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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환자와 인간에게서 멀어진 의사를 위하여
에릭 J. 카셀 지음, 강신익 옮김 / 들녘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의료의 비인간화', 실제로 의료의 본질이 질병을 앓는 환자와 그 질병에 대한 치료를 위해 노력하는 의료인과의 인간관계에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기에 의료의 비인간화라는 말에서 미묘한 모순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질병의 진단과 치료과정이 비인간화 되어간다는 것이 이리 모순으로 느껴지지만, 실제로 현대의학이 발전할수록 그러한 염려는 더 커가는 듯 합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환자에게서 질병과 병원체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여 취급하고, 결국 각각의 질병을 포커스 삼아 해당 질환의 원인과 병리, 그리고 임상증상과 진행과정, 치료와 향후의 결과나 합병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를 축적하는데 성공한 현대의학은 많은 질병을 성공적으로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초래된 필연적인 문제가 곧 '의료의 비인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자의 삶과 환경, 인격 등은 철저히 무시되고 환자가 지닌 질병에 대한 것만이 의료인들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버린 결과, 결국 고유한 특성을 지닌 한 개체로서의 환자의 정체성은 무시되어버리고, 물질론적인 관점에서 분해되고 해석된 육체와 질병만이 관심의 대상으로 남겨집니다. 그리고 의사도 간호사도 또한 여러 의료인들은 환자 자신보다는 그가 가지고 있는 질병이 우선적인 관심사일 뿐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병원에서는 환자의 눈물과 아픔, 두려움과 분노, 좌절감과 고립감 등은 무시해도 좋을 부수적인 것들도 취급되기 일쑤입니다. 환자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고통받는 그 환자가 감정을 지닌 한 인간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서 현대의학은 너무 멀어졌고, 지금도 질병과 그 질병을 찾아내기 위하 테크놀러지, 질병을 박멸하기 위한 치료법에 이르기까지 현대의학의 주된 관심사와 노력들은 그러한 간극을 더 넓히는 쪽으로 내달리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통의 본질과 의학의 목적'이라는 책의 부제와 '고통받는 환자와 인간에게서 멀어진 의사를 위하여'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이 책은 이러한 의료의 비인간화에 대한 우려의 눈길을 표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근원적인 의료의 본질과 환자-의사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간단히 표현하면 현대 의학이 중시하는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의료행위가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풀려고 하는 문제를 제시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임상의사들은 특정한 환자는 특정한 환경에서 특별한 시간에 치료하며, 따라서 그들은 그 개인과 시간에 대한 개별적 정보를 필요로 한다는, 잘 알려진 사실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들리는 이야기지만, 결국 질병으로 인한 고통의 중심점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환자가 있고, 질병으로 인한 고통은 단순히 육체에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자체에게 가해진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고, 또한 그러한 이해를 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그 의사가 대하는 환자의 병의 진행에까지 지대한 영향이 미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객관성과 과학적인 관찰, 물질론적인 관점에서 의사들이 환자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 환자의 질병상태와 신체적 기능 이상에만 간심을 가짐으로써 결국을 환자를 소외시켜버리는 것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현대의학이 잃어가고 있는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 감정을 가지고, 고통과 절망, 자기 자신과의 갈등 및 고통에 따르는 외로움을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환자를 본래의 위치로 복구시켜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주장을 담은 이책은, 실질적으로는 의료현장에 서있는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종사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고, 스스로 지나온 길을 반추할 수 있는 여유를 주고, 또한 자신들이 대하고 있는 질병과 환자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의료행위의 본질에 대해서, 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이 한권의 책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겟지만, 이 책이 많은 의료인들에게 읽혀서, 병원에 가면 가슴이 따뜻한 의사, 환자의 눈빛을 이해해주는 간호사, 그리고 고통 당하는 환자의 손을 따뜻하게 붙잡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좀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