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철학자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김모세.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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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대심문관)은 죄수(예수)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쓰리고 무서운 말이라도 상관없었다. 갑자기 죄수는 침묵 속에서 노인에게 다가와서는 그의 핏기 없는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입술도 떨리고 있었다. 노인은 문으로 다가가 그것을 열어젖히고는 말했다. "가버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마... 다시는 말이야!" 그리고 그는 죄수가 도시의 어둠 속으로 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편에 나오는 이 장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당한 이후 현재까지 여전히 그 분을 십자가상에 다시 못박히게 만드는 종교인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2000여년전 그의 가르침에 열광했던 군중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휩쓸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고, 메시야를 그리도 갈망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냉정하게 그를 십자가상으로 보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하지만 더 아이러니 한 것은 그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고백하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신자들마저도 2000여년 동안 당시의 유대인인이나 종교지도자들이 행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대심문관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지 않을는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카톨릭이나 기독교의 모든 모습이 그러하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결국 종교화 되고 의식화 되어버린 종교는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 합니다.

 신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이 행해지고 박해가 이루어지는 곳에 나타난 예수님을 감옥에 가둔 노회한 대심문관은 눈앞의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깨우치고자 하는 사람들이란 예수님이 가르친 자유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보다는 기적과 권위와 신비로 포장된 교회가 제공하는 평안에 몸을 맡기고 기꺼이 자유를 저당잡히고자 하는 존재들일 뿐이며, 그들을 위해 자신들이 만들어낸 교회라는 제도 속에서 제공되는 안전이, 사람들에게 자유로움에 대한 꿈과 함께 두려움이라는 짐마저 함께 지도록 만드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훨씬 정당하고 적절하게 어울린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쳤던 그러한 자유보다는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기적과 신비, 권위라는 근간위에 세워진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양도하고 그 안에서 오히려 평안함을 느끼는 군중들과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인도하지만, 결국은 껍데기만 남은 종교가 진짜 예수님을 거부하는 모습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힐난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현재의 종교인들에게도 유효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책의 마지막에 저자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가에서의 만남을 소개합니다. 프롤로그의 대심문관이 말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람들을 그리도 당혹스럽게 했던 예수님이 가르치고자했던 자유가 무엇인지를 좀더 명확하게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준 첫번째 가르침은 사랑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 가르침은 영적인 삶의 내재화와 인식의 자유에 관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인의 결혼생활에 대한 언급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냈다는 것으로 연결되며. 결국 예수님이 '인간의 마음속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자의 사랑을 주러 온 자' 즉 그리스도라는 점진적인 드러냄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에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는 종교적인 편견위에 자리잡은 신성한 장소, 과거에 얽매인 종교적인 시간, 성스러운 것과 불순한 것의 종교적인 구분, 그리고 하나님을 자신의 민족만을 위하는 신으로 이해하는 시각에 대한 전복을 통해서, 기존의 종교가 가지고 있던 형식적이고 외적인 것들에 대한 기득권을 해체하고 영적인 삶과 내적인 자유에 대한 깨우침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하는 자유란 '...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유, 너무나 쉽게 충동에 휩쓸리게 하는 자유, 타인들을 지배할 수 있는 그런 헛된 자유가 아니라.... 우리를 타인들에 대해 실제적으로 자율적이며 책임을 갖도록 만드는 내적인 자유이고.... 이러한 자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충만하게 실현되며.... 이 관계가 인간을 예속하는 것이 아닌....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고, '바로 진리가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나아가 그리스도가 자유롭게 한다' 것과 연관지어 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프롤로그의 대심문관 이야기와 에필로그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속에 담긴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가 책의 그 사이를 채우고 있습니다. 역사속에 기록된 예수, 평등과 개인의 자유, 여성의 해방, 사회정의, 비폭력과 용서 등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윤리와 예수님의 영성에 대한 고찰, 예수의 가르침이 하나의 종교로서 확립되어가는 과정, 박해받던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중세의 막강한 권력에 취해가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껍데기만 남기고 배반했던 사실들, 그리고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시작된 휴머니즘을 통한 그리스도의 정신의 부활, 탈종교화를 걷는 휴머니즘과 근대화의 과정 속에 형식은 지워졌지만 여러가지 형태의 내용으로 남아 있는 그리스도의 흔적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자가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대심문관 이야기와 명백히 대조되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속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명확한 자각일 듯 합니다. 단지 종교화된 형식과 마음으로 후딱 읽어 치우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행간에 담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깨우침, 즉 그리스도의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가르침에 대한 각성과 그러한 처음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린 마음에 대한 이야기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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