고 해야 할 것 같기는 합니다. 형식은 너무 단순하지만 서로 얽힌 사람들과 그들의 삶,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저자 나름의 의도 등은 평범하게 다가선 독자에게는 너무도 불친절하고 퉁명스럽게 느껴집니다. 책속의 사람들, 그리고 책을 쓴 이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리 우둔한 독자를 만난 저자의 운없음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9편의 짧은 이야기들 속에는 통일을 맞이한 후의 동독의 한 작은 도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위조여권을 만들어 이탈리아로 몰래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부터 시작하여, 새 화폐에 적응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 변화된 사회에 흡수되지 못하고 낙오자가 되고, 가정이 무너진 사람들, 든든한 직장에서 밀려나 변변한 직장을 얻지 못하고 사회의 한 구석을 배회하는 사람들.... 소설 속에서 누군가는 죽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별을 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기도, 외로움에 눈물을 쏟기도 하는데, 그 누군가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또 서로 이리저리 얽혀서 서로의 삶의 부분들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한데 저자는 그러한 삶들을 29편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 둘 그려나가지만, 서로 어떤 연관이 있을 듯 하여 조바심을 가지고 읽어보더라도 결국은 서로가 무심하게 덧붙여진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곤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얽혀 살아가고 있지만,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상호관계를 이루며 지역사회를 구성하고 있지만, 결국 개개의 이야기들은 거기에 언급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나 생각일 뿐, 좀 더 그럴듯하게 이웃에게 전달되거나 다른 이야기와 어울려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일관성을 유지하지도 못하고, 파편화되어 버리는 느낌입니다. 통일 후에 이 작은 작은 도시에 경제와 문화, 각종 법률과 제도 등의 급속한 변화가 생기고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변화의 조류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었을 법 한데도, 소설속의 이야기들은 그리 격렬하게 흐르지 못하고, 등장하는 인물 각 개인의 삶과 경험에 한정되어 이야기될 뿐입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겐 그러한 변화라는 것이 결국은 모습은 다르지만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하루하루의 삶의 연속이었을 뿐이라는 듯이 말입니다...... 

 책소개에 보면 귄터 그라스는 저자를 '새로 등장한 진정한 이야기꾼'으로, 그리고 <슈피겔>은 이 소설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새로운 스타일의 통일소설'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책을 마저 다 읽기 전까지는 '새로운 이야기꾼'이라거나 '새로운 스타일'이라는 말의 의미를 미처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리 말한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가 격동하는 시대의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그러한 변화를 겪어냈을 사람들에 대한 너무나도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낸 이 소설이, 한편으로는 우리 삶이 가지고 있는 모습에 대한 너무나도 섬뜩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용에 대해서, 그리고 저자가 말하려는 것들에 대해서는 하얀 부분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고, 책 제목을 단순하다고 속인(?)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려면 4차원(?) 독자가 되든지, 아니면 저자의 말처럼 '물방울 속에서 세상을 보는' 법이라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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