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예약을 두번이나 걸어서 겨우겨우 빌린 책이라 그런지 독후감 쓰기도 쉽지 않네. 두번이나 날려버리고 다시 쓰는 글을 역시 쓰고싶지 않지만 분명이 지금 미루면 다시는 쓰지 못하게 될 것 같아 겨우겨우 쓰고 있다. 자꾸 잊어버리는 기억력 덕분에 독서 노트는 반드시 써야한다고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일본소설은 지겨워, 라고 친구와 말했던 게 불과 얼마전. 그래도 요시다 슈이치라는 작가의 네임밸류때문에 신간이 나오면 읽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엔 또 무슨 얘기를 펼쳐놓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요시다의 악인이 그려낸 인간의 밑바닥. 오쿠다 히데오나 이시다 이라 같은 작가들이 연이어 내놓는 인간의 밑바닥, 그 어두운 심연은 정말 우울했는데, 책 띠가 말해주듯, 이제 다시 연애다! 라는 것도 궁금했다.

역자인 이영미씨의 역자 후기가 없었더라면 나는 또 그냥 지나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소재가 독특한 것도 아니고, 분명한 흐름은 있지만 뚜렷이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 또 여전히 소소한 인간사를 그려낸 이 책은 그냥 또 기억 속 저 먼곳으로 스쳐갔으리라. 이영미씨의 분석에 감사드린다.

이영미씨가 지적했듯 이 책은 두가지 흐름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다큐멘터리 pd, 혹은 작가, 기자인 듯한 남자 주인공과 배경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여자 주인공의 연애 이야기. 그리고 하나는 바미안 대불 폭파 사건을 취재하는 이야기의 흐름이다. 문득 기억나는 대만 드라마 심정 밀마. 주유민과 박은혜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이 드라마는 중국어를 못하는 박은혜를 아예 벙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어색한 더빙보다 훌륭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말하는 사람과 말 못하는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을 극히 평면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반해 이 책은 말과 글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차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나, 감정이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을 소재로 말이다.

상상해보자. 내가 말을 하고 그가 말을 못한다. 말이면 블라블라 잔뜩 싸울 수도 있는데 막상 글로 옮기려면 우선 생각을 정리해야 하고 그 사람이 그 글을 읽고 있는 동안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부터 막막해진다. 맘에 쌓인 일이 있을때 해소의 방법으로 글을 쓰고 있다보면 자꾸자꾸 퇴고를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어느정도 맘이 풀리게 되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결국 글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경우 냉정해짐을 알 수 있으리라. 잘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도 한데, 아무튼 이 커뮤니케이션은 장단점이 있어 보인다. 오해를 불러일으킬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말이나 글이나 거기서 거기일지도. 또한 침묵의 세계는 오히려 훨씬 냉정할지도.

말을 할 줄 아는 첫번째 여자친구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주인공 화자가 느끼는 것은 다음과 같다.



히로미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뭐야, 뭐라고 말 좀 해! 할말 있으면 해보란 말이야!" 라고 소리치며 침대를 걷어찼다.
시끄러워.
나는 또다시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끄러워.
삐걱거리는 스프링도, 자기가 승자라는 걸 아는 주제에 패자에게 패배를 인정시키려 하는 그 목소리도.
시끄러워.

p22


그리고 말을 하지 못하는 교코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집에 교코를 남겨두고 의미 없이 떠들어대고 온 것이 왠지 모르게 미안했다. 솔직히 시끄러운 가게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옛 친구들과 시간을 함께한 덕분에 해방감을 느낀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떠들면 떠들수록 뭔가가 가벼워졌다. 그런 마음을 왠지 교코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교코의 고요함에 무엇으로 저항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 같다. 그때까지의 인생에서 큰소리를 들은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누군가 큰소리를 치면 나도 큰 소리를 쳐주면 끝났다.

그렇다, 너무나 단순명료한 일이었는데, 소리치지 않는 교코의 마음을, 좀 더 말하면 너무나 고요한 교코의 마음에 어떻게 하면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그것이 알고 싶어서 답을 찾고 망설이고 초조해하고, 그리고 왠지 모르게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기분을 교코에게 전한다 해도, '지나친 생각이야'라는 메모만 건네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납득해버리는 건 왠지 비겁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왜 비겁한지는 모르지만, 단념하는 것은 늘 강한 입장에 선 자의 특권 같은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p67-68



이 다음 벚꽃놀이 에피소드에서 들을 수 있는 세계와 들을 수 없는 세계의 차이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취재 과정이 있었을까. 철저히 들을 수 있는 세계의 사람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들을 수 없는 사람은 이런 일련의 과정에 대해 어떻게 느낄까.

어느게 진실이고 어느게 거짓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현실세계의 이야기, 세계 문화 유적의 폭파 사건에 대해 써 둔 구절 중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마음에 남아 페이지 끝을 접어두었다. 내용인 즉슨,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아는 채로 놔두었다.
힘들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뿐이고, 그 괴로움을 상상하지 않았다.

p176
우리는 늘 이렇게 무심하게 중요한 일들을 넘기곤 한다. 그리고 계속 그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또 한구절, 주인공의 세심함. 이런 세심한 남자가 진짜 있을까? 




천천히 대답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교코의 귀가 불편하다는 얘기를 부모님에게 전화로 전할 자신이 없었다. 단순한 순서 차이이긴 하지만, 귀가 안 들리는 애인으로 교코를 소개하는 게 아니라, 교코라는 애인의 귀가 불편하다고 전하고 싶었다.

...중략....

'요즘 세상에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어디 있어. 그렇게 직설적인 사람이 없으니까 불쾌한 기분이 들 때가 더 많은 거야.'

교코가 써내려가는 글씨를 바라보면서도 솔직히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것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교코가 거기까지 쓴 메모장을 찢어서 둥글게 말더니 새 종이에 다시 쓰기 시작했다.
'당신은 귀가 들리지만, 그런건 신경쓰지 않아요' 라는 말 들어본 적 있어?'
그렇게 쓴 메모를 보고 나는 순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늘 그런 소릴 들어. 당신은 귀가 불편하지만, 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요, 라고들 하지.'

p125


일련의 에피소드, 각각의 소재에서 드러나는 차이들, 문제점들, 그리고 전해지지 않는 마음들. 엇갈리는 생각들. 배려가 불편이 되는 순간들이 속속 발생한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다 이겨냈을까. 어찌, 잘 되었을까.

말과 말이 부딪히는 커뮤니케이션도 어려운데, 말과 글이 어우러지는 커뮤니케이션은 오죽 어려울까. 그렇지만 또 같은 것일거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은 성의인 것이다. 얼마나 전달하고 싶은가, 그 메세지는 분명한가, 전달하는 방식은 어떤가. 말과 글은 도구일 뿐, 결국은 마음이 아닐까.



아까 탈의실에서 100엔 동전을 준 젊은 호스트 얘기를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교코에게 하고 싶었지만, 메모장은 그녀의 가방 속에 있었고, 젖은 손으로 펜을 쥐는 것도 번거로웠다.

p126

아직도 내게는 너무 어려운 커뮤니케이션. 성의와 진심, 전하고자 하는 마음만 우선 갖추고 전달하는 방법은 살아가면서 배우기로 한다. 차츰 차츰 나아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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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괜히, 누군가에게서 미움을 받았던 기억. 
내가 아이들을 휘두르는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달라졌을, 받지 않았을 것 같은, 그런 미움.
그 사실을 알아서 더 괴로었던 바로 그 기억.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해서 더 힘들었던, 그리고 그걸 알고 괴롭혔던 그 아이. 
 
이 책의 앙테크리스티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게도 있다. 그런 사람. 물론, 그게 가능한 건 학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자아이들만 가득했던 바로 그 여자 고등학교에서 나는 또 다른 여자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 이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 미움을 받았던 것 같다. 다각도로 생각해보면 그 빛나는 여자아이에 비해 나는 별볼일 없었기 때문에? 단지 내가 그 아이의 절친이라는 게 질투나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복잡했던 시기였다. 단짝이라는 그 이상한 개념. 사춘기 시절의 여고생들의 감정은 얼마나 이상하고 불안정했던가.  

늘 독특한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아멜리 노통브답게 얼마나 이상한지. 지금은 다 먼 얘기같은 그 감정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anti - christ 라는 앙테크리스타답게 이 책의 '적'은 모든 조건을 다 갖춘채로 주인공을 괴롭힌다. 그렇잖아도 나쁜 처지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상황이 더 악화된대도 내 편이 그녀 편보다 많을 것이므로, 맘껏 괴롭혀도 되는 그런 주인공을 모두에게서 고립시킨다. 재미나게도, 그게 세상 이치인 것 같다. 약자일수록 더 괴롭히고, 강자에게는 벌벌 떠는 그런게 세상인 것 같다.  

"거짓말을 오직 나를 짓밟으려는 목적에 이용하지만 않았더라면 내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크리스타의 문제는 힘의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배자니 피지배자니 하는 이야기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따분하기만 했다. 어쩌면 그래서 내게 남자건 여자건 친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나 학교 밖에서나 우정이라는 고귀한 이름이 쌍방의 동의가 없는 모호한 예속관계나 의도된 모욕, 항구적인 쿠테타, 역겨운 굴종, 심지어 희생양을 만드는 행태들에까지 결부되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자주 보았다.  

...  

그런 우정을 나는 원치 않았다. 우정에 조금이라도 비열한 마음이나 경쟁심이 일말의 부러움이나 한치의 의혹이 깃들면 나는 그 우정을 발로 차버렸다. "  

p165 주인공의 독백  

모든 사실은 밝혀지고 주인공은 보호받는다. 그러나, 그걸로 끝일까. 그거면 된걸까? 이 책의 결말은 흥미롭다. 결국 우리는 그렇게 영향 받고, 영향을 미친다. 주인공으로 인해 크리스타의 외면은 큰 변화를 맞게 되지만, 그녀의 내면은? 알 수 없다.  

친구가 되기 5분전이 중학생들 수준에 맞춘 우정을 예시를 통해 보여준다면 이 책은 좀 더 어른스럽게 우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속내를 파헤친다. 겉과 속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 뭐가 진짜고 거짓인가. 실은 우리들 모두 한번은 저질렀고 저지르고 있으며 당해봤던 이야기를. 강약만 다를 뿐.  

재밌었다. 그리고 처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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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스타 존의 수상한 휴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공중그네와 인더풀로 유쾌한 작가, 이미지를 고수해온 오쿠다 히데오. 방해자를 시작으로 몇가지 최근작을 읽다보니 이럴수가, 유쾌한 작가가 아니었다. 이시다 이라와 버금갈 정도로 날카롭고 잔인하게 사람 심리를 파고 들어 아프게 콕콕 찌르고 있었다.  

이미 나에게 유쾌한 작가, 라는 인식은 떠난지 오래. 팝스타 존의 수상한 휴가라는 제목을 보면서도 다소 불안한 채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존이 그 존인줄도 모르고, 읽어내려가다 어랍쇼, 하고 깜짝 놀랐다. 존은 비틀즈의 그 존이었던 것이었다. 오노 요코에 대한 다른 멤버들의 악감정도 얼핏 비쳐지고 다만, 그 오노 요코보다 예술가적인 기질은 훨씬 드문 여성이 아내였다는 게 좀 다를까. 아들에 대한 사랑도 그대로였다.  

작가 후기에 보면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존의 은둔 생활은 시작됐고 그 사이의 행적은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아내의 고향인 일본에 대한 애정이 있어 매년 여름은 가루이자와에서 보냈다고 한다. 이 소설은 그 가루이자와에서의 휴가 동안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존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씌여진 책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젊어서 내가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은 당사자나는 잃어버릴 망정 가해자는 잊을 수 었게 된다. 젊어서, 철이 없어서 그랬다고 했을지언정 그건 내게 면죄부가 되지 않고 오로지 맘을 아프게하는 상채기가 될 뿐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존도, 아마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진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아사다 지로의 스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을 떠오르게 했다. 팝스타 존은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사람들을 만나고 쓰바키야마 과장은 저 세상에 갔다가 현세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다를 뿐.  현세든 저 세상이든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짓고 또 사함을 바란다.  

 공중그네와 인더풀의 카리스마 넘치는 의사 샘과는 조금 다르지만 왠지 그 쌤을 떠올리게 하는 의사 쌤도 등장하고 일본말과 영어로 대화하는 가정부도 재밌다. 게다가, 변비로 고생하는 존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이 책을 읽는 이 삼일 간, 신기하게도 같이 변비에 걸려 고생했다. 그 고통스러운 과정이 희극적이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지저분하기도 하고. 크크. 오쿠다 히데오 답기도 하고.  

"전 진실이 최고라고 믿진 않습니다. 거짓이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면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용의가 있습니다"  p328  의사 쌤의 말.  

맞습니다, 맞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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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뻐?
도리스 되리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검은 그물 스타킹을 신은 여자와  
중남미 여류 작가들의 단편을 묶은 책이 떠오르는 여성 필독서.  

소설의 도입부는 반드시 흥미로워야 한다, 라는 소설작법의 예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서두. 그리고 흘러가는 감정선. 화자는 여성. 등장인물은 남성. 여성의 마음을 끊임없이 뒤흔들어놓는 남성은 마치 적처럼 느껴지고 어떤 관계든 만나게 되는 여성은 동지처럼 느껴진다.  

바꾸고 싶고 달라지고 싶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그러기 쉽지 않고 ㅁ차마 포맷할 수 없는 인생 때문에 괴롭고, 그러나 동지를 만나고 ... 또 의외로 쉽게 버릴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 만난 그 사람은 또 반대의 입장에 서기도 하고 ...

남성/여성의 정치적인 우위, 관계, 같은 여성과의 우위... 모두가 알고 있고 모르고 싶은 일들을 세심하게 파내어 하나하나 읊어준다. 인종문제까지도. 그리고 이것은 현실.  

내가 살아온 30년간의 시간을 되돌아봤다. 아주 어릴적부터 하나하나. 내가 훔쳤던 친구의 바비인형 신발 이야기가 나와서 놀랐다. 인종도 나라도 대륙도 다른 도리스 되리와 나는, 그녀가 그리는 주인공들과 나는 어쩌면 이렇게 닮아있는지. 각 단편들의 주인공 심리가 전부 이해되고 전부 겪었던 것 같고, 겪게 될 것 같고, 하나하나 체크할 수 있는 리스트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니핑크의 따뜻한 색감을 잊을 수가 없는데.  도리스 되리는 천재.

초파우에서 온 착한 카르마   
아니타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거기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아니타 옆에는 창백한 금발의 남자가 서있었다. 사진이 찢겨나가, 남자의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아니타는 샤를로테의 배에 얼굴을 묻고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그리고 잠시 후 아니타는 고개를 들어 샤를로테를 바라보았다. 눈물은 이미 말라 있었다.

트리니다드  
나는 눈을 감는다.  나는 지금 죽어서 누워있다. 나는 아직 젊고 예쁘다. 벌거벗은 몸 역시 아직 날씬하다. 백화점 화장품 코너의 직원처럼 생긴 두 여자가 내 몸에 붕대를 감는다. 숨도 못 쉴만큼 단단히. 나는 헉헉 숨을 몰아쉰다.  

 "그리고 겉으로는 사람 좋고 소탈해 보이려고 꽤나 애를 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전의 우리 엄마보다 더 까탈스러워.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좀처럼 만족하지 않아. 내가 부엌을 치우고 나면 나중에  그녀가 다시 한번 치워. 내가 식탁을 차리면 그녀가 포크와 칼을 다시 가지런히 정리해. 빵을사오면 또 잘못 사왔다고 투덜거리지. " 
p39

오른쪽 위에는 해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세 가지 물건을 훔쳤다. 여덟살 때 바비인형의 분홍색 하이힐 한 켤레를 훔쳤고, 열 여덟살 때 가장 친한 친구가 만든 특이한 공예품 하나를 훔쳤다. 그리고 스물세 살 때, 나는 한 남자를 훔쳤다. 그는 아내가 있는 남자였다.

홍 부인에게 새 신을  
그날 밤 우린 둘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 등을 돌린 채 거리를 두고 누워서 서로의 몸이 닿지 않게 조심한다. 나는 가만히 두 손을 가슴에 올려놓고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방 안은 조용하고 어둡다. 도시에 있을 때면 나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이 적막함이 늘 그리웠다.

누구세요? 
스물다섯번째 생일에 나는 한 여자를 만났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나는 란츠베르크 오스트 인터체인지 뒤편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 옆 수풀에서 다시 나오면서 나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몸을 축 늘어드린 채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주름진 손등 위로 파리가 기어다녓다. 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죽은 사람이 두려웠다. 그들의 냄새가 두려웠다.

쉭세 
데이브는 옆으로 흘러내린 긴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저 머리칼, 윤기가 흐르는 숱 많은 검은 머리칼,... 남자의 머리칼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운 머리칼, 그 머리칼만 보고 잇어도 우나는 무릎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흔들렸다. "나의 아름다운 데이브... 내 곁에 남아있을 거지, 언제까지나?  
... 모르겠어 ...

월요일의 호밀빵  
내가 뉴욕을 떠난 것은 이십년  전이었다. 친구 베스의 장례를 치르고 난 직후였다. 베스는 정확히 새천년이 되는 바로 그 시각, 창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날 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시 그녀는 마흔 살이었고, 우리는 동갑이었다.

캐시미어 
처음 서로 알게 되었을 때 우린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누곤 했다. 나는 그 사랑에 취해버렸고 나 스스로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토록 나를 좋아하는거지? 이 무지막짛한 비곗덩어리인 나를? 그는 뚱뚱한 내 몸을 정말로 좋아했다. 그와 사랑을 나누는 동안은, 오직 그 동안만은 나는 내 몸에 대해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그와 사랑을 나눌 때면 배고픔도 느끼지 못했다. 나로서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감각의 제국  
호텔 방값 역시 내가 지불할 것이다. 그는 빈털터리니까. 그는 아직 학생이다. 이 어리고 미숙한 남자아이에게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절망스럽다. 그리고 행복하다. 나는 얼굴 가득 환하게 웃는다. 동시에 나는 흐느낀다. 정말 끔찍한 상태이다. 온갖 상반된 감정들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러다가 미치치나 않을까 두렵다.


"부부간의 증오... 그게 어떤 건지 알아요? 그건 아주 특별한 종류의 증오에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죠. 난 부부사이에서 왜 살인이 일어나는지, 충분히 이해해요. 오히려 더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게 신기할 뿐이에요. 하지만 정작 문제는 상대방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 따위가 아니에요. 가장 끔찍한 건 그런 살해욕을 느끼고 나서, 또 금세 새로 구입할 자동차의 색깔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아이들과 다투고, 함께 잠을 자고, 뭐 먹고 싶냐고 묻고 하는 ... 그런 상황이에요. 그런 일관성없는 생각과 행동, 그건 정말 못 참겠어요. 정말 끔찍해요."    

"사람들이 화해를 하는 건 더 이상 그 사람이 밉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오히려 미워하는 것이 너무나 피곤해서죠. 그렇지 않다곤 말하지 마세요."

신부 
나는 혼자 고메라의 해변에 앉아있었어요. 그는 수영을 하고 있었구요. 사실 그는 물 속에 들어가기 싫다고 했는데 ... 물이 너무 차가웠거든요. 하지만 그런 그를 내가 놀렸어요. 그리고,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요. 가끔 난 정말 미쳐버리곤 해요. 집에 아직도 그의 목소리가 녹음된 앤서링 머신 테이프를 가지고 있어요.

원더나이프  
그날은 5월 5일이었다. 더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소리를 죽여 가만가만 그의 방으로 들어갔ㄷ다. 그의 사무실 바닥에 깔린 푹신한 카펫에 하이힐이 푹푹 박혔다. 갑자기 완전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는 옷을 모두 벗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나를 사랑해줘..." 그가 말했다.

저 세상
나를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는다. 금세 기억의 고통,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그 고통이 녹색의 금속성 액체처럼 혈관을 타고 흐른다. 그 사람의 혀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의 혀에서 어렴풋이 피냄새가 난다.  

내 친구 
친구는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 나느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유리창이 모두 검게 칠해져 있었다. 한참 동안 벨이 울린 후에야 친구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집 안은 폐허나 다름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모든 물건에 검은 색 레커를 칠해놓았다. 그의 양복, 텔레비전, 그의 책들, 심지어 자신이 사다놓은 요구르트까지 검게 칠해져 있었다. 카를이 가장 좋아하는 요구르트였다.

금붕어 
그녀는 엎드린 채 어항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기묘한 기하학적 형상의 빨간 두 생명체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며 움직였다. 불룩 튀어나온 금붕어의 눈이 갑자기 그녀에게 바싹 다가왔다 멀어졌다. 흔들리는 물 속에서 햇빛이 춤을 추고 따스한 바람이 창가의 커튼을 펄럭였다.

나 이뻐?  
그가 내 몸을 만지는 동안 내 눈은 날아가는 새들을 좆는다. 그의 손이 점점 아래로 미끄러진다. 그의 손이 갑자기 팬티 안으로 쑥 들어온다. 나는 물고기라도 잡듯 빠른 동작으로  그의 손을 잡는다'. 그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Please, please, you're so beatiful. you're driving me crazy ... " "forty eight dollars" 그가 콘솔박스 위에 지폐 몇장을 올려놓으며 낄낄거린다. "네 마음은 얼마지?"

만나
짐의 목소리의 떨림이 전해진다. 그가 내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나는 남편의 셔츠 단추를 풀고 눈을 감은 채 그의 가슴에 잎을 맞춘다. 내 몸이 녹아 없어지는 기분. 내 머리칼 사이로 그의 숨결이 느껴진다. 내 옷 속으로 들어온 짐의 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의 몸은 긴장하고 있다. 그의 살갗 냄새가 난다 .그 냄새 때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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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3 - 비밀의 화원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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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 '왕국3' 
 
"전화는 그저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기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물체로 바뀌어, 깜짝 놀랐다. 역시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마법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전화는 오지 않았다. 조금은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p102

(아주 평범한 말일지도 모르는데, 앞뒤 문맥과 어우러져 마음 깊이 공감하는 구절이 되었다.) 

 "저 말이지. 사람이 만났을 때는 어쩌다 왜 만나게 되었는지 다 의미가 있어. 숨겨져 있던 만남의 약속이 다 끝나 버리면, 무슨 수를 써도 다시는 같이 있을 수 없는거야."

-p112

(오늘, 사람의 인연은 어디까지일까, 라는 것에 대한 질문에 내가 하고 싶었던 답) 

 "나는 피해자다, 속았다, 상대가 너무했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거짓이라도 잠시는 편하지만 사실은 아니니까 언젠가는 무거워진다.

살을 찢어발기는 듯해도 진실이 늘, 한결 낫다. "


-p115

(진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나 자신이다. 다른 이들에게 위로를 듣고 있어도 적당히 얼버무리기라는 건 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막상 내가 위로해주는 사람이 되면 도저히 사실을 얘기할 용기가 안 생긴다. 그리고 내가 그 상대방을 이해할수록 더 그렇다.) 

"나는 지금까지 신이치로 씨의 상황에 따라 여행을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나 자신을 위해서,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갈 수 있다. 그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밝아졌다.

인연의 끈을 놓은 만큼 공간이 확실하게 넓어진다. 그쪽으로 눈길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이미 거기에는 좋은 향내가 풍기는 것이 찾아와 있다. "

p123
 
 

암리타에 이어, 요시모토 바나나는 정말이지.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무슨 경험을 쌓았을까.
책에서 빠져 나와 너무 생생하게 살아있어
꼭 한번 만나고 싶어지는 그런 등장인물들. 
 
쫀쫀하게 탄력있는 스토리, 파고드는 감정선.
이해하는 것도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있고,
공감 가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그럴수록 바나나가 좋다. 

내가 살지 못한 삶, 살지 못할 것 같은 삶, 파고 들지 못할 것 같은 삶을  파고 들어 가장 나에게 충실한 삶을 사는 주인공들. 자신의 아우라가 너무 커서 어울릴 수 있는 부류들이 정해져있는 주인공들. 그런 삶, 자신에게 오롯이 올인할 수 있는 삶. 아프고 괴로워도 자신의 관점이 옳다고 믿는 삶.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맞아 보이는 삶.  

그런 삶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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