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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예약을 두번이나 걸어서 겨우겨우 빌린 책이라 그런지 독후감 쓰기도 쉽지 않네. 두번이나 날려버리고 다시 쓰는 글을 역시 쓰고싶지 않지만 분명이 지금 미루면 다시는 쓰지 못하게 될 것 같아 겨우겨우 쓰고 있다. 자꾸 잊어버리는 기억력 덕분에 독서 노트는 반드시 써야한다고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일본소설은 지겨워, 라고 친구와 말했던 게 불과 얼마전. 그래도 요시다 슈이치라는 작가의 네임밸류때문에 신간이 나오면 읽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엔 또 무슨 얘기를 펼쳐놓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요시다의 악인이 그려낸 인간의 밑바닥. 오쿠다 히데오나 이시다 이라 같은 작가들이 연이어 내놓는 인간의 밑바닥, 그 어두운 심연은 정말 우울했는데, 책 띠가 말해주듯, 이제 다시 연애다! 라는 것도 궁금했다.
역자인 이영미씨의 역자 후기가 없었더라면 나는 또 그냥 지나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소재가 독특한 것도 아니고, 분명한 흐름은 있지만 뚜렷이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 또 여전히 소소한 인간사를 그려낸 이 책은 그냥 또 기억 속 저 먼곳으로 스쳐갔으리라. 이영미씨의 분석에 감사드린다.
이영미씨가 지적했듯 이 책은 두가지 흐름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다큐멘터리 pd, 혹은 작가, 기자인 듯한 남자 주인공과 배경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여자 주인공의 연애 이야기. 그리고 하나는 바미안 대불 폭파 사건을 취재하는 이야기의 흐름이다. 문득 기억나는 대만 드라마 심정 밀마. 주유민과 박은혜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이 드라마는 중국어를 못하는 박은혜를 아예 벙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어색한 더빙보다 훌륭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말하는 사람과 말 못하는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을 극히 평면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반해 이 책은 말과 글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차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나, 감정이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을 소재로 말이다.
상상해보자. 내가 말을 하고 그가 말을 못한다. 말이면 블라블라 잔뜩 싸울 수도 있는데 막상 글로 옮기려면 우선 생각을 정리해야 하고 그 사람이 그 글을 읽고 있는 동안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부터 막막해진다. 맘에 쌓인 일이 있을때 해소의 방법으로 글을 쓰고 있다보면 자꾸자꾸 퇴고를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어느정도 맘이 풀리게 되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결국 글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경우 냉정해짐을 알 수 있으리라. 잘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도 한데, 아무튼 이 커뮤니케이션은 장단점이 있어 보인다. 오해를 불러일으킬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말이나 글이나 거기서 거기일지도. 또한 침묵의 세계는 오히려 훨씬 냉정할지도.
말을 할 줄 아는 첫번째 여자친구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주인공 화자가 느끼는 것은 다음과 같다.
히로미는 거기까지 말하더니 "뭐야, 뭐라고 말 좀 해! 할말 있으면 해보란 말이야!" 라고 소리치며 침대를 걷어찼다.
시끄러워.
나는 또다시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끄러워.
삐걱거리는 스프링도, 자기가 승자라는 걸 아는 주제에 패자에게 패배를 인정시키려 하는 그 목소리도.
시끄러워.
p22
그리고 말을 하지 못하는 교코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집에 교코를 남겨두고 의미 없이 떠들어대고 온 것이 왠지 모르게 미안했다. 솔직히 시끄러운 가게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옛 친구들과 시간을 함께한 덕분에 해방감을 느낀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떠들면 떠들수록 뭔가가 가벼워졌다. 그런 마음을 왠지 교코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교코의 고요함에 무엇으로 저항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 같다. 그때까지의 인생에서 큰소리를 들은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누군가 큰소리를 치면 나도 큰 소리를 쳐주면 끝났다.
그렇다, 너무나 단순명료한 일이었는데, 소리치지 않는 교코의 마음을, 좀 더 말하면 너무나 고요한 교코의 마음에 어떻게 하면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그것이 알고 싶어서 답을 찾고 망설이고 초조해하고, 그리고 왠지 모르게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기분을 교코에게 전한다 해도, '지나친 생각이야'라는 메모만 건네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납득해버리는 건 왠지 비겁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왜 비겁한지는 모르지만, 단념하는 것은 늘 강한 입장에 선 자의 특권 같은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p67-68
이 다음 벚꽃놀이 에피소드에서 들을 수 있는 세계와 들을 수 없는 세계의 차이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취재 과정이 있었을까. 철저히 들을 수 있는 세계의 사람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들을 수 없는 사람은 이런 일련의 과정에 대해 어떻게 느낄까.
어느게 진실이고 어느게 거짓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현실세계의 이야기, 세계 문화 유적의 폭파 사건에 대해 써 둔 구절 중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마음에 남아 페이지 끝을 접어두었다. 내용인 즉슨,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아는 채로 놔두었다.
힘들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뿐이고, 그 괴로움을 상상하지 않았다.
p176
우리는 늘 이렇게 무심하게 중요한 일들을 넘기곤 한다. 그리고 계속 그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또 한구절, 주인공의 세심함. 이런 세심한 남자가 진짜 있을까?
천천히 대답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교코의 귀가 불편하다는 얘기를 부모님에게 전화로 전할 자신이 없었다. 단순한 순서 차이이긴 하지만, 귀가 안 들리는 애인으로 교코를 소개하는 게 아니라, 교코라는 애인의 귀가 불편하다고 전하고 싶었다.
...중략....
'요즘 세상에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어디 있어. 그렇게 직설적인 사람이 없으니까 불쾌한 기분이 들 때가 더 많은 거야.'
교코가 써내려가는 글씨를 바라보면서도 솔직히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것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교코가 거기까지 쓴 메모장을 찢어서 둥글게 말더니 새 종이에 다시 쓰기 시작했다.
'당신은 귀가 들리지만, 그런건 신경쓰지 않아요' 라는 말 들어본 적 있어?'
그렇게 쓴 메모를 보고 나는 순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늘 그런 소릴 들어. 당신은 귀가 불편하지만, 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요, 라고들 하지.'
p125
일련의 에피소드, 각각의 소재에서 드러나는 차이들, 문제점들, 그리고 전해지지 않는 마음들. 엇갈리는 생각들. 배려가 불편이 되는 순간들이 속속 발생한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다 이겨냈을까. 어찌, 잘 되었을까.
말과 말이 부딪히는 커뮤니케이션도 어려운데, 말과 글이 어우러지는 커뮤니케이션은 오죽 어려울까. 그렇지만 또 같은 것일거라는 생각도 든다. 결국은 성의인 것이다. 얼마나 전달하고 싶은가, 그 메세지는 분명한가, 전달하는 방식은 어떤가. 말과 글은 도구일 뿐, 결국은 마음이 아닐까.
아까 탈의실에서 100엔 동전을 준 젊은 호스트 얘기를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교코에게 하고 싶었지만, 메모장은 그녀의 가방 속에 있었고, 젖은 손으로 펜을 쥐는 것도 번거로웠다.
p126
아직도 내게는 너무 어려운 커뮤니케이션. 성의와 진심, 전하고자 하는 마음만 우선 갖추고 전달하는 방법은 살아가면서 배우기로 한다. 차츰 차츰 나아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