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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의 비밀일기
앨런 스트래튼 지음, 이장미 그림, 박슬라 옮김 / 한길사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읽기전에 이미 책내용의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생각보다 더 불편함을 느낀 듯 합니다. 아마도 읽은 부분보다 읽어야 할 부분이 더 적어질 때까지는 '아이들이 보는 책에 이리도 불편한 현실의 단면을 직설적으로 표현해야 할까? ' 하는 생각과 '내 아이에게는 이 책을 읽어보라고 먼저 권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무수히 하며 읽어 내렸으니까요. 그런다고 '예쁜 공주와 멋있는 왕자가 우아하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식의 이야기만을 아이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책을 반을 넘겨 읽을 때까지, 정확히 말하면 불량소녀 -이 말이 한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꼬리표 붙이기 일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선에서 표현한다면- 레슬리와 그의 남자 친구인, 있는집 아들 제이슨의 도를 넘어선 애정행각(?)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 부분들까지 읽으면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에 이런식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런 태도가 어른으로서의 세상의 어두운 면을 가리려는 가식이나 세상은 살만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뻔한 말을 지껄여 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아직 어린 자녀를 둔 마음으로는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으니까요.
10학년-우리나라 학제에서는 고1-인 레슬리는 이혼가정의 편모 아래서 자라는 여자아이입니다. 아버지와 주말에 만나곤 하지만 그 아버지에겐 새로운 여자가 생겨서 레슬리에게 큰 관심을 주지는 못하는 듯 하고, 어머니도 생활을 위해 일을 하며 레슬리에게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감을 주지는 못하는 듯 합니다. 물론 안정되지 못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레슬리의 모습도 많은 경우에 그렇듯이 모범생(?)의 모습에서 상당히 빗나가 있어 보입니다. 캐나다나 미국인들의 가치관이 우리와 많이 차이가 나고 더 개방적이기는 하겠지만 옷차림이나 땡땡이(?)로 인해 끊임없이 선생님들에게 지적을 당하고 벌을 받는 모습이 영락없는 불량소녀의 모습입니다. 그런 레슬리에게 부자집 도련님인 12학년의 제이슨이 백마를 탄 기사처럼 등장하면서 사건은 시작됩니다. 만나서부터 바로 시작된 불장난-육체적 접촉 = coitus-은 레슬리가 그레이엄 선생님의 수업시간에 쓰던 비밀일기에 그대로 기록되고, 읽지 않기로 약속된 일기는 선생님이 바뀌면서 세상에 알려지고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듯하던 연애소설은 반전을 맞이 합니다. 자신과 레슬리의 관계가 드러나면서부터 제이슨은 집요하게 레슬리를 괴롭히고 협박하고 결국은 목숨에 위협을 느끼게 끔 만들게 되고, 그 과정에서 레슬리는 친구 케이티의 도움으로 근근히 버텨가다가, 가출을 하고, 가게에서 먹을 것을 그냥 가지고 달아나다가 잡히고, 경찰들에게 넘겨진 후부터 레슬리에 대한 제이슨의 폭행, 강간, 협박 등의 사건이 법정으로까지 치닫게 됩니다. 결국 제이슨은 소년원에 보내지고 레슬리는 자신의 삶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고 한층 성숙한 모습으로 자라게 되구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읽는 동안 느꼈던 불편에 대한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레슬리가 그러한 신체적, 정서적인 어려움과 수치스러움 등을 이겨내고 힘을 가진자인 제이슨을 용감하게 법정으로 끌어내어 자신에게 가했던 성적폭행과 위협 등에 대한 단죄를 결심함으로써, 반복적으로 여자아이들에게 자행했던 성적폭행 등에 대한 잘못을 유야무야 덮어주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자 하는 용기를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일들이 발생했을 때 어찌 행동해야할 것인가와 그리하는 것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답을 아직 가치관이 바로 잡히지 못한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견해에 나도 찬성의 한표를 망설임없이 던지고자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것은 마음에 남겨진 불편함들입니다. 그래서 곰곰히 그것들을 들여다 봅니다. 먼저는 성적인 관계에 대한 표현과 묘사 -이야기되는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와 적나라하게 이야기되는 욕설들로 인한 불편감입니다. 고상한(?) 책에 그것도 아이들이 보아야할 건전한(?) 책에 도색잡지 수준은 아니지만 이리 직설적으로 표현되었다는데 대한 불편감이겠지요. 저자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불편감은 마지막까지 해소되지가 않습니다. 두번째는 비치볼 교장선생님이 처음 일기장의 내용을 보고서 취한 가식적이고 교활한 행위에 대한 불편감입니다. 사람사는 곳의 현실에 대한 너무도 적나라한 표현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학교의 선생님들이 좀더 교육자적이기를 바라는 순진함이 있어서일겝니다. 요즘 다시 스승의 날이 되어서 촌지문제가 뜨겁기는 하지만, 내 아이의 선생님만은 그런 잡음에서 자유로운 교육자적인 양심을 지닌 이기를 바라는 그런 순전함 말입니다. 세번째는 불편함이랄 것도 없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부모된 자로서는 반성해야 될 부분에 관한 것입니다. 이혼한 레슬리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으로부터 오는 불편함인데, 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식을 두고 자신들만의 행복을 먼저 추구하는 -특히 레슬리의 아버지- 모습으로 인한 것입니다. 현실이지만 아직까지는 부모가 그럴수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솔직히 말하고 싶지 않은 위선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자식에게는 끝까지 책임있는 부모로서의 모습이 우리 사회와 나의 아이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남는 불편감을 토로하는 것은 이 책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두 어린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로서, 아이들이 좀더 자란 미래를 보며 희망하는 모습과 너무 거리가 멀고 빗나간 모습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말한 얘기들은 분명 우리 사회에서도 어디선가는 반복되어 나타나는 어두운 현실일테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그런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도 분명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나의 아이에게 이 책을 들려주면서 읽어보라고 권하지는 못할 듯 합니다. 다만 어느 날, 나의 아이가 이 책을 읽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깨을 토닥여 준 다음, 약간의 어른의 가식이 섞인거지만, 이리 말해 줄 수는 있을 듯합니다. '네가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더 넓어질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어두운 면들도 있지만 여전히 세상은 살만하고 아름다운 면도 많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그리고 레슬리가 용감하게 법정에 나선 것처럼 네 삶에서 그런 용기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삶의 보석은 어두운 곳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거란다....'
많은 이들이 불편한 진실보다는 소중한 자신의 삶의 의미를 깨우치고, 레슬리의 용기를 배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