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좋은 어린이 책 <삐꾸 래봉>의 전문가 추천사입니다.

 

글 : 김지은(아동문학평론가)

 

마영신은 숨 막히는 상황을 숨 막히도록 잘 그려내는 작가다. 도시 전체가 정전된 7일간을 담은 박효미의 동화 『블랙아웃』을 읽으면서 마영신의 일러스트가 아니었다면 작품 속 상황이 이만큼 먹먹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삐꾸 래봉』의 주요 인물 은철이도 그 동화책 속 아수라장 장면에 살짝 등장한다. 은철이는 거기가 아니라 어느 암담한 국면에서 오늘을 살고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아이다. 거슬러올라가면 그의 만화 『벨트 위 벨트 아래』에 나온 고등학생 박지수와 권별도 막다른 골목에서 갈 곳을 잃은 아이들이었다. 『삐꾸 래봉』의 래봉이와 동관이가 훗날 고등학생이 된다면 지수와 별이의 모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놓을수록 판이 어려워지는 바둑처럼 그의 인물들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구석으로, 더 비좁은 구석으로 몰린다. 어린 래봉이와 동관이와 은철이는 질식사할 것 같은 세계와 작은 몸뚱이로 맞서면서 하루를 겨우 살아간다. 작가는 그들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으며 그들과 두들겨 맞으면서 내내 함께 있다.


『삐꾸 래봉』은 《고래가 그랬어》에 인기리에 연재되었던 만화다. 주인공인 5학년 래봉이는 새끼손가락 하나가 옆으로 휘어서 ‘삐꾸’라고 불린다. 그러나 흔히 짐작하는 왕따의 조건과는 거리가 먼 아이다. 엄마가 일하러 나간 사이에 몸져누운 할머니의 밥상을 챙기는 찬찬한 손자지만 학교에서는 좀처럼 눈에 뜨일 만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 키도 작고 싸움도 못하는 더없이 평범한 래봉이에게 신은 수학을 잘하는 능력을 주셨다. 래봉이는 ‘수학 따위를 잘하는 능력’을 받는 바람에 난데없이 반장의 눈에 걸려 하루아침에 무자비한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수학 문제를 물어보는 반장에게 삐꾸 새끼 주제에 “반장이 이런 것도 모르냐?”라고 대꾸했다는 이유다. 래봉이처럼 존재감 없던 아이가 왕따가 된다는 건 왕따는 아무나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작가는 책의 도입부 몇 장면부터 래봉이가 사정없이 짓밟히는 장면을 통해 네가 언제 왕따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아찔한 경고를 던지며 시작한다.


싸움 짱인 반장에게 찍히면서 밑바닥에서 숨만 붙이고 살아가는 래봉이에게 전학생 은철이는 뜻밖의 구원자다. 은철이는 래봉이 때문에 싸우다가 머리에서 피가 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아버지인 척하고 래봉이네 학원에 전화를 걸어 ‘래봉이는 시골에 내려가서 당분간 학원에 못 간다’고 거짓말을 해준다. 은철이가 또 다른 학교폭력의 피해자인 동관이의 편이 되어주면서 세 사람은 단짝 친구가 된다. 괴롭힘에 지쳐 벼랑 끝에 매달린 것 같았던 래봉이와 동관이는 은철이 덕분에 산소호흡기를 단 것처럼 상쾌한 여름을 보낸다. 은철이가 이렇게 강한 아이가 된 뒤편에는 아픈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면서 셋은 더욱 단단하게 뭉친다.


이 작품을 우정으로 왕따를 극복하는 순순한 이야기로 읽는다면 그것은 절반만 이해한 것이다. 작가는 이 세 어린이의 우정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가혹한 세계의 공습과 쓰라린 상처와 흉터 자국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학교폭력이 어떻게 가정폭력과, 또는 성폭력과 얽히면서 약하디약한 삶을 위협하는지, 그뒤에는 얼마나 견고한 벽이 진압을 예고하며 버티고 있는지 생생하게 그려진다. 은철이가 떠나기 전날, 함박눈 속의 소시지 파티는 바위를 얹어놓은 것처럼 무겁게 슬프고, 믿기지 않지만 행복하다. “야, 눈이다!” “진짜 눈 오네!” “으하하하!”로 이어지는 세 친구들의 환호 장면은 지상에 없는 눈송이들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날은 밝고, 학교폭력의 가해자는 다시 반장에 당선된다. 그 가해자 또한 성공만을 외치는 무자비한 아버지의 손아귀에 단단히 잡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가슴에 작은 주먹 하나씩을 품고 홀로 걷고 있다. 주먹을 나무라는 사람만 있고 손바닥을 펴보라고 말 걸어주는 이는 없다. 마영신 작가는 “눈 딱 감고 돈 되는 만화 그려”라는 말과 맞서면서 끝끝내 수많은 래봉이들의 이야기를 그려준 고마운 작가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래봉이지만 책을 읽고 나면 은철이에게도 무척 마음이 쓰이는데, 이런 은철이에게서 작가의 얼굴을 엿본다. 『삐꾸 래봉』은 “다 이겨낼 수 있어”라는 상투적인 위로 대신 “괜찮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같이 있어”라는 든든한 기분을 안겨준다. 이 책을 읽으면 기운이 난다는 말은, 세 친구의 함박눈 그날처럼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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