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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
허균 지음, 김탁환 엮음, 백범영 그림 / 민음사 / 2009년 1월
평점 :
'홍길동전'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무릇 학교 교육을 어느 정도 받은 사람치고 이러저러한 사설 몇 마디쯤을 덧붙이지 못할 이가 없을 것입니다. 최초의 한글소설 -'설공찬전'의 발견으로 그러한 표현에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내용이 가지는 시대상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과 한 영웅으로서의 대장부의 꿈을 이루는 대목까지, 많은 것들이 그러한 사설의 이야기거리로 사용될 것입니다. 누구나 춘향전이나 흥부전, 심청전 등과 함께 그 내용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소중한 문학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 내용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을 심술궂게 스스로에게 되물어보면, 그렇게 잘 안다고 생각하던 홍길동전의 이야기는 초등학교 -예전의 국민학교- 어느 시절엔가 읽고 끝내서 기실은 깊이 되새김질하고 묵혀볼 기회가 없었던 듯 하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럴 듯한 내용들은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의 결과로 각인된 우리사회가 말하는 견해의 압축이었다는 씁쓸한(?) 진실에 다다르게 됩니다. 정말로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 착각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좀더 진실에 가까운 고백일 것 같습니다. 여러 경로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대강의 줄거리와 학교에서 반복되는 시험을 위해 암기하던 내용들에 익숙해져서 잘 안다고 생각하였지, 진실로 그 내용에 대해서 원문을 충실하게 읽고 스스로 묵혀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있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는 말이지요.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되니 문득 손에 들린 이 책이 반가워집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소중한 보물을 다시 찾게 된듯이 말입니다.
책을 손에 들면서 너무도 익숙하게 된 줄거리와 주제에 대한 각인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이미 끝을 짐작하게 방해해 버리는데, 그러한 도식적인 책읽기를 벗어나 어떻게 내 나름대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지만 그리 뾰족한 묘안이 생기질 않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초등학생인 아이를 위해 고르던 우리 고전 목록에 올라있던 책이었다는 생각에, 지금으로 치면 아이들 동화책과 다름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이 더해져, 마음 한 구석에서는 어른도 진지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방해를 뒤로 물리치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가다보니, 우선은 내 자신이 제대로 알지 못하였던 세밀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흥미를 돋웁니다. 그리고 지은이가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읽노라면, 내가 배웠던-앞에서 각인된 지식이라고 말했던- 내용들이 어떤 연유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한 안목(?)과 이해가 또렷이 생기게 되고, 의외로 그러한 지식의 되살아남이 즐거움이 되기도 합니다. 영화 '공공의 적 2'에서 검사 강철중이 거대한 악과 연계된 유착속에서 준법을 가장하여 자신의 의지를 꺽으려고 달려드는 정관계의 회유와 압력의 부당함을 지적하기 위해서 홍길동전의 그 유명한 대사인 '..... (다만 평생 서러운 것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이니,).....'를 인용하여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듯이,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담겨있던 적서의 엄격한 구별이라는 사회구조적인 차별과 그 안에서 생겨나는 모순과 아픔에 대한 이의제기가 아마도 지은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덧붙여 탐관오리들에 대한 응징이나 해인사 보물 탈취 등을 통해 무능하고 부패했던 사회 지도층에 대한 따끔한 일침과 고발도 지은이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던 주제일 것 같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각인된 지식들과 겹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다만 현대인의 시각에서 살펴본다면, 지은이가 당시 사회의 모순과 부패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 낸 홍길동이라는 인물이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에 있는 그런 인물이 아닌, 특별한 태몽이라는 하늘의 선택에 의해서 태어난 특별히 뛰어난 인물이며, 사람이 부릴 수 있는 능력 이상을 지닌 인물로서 그려진 영웅이라는 점이나 그가 기존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고 부정하면서도 그 울타리를 허물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병조판서라는 벼슬을 통해서 기존의 질서안에서 자신의 한을 푼 것으로 만족한 것, 조선이라는 공간과는 떨어진 율도국에 자신만의 이상향을 건설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향의 체제도 기존의 자신에게 모순과 차별을 안겨주었던 사회제도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 등은 홍길동전이 지닌 시대적인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또한 내용과 별개로 민음사판 '홍길동전'을 통해서 맛볼 수 있는 재미 중 하나는 좀더 유려한 표현과 세밀한 묘사를 담은 완판 36장본과 단순하고 간결한 문체가 좀더 힘을 느끼게 만드는 경판 24장본이 함께 실려 있어서, 판본에 따른 이야기의 고유한 색감과 내용상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완판 36장본의 영인본이 실려있어 활자본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재미도 있습니다. 홍길동전은 본래 필사본으로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다가 인기를 얻게되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하기 위해서 활자본(이 책에 실린 경판과 완판)으로 새겨졌고, 그러한 과정에서 내용의 축약이 생겼다고 하니,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비단 홍길동전이 지닌 사회상에 대한 비판의식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판본과 그 차이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면, 또다른 우리 고전에 대한 사랑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도 가져봅니다-참고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재미있다 우리고전 시리즈'의 홍길동전은 필사본 중 하나을 원본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또한 지금까지 교육과정을 통해서 배운 홍길동전에 담긴 주제의식을 넘어서, 지은이가 홍길동이라는 인물과 율도국이라는 이상향을 통해서 독자에게 말하고자 한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과 비전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다면, 현 우리 시대상에 비추어 우리사회가 가진 모순과 억압 등을 고민하고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꿈을 키워갈 수 있는 보다 진일보한 어른스런(?) 고전 읽기의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