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가방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소림사의 추천 책. 선생님의 가방, 이라는 제목에다가 청소년 서적을 취급하는 편집자의 추천이라, 처음에는 선생님의 가방에 얽혀있는 교훈적인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왠일 이건 연애소설이었다. 그것도 무려 30대 후반의 여성과 60대 후반의 선생님의 이야기였다. 어머, 깜짝이야!

이 책은 무척 독특하다. 첫 챕터를 읽어 내려가는 순간 나쓰메 소세키의 담담한 문체가 생각났다. 자조적이면서도 담담한 어조. 자신의 내면을 담담하게 읊조려 가거나, 제 3자의 입장에서 주인공을 담담하게 지켜보거나. 담담한데, 담고 있는 건 격렬하다. 솔직하고 격렬하다. 꼭 그 느낌이다.

이 책의 화자는 주인공 중 하나인 30대 후반의 여성이다. 30대 후반의 독신여성 - 입밖으로 소리를 내어 발음해봐도 많은 게 느껴진다. 일본이라고 우리나라에서 30대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가볍겠는가. 30대 여성이라는 건 그 나이에 맞는 행동규범이라는게 있는 법이고, 이 주인공은 '독신'이다.

어느 술집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는 걸 들은 주인공 화자는 돌아본다. 그랬더니, 한참 나이가 드신,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는 옛 선생님이 않아계신다. 선생님은 심지어 내 이름도 알고 있는데 나는 얼굴도 가물하다.  그렇게 술잔을 한두잔 기울이고, 한두번 더 만나고, 결국 그 술집에서 약속도 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사제지간이 된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선생님은 나이가 있고 죽음도 두렵다. 화자가 여자다보니 선생님의 마음이  대폭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며 여성 입장에서의 복잡한 감성이 그려진다. 연애는 참 힘들지. 늘 불안하고 확인할 수 없는 마음에 조바심내야 한다. 주인공 화자가 후반에 갈수록 중얼거리게 되는 말, '기대하지 말자, 기대하지 말자'. 로 표현되는 그 마음, 표현이 격하지 않지만 충분히 공감이 간다. 나도, 그랬으니까.


이렇게도 많은 생물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도시에 있을 때는 언제나 혼자, 가끔씩 선생님과 둘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도시에는 커다란 생물만 살고 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에 있을 때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수많은 생물들에 둘러싸여 있었을 게 틀림없다. 선생님과 나, 딱 둘뿐이었게 아니다. 술집만 하더라도 언제나 선생님만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거기엔 사토루 상도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낯익은 손님들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정말로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살아서 나와 마찬가지로 잡다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P64
 


술집 주인과 함께 선생님과 함께 버섯을 따러 가서 화자가 느끼는 이 부분에 절절히 공감했다. 아마도 그 공간이 술집이고, 내 연애도 그렇게 종종 술집에서 이뤄지고, 나도 이렇게 적진 못했지만 어느정도 인식하고 있던 느낌이기 때문이었을까.

 

저녁무렵까지 방에 있었다. 책을 뒤적여 가며 멍하니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졸음이 와서 한 삼십 분 자기도 했다. 잠이 깨서 커튼을 젖혀 보니 완전히 어두워져 있다. 달력 위에서는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은 해가 짧다. 동지 무렵의, 쫒기듯 짧은 해 쪽이 차라리 맘 편하다. 어차피 금세 져 버릴 것이라 생각하면, 해질 무렵의 어쩐지 후회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느낌의 엷은 어둠에도 마음의 준비를 할 할 수가 있다. 아직 안 질 거야, 아직 좀 남았어 ... 요즈음처럼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엔 항상 이런 생각을 하다 허방을 짚게 된다.아, 해가 졌네, 하는 다음 찰나엔 마음속에 절절하게 불안이 스며드는 것이다.  


그래서 밖으로 나왔다. 길에 나와 살아있는 것이 나만은 아니라는 것을, 살아서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졌따. 하지만 길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만으로는 그런 걸 확인할 도리가 없다. 확인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확인할 수가 없게 된다. 


바로 그럴 때 선생님과 딱, 마주친 것이다.

P94-95
 

이런게 일본 소설의 단점이라고 흔히들 사람들이 말하는 부분일지 모르겠다. 얼마나 소소한가, 그리고 얼마나 공감이 되는지. 일요일 저녁, 혼자 사는 사람들은 다 알거다. 오후만 있는 일요일 저녁은 얼마나 불안한지. 그래서 나도 밖에 나와 본 경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나왔다는 기분만 가지고 돌아가기에 방은 또 얼마나 적적한지. 이렇게 소소한 느낌, 30대 후반의 독신여성의 심리를 딱 짚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작 20대 후반의 여성도 이렇게 쓸쓸하니.


나는 언덕길을 결연히 내려갔다. 석양이 지금이라도 당장 바다에 가라앉을 듯하다. 샌들이 유난히 달각거려서 거슬렸다. 온 섬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갈매기 울음소리도 성가시다. 이 여행을 위해 새로 맞춘 원피스 허리가 너무 조인다. 큼직한 샌들의 고리에 닿아 발등이 쓰리다. 해변에도 길에도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쓸쓸하다. 개똥 같은 선생님이 내 뒤를 안 좆아오니 얄밉다. 


어차피 내 인생이라는 것이 이런거지. 이렇게 낯선 섬에서,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저 선생님과 어긋나 낯선 길을 혼자서 터벅터벅 걸러간다. 이렇게 된 바에야, 술이나 마시자. 
 

P176 


와 이쯤되니 정말 이건 내 일기를 읽고 있는 듯 하다. 기대하고, 실망한다. 그리고 자조감에 젖어 '개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알듯말듯한 그 사람의 속내를 알려고 하는 대신에 할 수 있는 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단문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묘사는 정말 소세키를 보는 것 같다.

유독 이 소설이 소세키의 글처럼 느껴지는 건 그 '고루함'에 있다. 화자가 선생님에게 '고루하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고루한게 좋다'며 받아친다. 두 사람의 나이도 나이겠지만 느끼는 감정들은 참말로 고루하다. 핸드폰도 없고 혹시나 만나질까 해서 밤길을 서성인다. 집앞에 가서 소리도 들어보고 문 앞에서 몹시도 망설인다. 아마 요즘엔 이런 연애, 아무도 안할지도 모른다. 요즘  씌여지는 연애소설은 첫 만남에서 어느 방으론가 가겠지. 할리퀸 소설이 아니더래도 그게 요즘 스타일인지도 모르겠다. 고루하고 답답한, 그래서 더 소중하고 아끼게 되는 그런 감정. 서서히 나도 모르는채, 그렇게 달궈지는 감정까지도. 별거 아니면 그만두면 되고, 별거라면 아껴서 키우면 되고. 소중한 씨앗을 다루듯, 그런 연애 감정은 정말 고루한 일이 되어버렸다.

림사의 추천작은 언제나 훌륭하다. 이책도 어젯밤 - 오늘 아침 사이에 다 읽어버렸다. 짧고 잘 읽혀지는 건 요즘 스타일인데 담고 있는 내용은 옛날 스타일이다.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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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속을 걷다 - 이동진의 영화풍경
이동진 지음 / 예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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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열에 나오는 이동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분명 외워서 하는 이야긴 아닐 텐데, 어쩜 저렇게 논리정연하고 바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데도, 한 영화의 강점, 약점 그리고 추천의 이유를 설명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고 논리가 분명하다. 유희열과 지적이면서도 또 그렇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토요일 밤은 참 훌륭하다. 똑같이 생긴 몸매에 똑 같은 모습을 하고 영혼마저도 비슷할 것 같은 그 둘의 이른바 '지적 유희'는 참 재미난다. 평론가들이 하는 일은 영화를 보는 '관점'을 알려주는 게 맞나, 싶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우연히 친구의 책장에서 발견한 이동진의 필름 속을 걷다.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할 때부터 들어온 이름이나, 그는 내게 이름만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이제 그는 내게 확실한 '실체'를 가진 인물이 되었다. 설사 그것이 맞는지, 혹은 아닌지 알 수 없다 해도 이제 무척 친근한 사람이 되었다. 반가워요, 이동진 기자!

 이 책은 평소 이동진이 유희열에서 말하던 이야기들의 '글' 버전인 것 같았다. 물론 여행기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에 꼭 같다고 할 순 없지만, 영화 속 장면에 등장하는 그 '곳'을 찾아가며 느끼는 많은 생각들과 감상들은 이동진 기자와 매주 토요일에 만난 지 일년이 채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숙했다. 어록까지 뽑아낼 수 있을 만큼 그는 쉬운 말을 하지 않는다. 말도 꼭 글처럼 한다, 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됐든, 이 책에도 그의 감성과 여행지의 감수성이 맞아 떨어져 되새기고 싶은 명구들이 보인다. 이건 이 글의 마지막에 적기로 한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필름 속에서 '흔적을 찾고' , '리얼리티를 찾으며', '시간을 찾아' 헤맨다. 총 5편씩 15편의 여행기를 적고 있는데, 그 영화의 리스트가 이렇다. 러브레터, 비포선셋,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이터널 선샤인, 러브 액츄얼리, 화양연화, 행잉록의 소풍,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나니아 연대기, 글루미 선데이, 쉰들러 리스트, 티벳에서의 7년, 장국영을 기억하다, 베니스에서 죽다. 보지 않은 영화도, 또 본 영화도 섞여있다. 그렇지만 한결같이 '무언가 있는' 영화들이다. 또 분명히 그 지역의 색채를 담아내고 있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한 때 유행했던 테마여행, 영화, 드라마 촬영지 여행의 일환인 것도 같지만, 이건 이동진 기자가 갔을 때 의미있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여행서 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적어도 친절히 그 지역을 설명해주진 않고 이동진 기자가 찾는 곳이 유명한 그 지역의 여행지도 아니다. 장국영이 자주 가던 식당에서의 비싼 식사는 가난한 여행자인 내게는 별 의미 없는 곳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찾는 작은 러브호텔은 숙소로 찾기에는 '특색 있는' 경험일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훌륭한 여행지는 아니다. 이 책은 그 여행지로 발길을 옮기게 하는 뽐뿌질 정도로 여행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분명, 내가 그 지역에 가게 된다면 꼭 이 책의 감수성을 가지고 방문하겠다. 같은 곳을 방문하더라도 어떤 '얼개'와 '시선'을 가지고 떠냐느냐에 따라 무척 다른 여행을 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무척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날이 선 감성. 무얼 하나 봐도 쉽지 않고 무얼 하나 보면 어떤 것을 읽어내는 능력. 잘 발달된 감수성과 잘 훈련된 글 솜씨로 적어 내려가는 에세이. 요즘 여행기는 '저자'가 누군지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것은 같은 공간, 같은 도시더라도 '누구의' 시선이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사실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보편적인' 사실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싶다. 점점 눈 밝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미용실에 가서 전쟁의 역사 책을 읽고 책을 다 읽도록 기다리다 결국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화도 내지 못하고 미용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는 이동진 기자가 적어내려간 여행기, 필름 속을 걷다는 굉장히 좋은 책이었다. 그리고 무척 쓸쓸한 책이었다. 그리고 이동진 기자는 멋진 화자였다.


“ 영화 <러브레터>에서는 그렇게 환상인 듯 현실인 듯 모호하게 표시되는 장면들이 많았다. 온통 눈 세상인 오타루에서 찍은 그 영화에서는 그렇게 해도 괜찮았다. 겨울은 ‘환’의 계절이니까. 새로 내려온 눈이 이미 내린 눈 위에 켜켜이 쌓여가며 일종의 나이테를 이루는 곳에서는 삶이 좀 더 자주 꿈처럼 느껴질 테니까. 오타루에서 눈은 곧 시간의 퇴층과 마찬가지였다. “
p  16 흔적을 찾다 – 세상으로 내려가야 할 시간 ㅣ 러브레터 오타루.

“시간은 균일하게 흐르지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맴을 돌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역류하기도 한다. 센 강변에서 시간은 호수처럼 넉넉히 고여있다.”
 P38 – 숲을 이룬 꽃은 시든다. ㅣ 비포선셋 파리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덜 갖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가 상대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나는 정말 이들보다 더 행복한가. 그러나 진정한 행복한 물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똔레삽에서 현자처럼 말하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위선일까. 보트를 돌려 돌아오는 길에 해가 뉘엿뉘엿 졌다. 이 흙빛 삶의 터전에 비치는 태양도 다른 어느 곳의 태양만큼이나 아름답다는 사실 속에는 기묘한 슬픔이 배어있다. 이 여행은 이제 내게 어떻게 남을 것인가”
. P132 – 입에서 터지는 탄산의 죄책감 l 화양연화, 캄보디아

“그들 모두는 시간을 초대해 놓고 있었다. 어쩌면  우린 너무 서두르기 때문에 매번 늦는 게 아닐까. 전력 질주하는 문명의 아찔한 속도 안에서 필요한 것은 혹시 이런 게 아닐까. 게으름 피울 수 있는 권리, 최선이라는 말에 쫒기지 않을 권리, 주저하고는 때로는 왔던 길로 돌아갈 수도 있는 권리. ……
봄의 판타지와 가을의 리얼리티. 떠나온 봄과 떠나갈 가을. 흘러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시간 속을 우리가 흘러가는 것이다.”
 P 202 – 게으름 피울 수 있는 권리, 나니아 연대기  


“여행을 떠나면 나는  일종의 고행 상태에 돌입한다. 비행기에서는 영화를 보지도 않고 음악을 듣지도 않는다. 가급적 기내식도 건너뛴다. 책을 읽을 때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잠을 청한다. 그러나 잠은 끝내 편안히 오지 않는다. 작은 상자 속에 유폐된 듯, 꿈과 현실 사이의 좁은 통로 어딘가에서 혼곤하게 헤맨다.”
 P 5 이동진 기자의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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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행 - 이상은 in Berlin
이상은 지음 / 북노마드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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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런 여행서적이겠거니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역시 테마가 확실했다. 예술가 이상은이 예술가의 도시 베를린으로 향했다는 것. 내용은 비록 역시나 여행서적일지 몰라도 이상은의 노래와 가사, 그리고 예술가 이상은의 시각으로 보는 도시라는 점이 더해져 그저 그런 여행 에세이에서 조금은 변주됐다. 그리고 조금은 또 동감했다. 이상은에 대한 애정으로, 그리고 길 위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여행자로. 그렇게 공감하며 읽었다.

 

특히나 삶은 여행이라는 신곡과 내가 가장 사랑했던 앨범 공무도하가의 보헤미안을 수록한 cd와 함께 독서하니, 이렇게 생생할 수가. 책도 참 아름다워서 가벼운 책용지와 디자인이 참 예뻤다. 눈이 좋지 않은 어르신들은 절대 읽을 수 없을 실제 여행정보, 그리고 사진과 (사진도 일반 엽서 사진과는 다르다) 텍스트의 조화, 노래 가사말. 그리고 짧은 인터뷰. 


다음과 같은 구절에 공감했다. 역시 여행자들은 대부분 비슷비슷한 생각을 하는걸까.

여행이란 여행자를 변화시킨다. 무엇이 어떻게 변했느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다. 다만 삶에 지겨워하던, 세상을 '예, 아니오'라고만 판단하던 나에게 또 다른 생각의 틀을 제공한다.

여행은 긴 호흡을 갖고 세상을 볼 것을 요구한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감사함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도 여행이 안겨주는 참된 가치다. 스스로를 향한 무한한 사랑, 세상을 향한 지대한 관심이 생겨나는 건 여행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p240

물론 누구의 삶이 더 낫다고 얘기할 필요는 없다. 자음과 모음이 서로의 몸을 섞어 언어가 탄생하듯 세상은 서로 다른 삶이 모여 만들어가는 것이다. 노랫말을 붙이다 보면 여러가지 언어를 놓고 고?게 된다. 각기 저마다 합당한 이유를 지닌 단어들을 선택하는 것은 재미있으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별빛과 달빛의 룩스가 다르듯이, 사람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에게 따분한 일이 어떤 이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어떤 이는 감정을 절제한 짧은 문장에 열광하지만, 또 어떤 이는 은유가 넘치는 달콤한 문장을 사랑한다.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 있다. 중요한 건 그 길을 어떻게 걷느냐가 아니라, 반드시 걸어야 한다는 데 있다. 저마나 다른 방법으로 걸어도 좋다. 실패를 되풀이해도 좋다. 각자 자신만의 신념과 방법으로 내 앞에 주어진 길을 걷는것. 그것이 중요하다.

p245

오래도록 여행자이고 싶다. 안정보다는 변화를,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내 안의 세계를 넓히는, 그런 여행자이고 싶다. 삶의 방랑자가 되어 휘적휘적 가볍게 거닐다 삶을 마감했으면 좋겠다. 이것이 비록 내가 젊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라고 해도. 지금은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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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에 사는 사람들 - 무한카논 1부 무한카논
시마다 마사히코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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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다 마사히코.
곰이 좋아하는 작가라며 본인도 읽지 않은 책을 덥썩 빌려주었다.

연작인데, 이 책이 1권,
2번째가 아름다운 혼, 3번째가 이투루프의 사랑.

이 뭐랄까... 요즘 읽던 책들과 상당히 다른, 오페라 나비부인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연애 연작소설이다. 할리퀸 이후로 연애 소설을 찾아가며 읽질 않아서 아주 새로웠다. 또한 진부했다. 또한 비현실적이었다.

작가 후기를 인용해보자.



그리고 마침내 나만이 쓸 수 있는 사랑을 발견했다. 가장 위험하고 감미로우며 그려내기가 어려운 사랑이다. 만약 그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역사는 전혀 다른 미래를 보여주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랑이다. 나는 그런 사랑을 20세기 백년의 역사를 배경으로 꽃피워보자고 계획했다. 나는 20세기를 기댈 곳 없는 연인들의 희로애락을 통해 드러낼 생각이었다.
물론 곧바로 집필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화자를 설정하고, 사랑과 연애에 얽힌 감정을 모두 수집해야 했다. 무수한 세부를 모아 음미하고 끼워 맞춰 갈고닦아야 했다. 하기야 잊힌 사랑에는 자료도 증거물도 없다. 그것을 발굴하는 작업은 소설가가 감각을 총동원해야만 가능해진다. 나는 이 작품에 자신의 모든 능력을 쏟아부었다. 소설이 아니면 그려낼 수 없는 것이야말로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이다.

p516-517 작가후기 중에서
말 그대로 이 책은 한 가문과 그에 얽힌 다른 가문의 세기에 걸친 연애 스토리다. 가족사와 남다른 성격은 피에 담아 물려지는지, 한많은 자식은 또 한많은 자식을 키워낸다. 그리고 그 남다름은 자유와 그에 동반하는 괴로움과 불안정을 가져온다. 그렇게 한 세상 살아내는 이야기다.

시대가 20세기다 보니,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등 주변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2차대전이 막 끝난 후 등장하는 맥아더 장군과 미군이 도쿄를 점령하던 시절의 묘사는 아사다지로의 지하철을 떠올리게 하며 실제로 지하철의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 영화는 '지하철을 타고'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아사다 지로의 또 다른, 책을 떠올리게 했는데 ... 아사다 지로도 그러고보면 그 시절 일본의 모습에서 많이 소재를 찾았구나 싶다. 그만큼 역동적인 시기였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 역시도 그 역동적인 시기에 걸출한 문학인들이 등장했던 걸 보면 문학과 힘들고 어려운 시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인 것도 같다. 그 어려움이 장작이 되어 글과 예술을 탄생시켰으리라. 그 어려움이 불러낸 감정들이 말이다.
 
작가의 이 표현이 마음에 남았다.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그런 임무를 완수할 자신감도 기술도 없었지만 JB는 미국도 일본도 배신하지 않는다는 자기만의 맹세를 한 후에 명령에 따랐다. 1930년의 일이다. 각국은 군축으로 기울고, 뉴욕의 공황이 세계각지로 파급되었다. 아티스트들의 움직임이 왕성하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자유의 활로를 찾는 유행이 퍼졌다. 앞날을 알 수 없는 불안함  속에서 사람들은 과연 무엇에 의지할까? 국가가 시시콜콜 관리하는 거짓 자유를 획득한 시민들은 자신을 방기하듯 에로스에 물들었다. 이런 시대를 건실하게 사는 것은 손해였다."

-p269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가 됐다고 하는 시마다 마사히코. 2편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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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러브 유
이시다 이라.이사카 고타로 외 지음, 신유희 옮김 / 해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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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읽으면서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있거들랑 한쪽 귀퉁이를 접어 표시하는 버릇이 있다. 심지어는 빌린 책도 그러는데 -죄송합니다 - 이 책도 빌린 책이기는 하지만 대체, 한장도 귀퉁이를 접을 구석이 없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 멘트가 없이 물 흐르듯 사건을 통해 이야기를 잘 끌어갔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또 다시 말하면 기억에 남는 부분이 하나도 없이 그저 평범하기만 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이 책은 어느 쪽일까.

이 책은 분명 현재 한국에서 잘 나간다는 여섯 작가가 쓴 책이다. 이사카 고타로는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로, 아주 인상깊었던 책 마왕을 쓴 작가다. 두번째 이시다 이라는 내게 '렌트'로, 그리고 유명한 작품으로는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로 유명한 작가다. 세번째 이치카와 다쿠치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로 많이 알려져있다. 네번째 작가인 나가타 에이이치와 다섯번째 나카무라 고는 별로 많이 알려진 작가는 아닌 듯 하다. 여섯번째 작가인 혼다 다카요시는 fine days로 연애 소설의 새 지평을 열었다 한다. (작가 소개에)

이 책은 아마 정작 책 내용보다도 책을 구입한 Y여사의 구입기가 더 기억에 남을 듯 하다. 달달한 책을 찾던 그녀는 결국 이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이렇게 독후감을 적었다. 어쩌면 나는 연애란 달달한 것만 생각했던 게 아니냐고. 연애는 꼭 그런게 아닌데, 라고 말이지.

연애 소설의 정의는 어떻게 내려야 할까? 연애에 대해 다루면 다 연애소설일까? 연애는 어디에서든 한다. 드라마들에서는 의학 드라마든 검찰 드라마든 전부 연애는 끼어있다. 드라마일 수록 그게 강한 것은 대중은 모두 분홍빛이든 검은색이든 남자와 여자가 좋았다 싫었다 하는 그 과정이 재미있기 때문인걸까. 만약, 메인 스토리든 곁다리 스토리든 연애가 조금이라도 끼어있다면 그것은 연애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에서 연애는 다양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정말 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것도 있고 연애는 곁다리로, 우정이 중심인 것 같은 스토리도 있다. 여섯작가의 개성이 다르듯, 정말 하나같이 다른 연애 이야기다. '이 연애소설이 대단하다' 라는 일본의 연말 시상식 같은 List에도 이름을 올렸다 하니, 분명 대중에게 소구하는 감성과 인정받을 연애 소설 단편 모음집이긴 한 것 같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그냥 지나치기만 하는 스토리일까.

연애는 그 표면만 슬쩍 훑고 정작 연애가 아닌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나마 남녀의 그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면서도 달콤한 감정에 제대로 맞서고 있는 것은 이시다 이라의 마법의 버튼 정도? 너무나 쿨하게 헤어지고 담담하게 지난일을 회상하며 그랬다면 이랬을까?의 상황설정이 너무도 진부했던 혼다 다카요시의 side walk talk . 말 그대로 감정을 슬쩍 훑고 지나가는 느낌으로 일본인답다, 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드는 소설이었다.

연애를 한다면, 정말 힘들게 해야 좋은 순간이 훨씬 더 짜릿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지고 볶고 매일 싸우고 또 매일 화해하고. 적어도 그것이 억지가 아니라면 그 솔직함이 서로의 관계를 더 발전시키는 매개체가 될 것임을, 그렇게 열정적으로 서로를 대할 때 그 관계는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정적인, 그런 연애도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어찌보면 열정이 없는 관계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얼마나 알고 또 서로의 감정에 얼마나 마주하고 있는가, 싶은 느낌. 감정과 감정이 부딪히는데 너무나 이성적인 것도 말이 안된다고 본다. 또 사랑이라는 감정은 얼마나 한 사람을 미치광이로 만드는가. 아무리 안정적인 심성의 사람도 그 마법에 걸리는 순간, 이성을 잃고 날뛰게 되는 것을. 그렇게 둘이 만나서 어떻게 아무일 없이 평화로울 수가 있겠는가. 이 책의 너무도 얌전한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이야기들이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남자들은 무디고 더디다. 여자들이 감정을 날카롭게 훑고 갈 동안, 남자들은 표면과 껍데기 및 큰 그림을 그리는 듯 하다. 그래서 이 책은 이렇게 단조롭고 무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연애를 하는 동안 이렇게 다른 곳을 보고 있을 수 있는 것도, 남자들이 대체로 그렇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마법의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오른쪽 버튼을 누르면 투명인간이 되고, 왼쪽 버튼을 누르면 돌이 되는…….

도쿄에서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바쁘게 움직인다. 서로 버튼을 눌러 사라지기도 하고 돌이 되기도 한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되면 이 거리도 훨씬 조용해질 텐데.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실연의 슬픔도 투과되어 가벼워지고, 혼자 우는 모습을 남들에게 들킬 일도 없겠지. 돌이 되면 가만히 굳은 채로 슬픔을 결정화시켜 마음 깊숙이 가라앉힐 수 있으련만.
하지만 우리에게 마법의 버튼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너를 기다린다.

―<마법의 버튼>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시다 이라의 마법의 버튼. 나와 내 남자친구의 이야기와 비슷해서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 이 구절은 정말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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