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남들이 읽고 좋다고 떠들고, 연말을 맞아서 여기저기서 올해의 책을 선정한다며 떠들썩 한 가운데 앞자리에 이름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서도 꿈쩍하지 않던 마음이 어느 날인가 동하였습니다. 이전에 저자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라는 책을 접한 적이 있고, 자신의 글속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슬며시 잡아끄는 매력을 느꼈던 적이 있지만, 결국 투병생활을 접고 고인이 되어버린 저자를 생각하면서 왠지 손이 쉽게 가지 않았는데, 어느 날 한 카페의 올해의 좋은 책으로 소개되는 것을 보고서는 문득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뒤로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아는 사람과 서로 좋은 책을 교환하자는 약속을 하고서는 결국 이 책을 내 손에 들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환할 책으로 이 책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에서..... 

 .... 그래서 나는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으로 제목을 정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적을 원한다. 암에 걸리면 죽을 확률이 더 크고, 확률에 위배되는 것이 기적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나, 비가 되고 싶다'를 제목으로 추천한 독자처럼 나의 독자들과 삶의 기적을 나누고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고, 나는 지금 내 생활에서 그것이 진정 기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난 이 책이 오롯이 기적의 책이 되었으면 한다. - p10-11, 프롤로그 

 장애와 암투병, 이 두가지 만으로도 저자의 삶은 우리에게 특별한 모습으로 각인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되고, 저자도 자신의 글에 그런 생각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글에서 묻어나는 향기는 그러한 특별한 모습에서 풍기는 것이 아님을 느낍니다. 차라리 그러한 특별한 모습속에 담겨 있는 평범함들, 그리고 솔직함, 사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긍정과 희망의 끈을 버리지 않고 삶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서 즐거워 하는 모습 등..... 모든 사람들이 살면서 느끼는 희노애락을 고스란히 자신의 글에 녹여내어 그러한 하루하루가 기적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과 진솔함이 저자의 글속에 담긴 향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는지......  

 맞다. 지난 3년간 내가 살아온 나날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짐이 무거워서 어떻게 살까 늘 노심초사했고 고통의 나날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잘 이겨냈다. 그리고 이제 그런 내공의 힘으로 더욱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내 옆을 지켜 주는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만난 독자들과 같은 배를 타고 삶의 그 많은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p128

 저자는 '오늘이라는 가능성'이라는 글에서 자신에게 있었던 유방 종양의 검진을 위해 겪었던 기다림과 고통, 외로움 등을 이야기하며, 조직 검사 결과는 양성이었다고 적었습니다. 물론 2001년 12월호 샘터에 실었던 글의 내용이지만, 실제는 악성종양으로 판정되어 지난한 치료과정을 시작하던 당시 자신이 암에 걸리고 다른사람들의 동정의 대상이 된 것에 대해 자존심이 무척 상했던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이라는 시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저자는 그리 시작했던 암투병에서 돌아오면서는 아름다운 기적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독자들과 삶의 더 많은 기쁨을 누리려 한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에라, 그냥 장영희가 좋다. 촌스럽고 분위기 없으면 어떤가. 부르기 좋고 친근감 주고, 무엇보다 이젠 장영희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 없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말한다. "이름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것은 그 어떤 이름으로라도 여전히 향기로울 것을." 맞다. 향기 없는 이름이 아니라 향기 없는 사람이 문제다. p187

 아마도 저자는 스스로의 향기를 '부르기 좋고, 친근감 주고, 무엇보다도 장영희'라고 말할 때, 사람들이 기억해 주는 자신의 삶 자체라고 생각했던 듯 합니다. 아니 그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향기가 무엇이고 어떤 향기를 뿜어낼 것인가를 의식하지 않고, 어려움을 헤치고 당당하게 나서서 함께 기쁨을 누리자고 격려하며 아무런 거리낌없이 사람들과 친근하게,그리고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낸 결과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단지 이름에 향기없음을 서러워하는 가식적인 삶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소중히 다루고 정성껏 살아가고자 하였던 모습 말입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읽은 헨리 제임스의 <미국인>이라는 책의 앞부분에는, 한 남자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라고 표현한 문장이 있다.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 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것이다, 라고. ..... 그래서 그런지 돌이켜 보면 내 삶은 요란한 발자국 소리에 좋은 운명, 나쁜 운명이 모조리 다 깨어나 마구 뒤섞인 혼동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흑백을 가리듯 '좋은' 운명과 '나쁜' 운명을 가리기는 참 힘들다. 좋은 일이 나쁜 일로 이어지는가 하면 나쁜 일은 다시 좋은 일로 이어지고..... 끝없이 이어지는 운명행진곡 속에 나는 그래도 참 용감하고 의연하게 살아왔다. .........     그때 나는 대답했다. 아니 비참하지 않다고. 밑져야 본전이라고.....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이 분명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그 말은 어쩌면 그 학생보다는 나를 향해 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여전히 그 위대한 힘을 믿고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린다. -p232, 235, 에필로그 

 암이 간으로 전이되었다는 진단을 받고 자신의 싸움터, 병원으로 돌아와 있다는 저자는 살금살금 조심조심 삶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는데, 큰 발자국 소리를 내며 걸어서 다시 나쁜 운명이 깨어난 모양이라고 말하며 치료 과정에서의 고통을 되새기지만, 또한 새봄을 맞고, 이전처럼 병을 훌훌 털어내고 의연하게 사람들 앞에 나서서 삶의 기쁨을 나누고자하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 그러나 이왕 덤인 김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덤이 아니라, 없어도 좋으나 있으니 더 좋은 덤이 되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입 아프게 말해도 이 모든 것은 절대로 말이나 글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짜 몸으로 살아 내야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먼 훗날, 내가 이 땅에 사라진 어느 가을날, 내 제자나 이 책의 독자 중 한명이 나보다 조금 빨리 가슴에 휑한 바람 한 줄기를 느끼면서 "내가 살아 보니까 그때 장영희 말이 맞더라"라고 말하면, 그거야말로 내가 덤으로 이 땅에 다녀간 작은 보람이 아닐까. -p121

 저자가 자신이 기다리던 새봄에 고인이 되어 이젠 독자들 곁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 순간, 저자가 더 이상 '살아갈 기적'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들려줄 수 없게 된 순간부터 아마도 저자가 말한 살아온 기적과 살아갈 기적이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저자의 바람대로 '내가 살아 보니까 그때 장영희 말이 맞더라'라고 고백하며, 여전히 살아있는 그녀의 향기를 삶속에 간직하며 앞으로 살아갈 날의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까지는 장영희라는 사람의 이야기였지만, 이제부터는 나와 우리들이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 이야기를 멋지게 써내려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