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도둑 - 한 공부꾼의 자기 이야기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입시에서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왔던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우스개 소리가 한창 유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대입에서 수석을 한 학생들 대부분은 방송 인터뷰에서는 '과외는 하지 않았구요, 학교 수업을 충실히 받고,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를 했습니다'라는 식의 언급이 빠지지 않곤 합니다. 진실인지 약간의 거짓을 보태 사회적인 불합리를 들추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부도둑'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이 책을 보면서 그런 정답같은 삶을 산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정말로 즐겁게 공부를 하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쉽게 쉽게 -실은 남들이 모르는 눈물과 노력이 있었겠지요- 자신의 학문에의 길을 닦아가고, 스스로가 자신만의 학문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정말 공부하는 것이 쉬운 사람, 교과서와 학교 수업만 가지고도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곧이 믿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문하는 사람, 다르게 말하면 공부꾼을 저자는 학문도둑이라고 표현합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학문의 보고에 들어가서 학문의 정수들만을 골라내고 자신의 것으로 삼아버리는 행위도 일종의 도둑질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공인되고 사람들이 권장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다른 일반적인 도둑질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자신이 훔친 학문으로 더 나은 지식을 생산해내고, 사람들을 위해 다시 창고에 쌓아두는 것이니, 더 풍요롭게 되는 도둑질이요, 훔쳐간다고 그 지식이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아니하고 아무리 나누어도 줄지 않는 것이니, 인류의 풍요와 발전을 위해서는 더더욱 권장하고 격려해야 할 일이겠지요. 이 책의 내용은 그런 보물창고에서 이것 저것 멋모르고 도둑질을 하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점점 자신에게 필요한 보물들만을 모으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효율적인 도둑질 과정을 거쳐, 자신에게 쌓인 보물들을 더 갈고 닦아서 자신의 향기가 담긴 새로운 보물을 쌓는 과정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 저기 보물창고를 뒤져서 모은 보물들을 통해서 이제는 자신만의 보물을 만들어 창고 한구석에 쌓아놓고, 야심만만한 다른 공부도둑이 들어와서 자신의 보물을 살펴보고 훔쳐갈 수도 있도록 공개적으로 도둑질을 권장하는 이야기입니다.

 공부도둑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저자의 5대조 할아버지와 관계된 호랑이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3세의 5대조 할아버지가 위독했던 아버지의 약을 호랑이의 도움으로 구해서 병이 완쾌되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인데, 가문의 흥망성쇠와 학문에서 아예 멀어져 버리는 과정의 시작을 가첩에 근거를 둔 자신의 5대조 할아버지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러한 조상에 대한 이야기는, 고조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를 거쳐 자신에게까지 이어져온 집안 분위기는, 자신의 9대조였던 여헌 장현광 -조선 중기의 대학자-의 직계로서의 격조 높은 학풍이 단절되고, 가통있는 집안에서 볼 수 있는 이렇다할 가풍을 유지하지 못하고 쓰러진 가풍의 부재 상태였고, 그러한 문제가 곧 자손들의 자녀교육에까지 그대로 미쳐 자신의 초기 공부하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가에 대한 반추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인 듯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상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서 저자 자신의 공부의 이력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국민(지금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육, 공사의 교관 생활을 거쳐 미국 유학과정까지 어디에서나 창고속에 감춰진 학문의 보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또한 그것들을 훨씬 빛나게 갈고 닦아내곤 하던 모습에 대한 이야기들인데, 쉽게 쉽게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 이면에 담긴 눈물과 노력은 읽는 이들이 감안을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실제 글을 읽다보면 이 사람은 정말 공부에 귀신같은 재주가 있거나, 뛰어난 선천적인 능력을 타고 난게 아닌가 하는 절망감(?) 비슷한 것을 느끼게 만들거든요.^^- 그리고 다음으로 자신이 대학에 돌아와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달에 손가락질 하며 달이라고 폼잡는 학자가 아니라 진정 달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느끼게 만들고 싶어하는 선생으로서의 길을 가고자 헌신하는 모습과 또한 자신의 학문세계를 통해서 새롭게 생명을 해석하고자 하는 노력과 결과물들을 스스럼없이 독자들에게 내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생명에 대한 낱생명, 온생명에 대한 개념은 조금 생소한 감은 있지만 참으로 인상적인 내용입니다. 우리가 기존에 파악하던 생명에 대한 개념에서 몇발짝 더 나아간 통찰력을 지닌 해석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그 이론의 잘잘못은 차치하고서 말입니다-. 또한 조상들이 이루었던 -저자의 경우는 자신의 9대조였던 여헌 장현광이 남겼던- 학문적 성취에 대해서도 의미를 두고 그 뜻을 이해하고 뿌리를 이으려는 학문적인 노력과 진보를 이야기한 대목도 있는데, 이 또한 서양학문에 빠져서 이제는 우리의 전통과 학문의 계승이 요원해져버린 현실에 대한, 그리고 우리 학문적, 문화적, 정신적 유산의 가치 대한 새로운 지평-즉 지식을 사물에 대한 경험을 담은 대물지식, 사람과 접하면서 생기는 대인지식, 자신의 삶자체가 요구하는 내적 경험을 표현하는 대생지식으로 나누고 서양학문의 경우 대물지식과 대인지식으로 분화하여 대생지식도 그것들에 흡수되어버리는 양상이지만, 동양학문의 경우는 대인지식과 대물지식이 대생지식의 형태로 통합되어 성공적인 삶, 사람다운 삶을 지향하는 학문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개념- 을 열어주고 있는 점은, 단순히 한 뛰어난 학자의 공부이야기를 뛰어넘어 학자로서 앎을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진정한 앎에 이르는 길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모범과 또한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자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공부도둑으로서 산다고 하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배운 것도 다 소화시키지 못하고 나자빠지는 좀도둑 수준에서 못벗어나는 듯합니다. 조그만 상자의 열쇠하나를 가지고 다 가진듯이 뻐기는 못난이도 있고, 맞지 않는 열쇠를 가지고 보물상자를 열려는 우둔한 이도 보이는 듯 하고, 또한 그러한 모습이 내가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격물도 중요하지만 치지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책속의 글처럼 진정한 앎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나마 좀도둑의 수준을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이요, 저자가  추구하는 학문의 길에 대해 귀기울여 듣는다면 학문의 보물창고를 드나드는 마스터키는 아니더라도, 작은 상자나 맞지 않는 열쇠를 가지고 낑낑거리는 못난 도둑은 되지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여하간에 자신의 삶을 통해 학문하는 이로서의 하나의 본을 보이고, 또한 그 안에서 얻은 즐거움과 자신이 얻은 보물들을 내놓고 작은 학문도둑들에게 기꺼이 선물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저자의 노력과 열매에 감사의 박수를 보내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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