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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이라고요, 곰! ㅣ 책꾸러기 5
프랭크 태슐린 지음, 위정현 옮김 / 계수나무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 바르고 분명한 사고력을 지닌 한 개인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계속 듣게 되었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이 이야기에서 '곰'은 거짓을 주장하는 다수의 힘에 영향을 받는 개인이나 국가를 상징한다. 거짓말을 계속 듣다 보면 나중에는 그것이 사실처럼 여겨져서, 자신이 원래 품고 있던 신념은 무너져 버린다. 곰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진리는 변하지 않듯, 결국 본래의 생각과 논리에 따라 거짓을 판단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1946년 저자 프랭크 태슐린이 이 작품에 "거짓 주장에 휘둘리지 않기"라는 제목으로 올린 작가의 말입니다. 작가가 직접 쓴 글이기에 아마도 다른 어떤 작품설명보다도 더 이 작품의 본질적인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뭔가 느낌을 주기는 하겠지만 작가의 의도가 정확히 전달되기에는 조금 난해한 문제일거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끝까지 자신이 곰임을 주장하지 못하고 공장의 노동자들과 동일하게 등을 보이고 기계를 다루는 일을 하게 되는 곰과, 곰을 곰이 아니라고 우기고 결국 다른 노동자들처럼 일을 하게 만드는 탁월한(?) 관리자들의 모습을 통해, 현대 문명의 기계 만능주의와 인간 소외를 날카롭게 풍자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를 연상하게 됩니다. 조금은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사람이 기계를 다루는 것이 아닌, 기계가 사람을 부리기 시작한 시대의 초입에서 사회의 변화를 겪었던 두 사람 사이에 문제의식의 한 끝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낙엽이 지고 기러기떼는 모두 남쪽으로 가버린 어느 겨울, 곰 한마리가 겨울잠을 자기 위해서 당연히 동굴로 들어가 몸을 눕힙니다. 그리 곰이 동굴안에서 깊은 잠에 빠진 겨울동안에 동굴밖은 숲의 나무가 베어지고 산이 깍여서 거대한 공장지역으로 변해 버립니다. 봄이 오고, 멋진 봄을 기대하며 공장 건물아래서 잠이 깨어 동굴입구 -공장의 지하실 문인듯-로 나온 곰에게 보인 것은 숲과 나무와 꽃은 사라져 버리고 대신 차갑게 서있는 콘크리트 건물과 연기를 내뿜는 굴뚝들입니다. 세상에서 완전히 낯선 존재가 되어버린 곰에게 이제부터는 그것을 확인하는 절차가 시작됩니다. 곰을 발견한 공장감독은 어서 일하러 가라고 재촉하지만 아직 곰은 자신이 곰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좀더 높은 분들 -자신의 직위만큼이나 방도 창문도 책상도 더 커지고, 전화기며 여비서들의 숫자도 늘어나게 되는- 에게 돌림빵을 당하며 곰처럼 꾸민 멍청이일 뿐임을 강요당합니다. 하지만 곰은 아직까지는 자신을 곰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곰은 동물원이나 서커스단에나 있는 거라는 걸 확인시키기 위해서 높은 분들은 곰을 그곳에 데려가서 다른 곰들과 대면시킵니다. '얘가 곰으로 보이니?' '아니요. 수염도 깍지 않고 털옷을 걸친 멍청이예요.' 결국 곰은 곰이 되지 못하고, 공장에 돌아와 노동자가 되어 기계를 돌리게 되었습니다. 수염도 깍지 않고 털옷을 걸친 멍청이로 말입니다....... 한데 공장이 폐쇄되고 노동자들이 뿔뿔히 흩어지고 곰은 뒤쳐져서 숲속에 남게 되고.....계절은 다시 겨울.... 그런데 동굴로 들아갈 듯하던 곰이 그대로 숲바닥에서 잠을 자네요..... 털옷을 걸친 멍청이로..... 하지만 추위와 외로움속에서 멍청이는 다시 동굴로 돌아가 예전의 곰, 아니 자신의 모습을 회복합니다. 털옷을 걸친 멍청이도, 멍청한 곰도 아닌 겨울이 되면 동굴로 들어가 동면을 취하는 본래의 곰으로 말입니다.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노동자들 틈에서 등을 돌리고 서서 기계를 돌리고 있는 곰이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이 나옵니다. 나는 곰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지만 결국은 무시당하고 노동자가 된 곰의 모습입니다. 아마도 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생산의 수단이 자연적인 것과 크게 괴리되지 않은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모습에서 기계와 다른 부수적인 발명품들에 의한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비인간화되는 시기로 넘어가던 격동의 시기였던 듯 합니다. 그러한 모습의 극적인 표현을 아마도 저자는 곰과 특색없는 노동자, 그리고 자동으로 돌아가는 기계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거대한 시대의 조류앞에서 각 개인은 힘없이 무너지고, 자신의 자리를 이내 잃어버리고, 그리 사는 것이 정상인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공장의 관리자들이나 동물원과 서커스단의 곰들은 외떨어져서 자신들과 다른 모습으로 나는 곰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곰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은게 당연하겠구요. 하지만 글의 말미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결국 곰이 본래의 곰으로 돌아가듯이 산업화되는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참된 자아를 찾고 정체성을 회복할 것이라는 믿음 -또는 그렇게 되어야한다는 소망- 을, 그리고 그리되기 위해서는 본래의 자신, 자연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야기 속의 곰은 겨울이 되어 다시 동면을 위한 굴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자연의 상태로 돌아감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회복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콘크리트 빌딩과 아스팔트 숲속에서 자동차 등을 이용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현대인들의 자아를 회복하는 방법과 모습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생깁니다. 이런 복잡스런 어른의 생각을 가지고 아이에게 이 책 어떻냐고 물으니까 아이의 하는 말이 "재미있어요."입니다. 그 뒤에 "왜?"라고 묻지는 않았습니다. 어차피 저자의 깊은 생각을 이해할려면 좀더 자라야 하겠고, 아이는 아이 나름의 감상이 있어서 그걸 즐겼을테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내가 이해한 것보다 더 많은 저자의 속삭임을 알아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일수도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아이에게 따로, 그리고 부모에게 따로, 각각의 재미와 성찰의 시간을 줄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