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기억을 쫓는 남자
알렉산드르 R. 루리야 지음, 한미선 옮김 / 도솔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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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하지만 다른 젊은이들처럼 부푼 꿈을 안고 살던 청년, 과학기술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멋진 프로젝트와 직장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던 청년 자세츠키. 이 이야기는 청년 자세츠키가 2차대전의 포화에 휩쓸려 참전하고, 독일군과의 한 전투에서 총에 맞아 두개골이 깨지고 좌측 두정부쪽으로 총알이 파고들어 좌측 두정후두부를 손상당한 뒤에 겪은 기억상실과 실어증으로 인한 고난과 회복을 위한 부단한 시도와 노력을 담을 기록입니다. 자세츠키는 부상후에 온전히 읽지도 쓰지도 말을 하지도 못하였지만, 남아 있는 자신의 능력으로 그러한 상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며 -물론 완전한 의미에서의 회복은 아닙니다- 25년에 걸쳐 3000여쪽의 기록을 하였고, 그의 주치의였던 루리야 박사가 그의 일기를 바탕으로 그의 노력을 재구성하고 거기에 그러한 증상이나 상황이 의미하는 바를 덧붙여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한편의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입니다.

 책의 내용이 비록 실화와 실제 기록을 바탕으로 씌여졌고, 환자의 병력을 기록한 투병기록으로서의 의미도 강하게 담겨있지만, 이 책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접근방식은 아마 한편의 소설처럼 총상으로 인한 부상에 의해 기억상실과 실어증이 발생한 한 청년의, 인간다워지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투쟁을 담은 기록이라고 생각하고 읽는 방법일 듯 합니다. 내용이 시간과 의미의 전개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고, 기억상실과 실어증이라는 의학 분야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전문적인 용어나 해설을 배제한 증례로서의 이야기 형식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프로이드의 저작들을 읽을 때 등장하는 증례에 대한 보고와 이에 대한 해석이라는 형식과 비슷한 형식이라서 낯설은 방식도 아니구요. 물론 쉽게 읽힐 수 있는 소설류와 비슷하게 취급하더라도, 내용에 대한 포인트를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와 반응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다. 책의 말미에 루리아 박사가 에필로그 형식으로 쓴 '전쟁이 없다면......'의 내용처럼 전쟁으로 인해 철저히 파괴된 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전쟁에 대한 신랄한 고발을 외칠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순수한 의학적인 입장에서 자세츠키의 증상을 분석하여, 그의 상실과 뇌의 특별한 부분의 연관성을 하나씩 되짚어 나가는 학구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겠지요. 한편으로는 절망하지 않고 기어이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상실했던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고 이해하고자, 반복되는 실패에도 괘념치않고 꾸준히 노력해가는 인간승리에 대한 감동을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몇가지 다른 감상 포인트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으며 집중하게 되는 부분은, 기억의 상실과 그것의 회복을 위한 과정에서 어렴풋이 그려지는 기억의 비밀과 의미, 그리고 인간답다고 인정되는 인간성을 구성하는 기본단위 역할을 하는 기억의 실체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입니다. 사람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게 해주는 것들에 대한 것들로 언급되는 것이 언어와 문자, 도구와 문화 등이 있는데, 그러한 것들의 바탕에는 인간의 뇌에 새겨진 기억능력과 언어능력 등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자세츠키의 투쟁을 보며 새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뇌과학 및 뇌영상에 대한 분야도 진보를 이루어, 단순한 해부학적인 구조를 넘어서 뇌에서의 여러가지 물질들의 역할에 대한 규명, 사람의 다양한 상태에서 반응하고 활성화되는 뇌부위의 촬영 및 활성정도의 측정, 뇌신경망의 연구를 통한 인공지능의 개발 등 여러 획기적인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아직도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이 옳은 말이겠지만, 적어도 자세츠키가 25년에 걸친 투쟁을 거치며 자신의 상태에 대한 기록을 남긴 시대에 비하면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옳겠지요. 이러한 면에서의 이 책의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바로 뇌과학이 아직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시기에 증상의 기록과 분석을 통해 환자의 뇌손상 부위와 기억 상실 및 언어능력 상실에 대한 성실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과, 읽는 이로 하여금 그러한 것들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할 만한 구석을 남겨주는 부분이 그 중 하나에 해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단순한 루리야 박사의 임상관찰 기록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의사의 눈으로 관찰한 무미건조한 환자의 증상과 손상의 나열로 끝나버렸을 수 있었을테지만, 환자 자신의 느낌과 감정이 담긴 잃어버린 기억과 언어능력의 회복을 위한 투쟁과 고뇌가 고스란히 환자 자신의 손으로 기록되고 그것이 전문가인 루리아 박사의 지식을 통해 설명되고 있기에, 기억과 언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사람됨에 대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기억과 언어에서 한단계 진보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것을 상실한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체험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사람이 말을 이해하고 말을 한다는 것, 그리고 어떠한 것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기억해 낸다는 것이 어떠한 과정을 거치고 그 하나하나의 과정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 과정의 하나하나의 상실이 인간의 삶에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수 있으리라는 점도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한 사람의 삶을 향한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고, 또한 뇌가 손상당한 환자의 임상경과에 대한 기록 및 해석이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딱딱한 의학지식을 담는 방식에 대한 또 다른 시도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책에서는 이것을 고전적인 방법과 낭만적인 방식이라는 말로 구분하였습니다. 한 뇌손상 환자의 25년간의 절망과 승리(?)를 담은, 그리고 정작 기초가 되는 일기를 적은 자세츠키 본인은 끝나지 않은 나의 싸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많은 이들이 서로 다른 느낌과 시각으로 읽게 되고 평가하겠지만, 내게는 기억이라는 것의 실체와 의미,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인간답다는 것의 바탕을 이루는 기억이라는 뇌의 기능 각 부분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큰 의미를 남겨 준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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