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좋은 어린이 책 <여름이 반짝>의 전문가 추천사입니다.


글 : 김지은(아동문학평론가)


빛을 묘사하는 휘황찬란한 낱말이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빛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말은 ‘반짝이다’가 아닐까. 빛은 혼자 차지하거나 금을 그어 나눠 가질 수 없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빛의 운명이다. 그러나 반짝반짝 작은 별은 숲길을 비추고 조그만 비상등은 어둠 속에도 출구가 있음을 보여 준다. 만약에 빛이 없다면, 모르는 한구석에 아직 사랑과 우정과 용기가 남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름이 반짝』은 빛과 같은 이야기다. 고개를 들면 무자비한 사건 제목이 가득하고 “하지 마라.”는 협박이 발 디딜 틈 없이 쿵쿵 떨어지는 세상이지만 이 책을 펼치면 마음이 푹 놓인다. 여기 좋은 친구들이 있으니 염려 말고 오라고 고요히 반짝인다. 어린이 독자는 하늘이 새파란 수국처럼 푸르게 빛나는 마을 들판을 달리며 유하, 린아, 지호, 사월이와 함께 모처럼 부드럽고 편안한 숨을 쉴 것이다. 이 작품에는 허위의 경쟁률만 번뜩이는 네온사인의 시대에 문학이 어린이에게 줄 수 있는 정직하고 온전한 격려가 담겨 있다.


아빠의 죽음 이후로 어떤 감정도 참기만 했던 린아는 외할머니 댁에 머무르다가 두 번째 죽음을 만난다. 짝꿍 유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비눗방울을 불며 내 숨이 하늘을 난다는 게 신기하다고, 이 숨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하던 장난꾸러기 유하는 거짓말처럼 곁에서 사라져 버렸다. 유하를 사이에 두고 린아에게 뾰족하게 굴던 과수원집 넷째 딸 사월이도, 유하와 함께 젖도 못 빠는 새끼 돼지 유리를 돌봤던 지호도 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데 비눗방울이 마법이라도 일으킨 걸까. 꼭 일곱 날마다 일곱 번, 저녁 7시 7분에 유하가 아이들 앞에 다시 나타난다. 세 아이들은 유하가 남겨 놓고 갔다는 반짝이는 물건 하나를 찾아 주기 위해서 한마음으로 여름을 보낸다. 아이들은 유하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는 어린이가 어린이를 구해 주는 장면이 되풀이해 등장한다. 유하는 린아를 세 번 구해 준다. 미친 소 정식이의 돌진으로부터, 피구할 때 달려드는 공으로부터 구해 주고 세상을 떠난 뒤에는 수백 개의 비눗방울이 되어 벌 떼로부터 린아를 구한다. 그리고 유하가 없는 세상에서 이제 린아를 구해 주는 건 새 친구 사월이다. 철봉에서 떨어지는 린아를 사월이가 받아 안고 사월이의 동생 태복이는 린아가 구해 낸다. 어린이들은 이승과 저승을 넘어 어린이와 탄탄하게 연대한다. 어른이 자신들을 구해 주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우리는 스스로 자라겠다.’는 당당한 선언을 남기는 것이다. 두려움과 한숨 말고 보태 준 것이 없는 오늘날의 어른들은 이처럼 해맑고 용감한 작품을 읽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약한 것의 강한 힘을 아는 사람이다. 작품에서 중요한 소재로 쓰인 비눗방울은 건드리는 대로 톡톡 터져 버리는 몹시 연약한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커다랗고 투명한 그물’이 될 수도 있는 놀라운 가능성의 존재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단정하고 결이 고운 문장도 마찬가지다. 지우개로 몇 번이나 지우면서 쓴 것같이 촘촘히 짜 넣은 문장 하나하나는 세상을 떠난 유하를 49일 동안이나 생생히 살렸고, 사월이의 감출 수 없는 건강한 매력을 보여 주었으며, 등 뒤에 가려질 뻔했던 지호의 묵직한 존재감을 지켜 주었다. 무엇보다 친구를 보내면서 비로소 아버지와도 제대로 된 이별을 하고 성장의 한 마디를 넘어가는 주인공 린아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그려 냈다. 주목할 만한 이야깃거리를 내세워 독자의 흥분을 먼저 공략하려 드는 작품들은 이 젊은 작가의 담담한 공력 앞에서 빛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여름이 반짝』은 왜 우리가 동화를 읽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대답을 들려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고 용감했으며 누구나 어린이이거나 어린이였다. 그런 좋은 세계는 먼빛처럼 아스라이 떠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알고 보면 우리 앞에 있다. 이 작품 속에는 아름다운 장면이 비눗방울처럼 많고 책을 덮고 나면 마음에 하나씩 내려와 앉는다. 정말 잊을 수 없는 것은 이렇게 연약한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화를 읽는다. 연약한 것들의 힘을 가슴에 오래 간직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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