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하나님 - 속 좁은 종교를 떠나 드넓은 하나님 품으로 달려가다
짐 팔머 지음, 정성묵 옮김 / 청림출판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교회안에, 신자들 안에 갇힌 하나님. 속좁은 종교에 대한 비판과 드넓은 하나님 품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진 이 책의 내용들을 보며, 많은 것들을 인정하지만, 또한 마음 한켠의 불편함이 느껴진다는 사실이 내게도 저자가 비판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식과 위선의 껍데기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는 고백에 이르게 합니다. 내 안에, 내가 다니는 교회안에, 그리고 크게는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안에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애착과 고집이 교회밖의 사람들이나 교회에 나왔지만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할 만한 여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교회와 신앙인들 안에 갇혀 계신다는 생각을 충분히 갖게 만들수 있었을 테니까요. 적어도 교회나 그 안의 신자들이 자신들 안에 가두어 놓은 하나님을 자신들에게 뿐 아니라, 새로운 신자들이나 피전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다 보면 결과는 황소보다 자신이 크다고 허세를 부리다가 배가 터져버린 개구리 이야기와 비슷해 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그런 착각에 빠져있다면 말입니다.

 하나님 품안의 교회, 그리고 그 품안의 세상. 교회라는 공동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건물이나 천막 등의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더 근원적인 의미는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데 있을듯 합니다. 그런다면 교회가 하나님을 품은 것이 아닌 하나님이 교회를 품에 안으신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교회가 하나님의 한 영역 -물론 가장 소중한 영역-이라면 거기에 속하지 않은 다른 영역이 있는 거고, 이 책에서 이야기 하는 것들은 바로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았을 하나님의 사역과 영역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창세기 1장 1절은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교회와 교회밖의 세상 모든 것에, 그리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하나님이 고유한 특성을 부여하시고, 이 세상에 존재할 근거를 마련해 주셨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안에서 예배드리고, 기도드리고, 열심으로 봉사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직 교회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불신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미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가 되는건데, 저자가 비판하듯이 교회와 신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너무도 쉽게 망각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되돌아 보아야겠습니다. 정직하게 돌아보고 나면, 지은이가 말한 타이어 판매인에게도, 동성애자에게도, 사창가의 소녀에게도, 힙합을 즐기는 이에게도, 그리고 십일조를 내지 않고 있는 정비공에게도, 나의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임을, 때로 그들과 더 깊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기도 하시는 분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니까요.

  나를 포함한 모두의 하나님.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 내리는 결론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시고, 우리 교회의 하나님이시고, 또한 모든 믿는 이들의 하나님이시며, 아직 믿지않는 모든 이와 천지만물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그들 모두와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신다는 사실......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찾으셨고, 나를 찾으신 것처럼 그들 모두를 찾아나설 것이라는 사실도 함께.....

  하나님 -또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저자의 가슴 아픈 비판에 나같은 신자들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으며 스스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편에 서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신자들에게 '당신들의 모습속에서 바리새인과 레위인의 모습을 보았소'라고 말하는 저자에게 나는 무어라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스스로를 뒤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 답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깨어있는 모습에 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것은 시작이고 삶속에 온전히 나타나기까지는 성숙-행하지 못함에 대한 핑계같지만-의 과정이 필요하겠지요. 또는 저자가 말한대로 내가 뭐를 하려고 하는 그것마저 내려놓고 잠잠히 기다릴 수 있는 과정-훈련(?)-이 필요하기도 하겠지요.  

  우리는 모두 작은 예수, 그리고 믿음의 경주자들. 문득 저자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마음이 불편했던  하나의 이유를 더 발견하였습니다. 저자가 말한  주인공 대부분은 아직 신앙의 경주를 마치지 않았고, 그들의 신앙안에서의 -교회안에서가 아니라-  열매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 가운데 생긴 일종의 거부감을 형성한 듯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거부감은, 저자가 말한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삶의 태도 또는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인도의 손길을 불신하는 잘못된 자세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아직은 온전히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성화된 모습의 성도의 모습에 다다르지 못했을지라도 -이러한 모습은 나도 마찬가지지요^^- 세상에 예수님의 마음을 밝히는 작은 예수들이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믿음의 경주자들이라는 믿음의 눈으로 격려하는 자세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경주자는 상급을 바라고 앞만보고 경주하듯이, 나도 그리고 그들도 그런 경주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투덜거리는 중에도, 하나님은 어디선가 낮고 천하고 무시당하는 곳을 찾아다니시며 당신의 나라를 일구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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