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속을 걷다 - 이동진의 영화풍경
이동진 지음 / 예담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희열에 나오는 이동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분명 외워서 하는 이야긴 아닐 텐데, 어쩜 저렇게 논리정연하고 바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데도, 한 영화의 강점, 약점 그리고 추천의 이유를 설명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고 논리가 분명하다. 유희열과 지적이면서도 또 그렇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토요일 밤은 참 훌륭하다. 똑같이 생긴 몸매에 똑 같은 모습을 하고 영혼마저도 비슷할 것 같은 그 둘의 이른바 '지적 유희'는 참 재미난다. 평론가들이 하는 일은 영화를 보는 '관점'을 알려주는 게 맞나, 싶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우연히 친구의 책장에서 발견한 이동진의 필름 속을 걷다.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할 때부터 들어온 이름이나, 그는 내게 이름만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이제 그는 내게 확실한 '실체'를 가진 인물이 되었다. 설사 그것이 맞는지, 혹은 아닌지 알 수 없다 해도 이제 무척 친근한 사람이 되었다. 반가워요, 이동진 기자!

 이 책은 평소 이동진이 유희열에서 말하던 이야기들의 '글' 버전인 것 같았다. 물론 여행기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에 꼭 같다고 할 순 없지만, 영화 속 장면에 등장하는 그 '곳'을 찾아가며 느끼는 많은 생각들과 감상들은 이동진 기자와 매주 토요일에 만난 지 일년이 채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숙했다. 어록까지 뽑아낼 수 있을 만큼 그는 쉬운 말을 하지 않는다. 말도 꼭 글처럼 한다, 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됐든, 이 책에도 그의 감성과 여행지의 감수성이 맞아 떨어져 되새기고 싶은 명구들이 보인다. 이건 이 글의 마지막에 적기로 한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필름 속에서 '흔적을 찾고' , '리얼리티를 찾으며', '시간을 찾아' 헤맨다. 총 5편씩 15편의 여행기를 적고 있는데, 그 영화의 리스트가 이렇다. 러브레터, 비포선셋,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이터널 선샤인, 러브 액츄얼리, 화양연화, 행잉록의 소풍,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나니아 연대기, 글루미 선데이, 쉰들러 리스트, 티벳에서의 7년, 장국영을 기억하다, 베니스에서 죽다. 보지 않은 영화도, 또 본 영화도 섞여있다. 그렇지만 한결같이 '무언가 있는' 영화들이다. 또 분명히 그 지역의 색채를 담아내고 있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한 때 유행했던 테마여행, 영화, 드라마 촬영지 여행의 일환인 것도 같지만, 이건 이동진 기자가 갔을 때 의미있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여행서 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적어도 친절히 그 지역을 설명해주진 않고 이동진 기자가 찾는 곳이 유명한 그 지역의 여행지도 아니다. 장국영이 자주 가던 식당에서의 비싼 식사는 가난한 여행자인 내게는 별 의미 없는 곳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찾는 작은 러브호텔은 숙소로 찾기에는 '특색 있는' 경험일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훌륭한 여행지는 아니다. 이 책은 그 여행지로 발길을 옮기게 하는 뽐뿌질 정도로 여행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분명, 내가 그 지역에 가게 된다면 꼭 이 책의 감수성을 가지고 방문하겠다. 같은 곳을 방문하더라도 어떤 '얼개'와 '시선'을 가지고 떠냐느냐에 따라 무척 다른 여행을 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무척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날이 선 감성. 무얼 하나 봐도 쉽지 않고 무얼 하나 보면 어떤 것을 읽어내는 능력. 잘 발달된 감수성과 잘 훈련된 글 솜씨로 적어 내려가는 에세이. 요즘 여행기는 '저자'가 누군지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것은 같은 공간, 같은 도시더라도 '누구의' 시선이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사실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보편적인' 사실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싶다. 점점 눈 밝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미용실에 가서 전쟁의 역사 책을 읽고 책을 다 읽도록 기다리다 결국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화도 내지 못하고 미용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는 이동진 기자가 적어내려간 여행기, 필름 속을 걷다는 굉장히 좋은 책이었다. 그리고 무척 쓸쓸한 책이었다. 그리고 이동진 기자는 멋진 화자였다.


“ 영화 <러브레터>에서는 그렇게 환상인 듯 현실인 듯 모호하게 표시되는 장면들이 많았다. 온통 눈 세상인 오타루에서 찍은 그 영화에서는 그렇게 해도 괜찮았다. 겨울은 ‘환’의 계절이니까. 새로 내려온 눈이 이미 내린 눈 위에 켜켜이 쌓여가며 일종의 나이테를 이루는 곳에서는 삶이 좀 더 자주 꿈처럼 느껴질 테니까. 오타루에서 눈은 곧 시간의 퇴층과 마찬가지였다. “
p  16 흔적을 찾다 – 세상으로 내려가야 할 시간 ㅣ 러브레터 오타루.

“시간은 균일하게 흐르지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맴을 돌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역류하기도 한다. 센 강변에서 시간은 호수처럼 넉넉히 고여있다.”
 P38 – 숲을 이룬 꽃은 시든다. ㅣ 비포선셋 파리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덜 갖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가 상대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나는 정말 이들보다 더 행복한가. 그러나 진정한 행복한 물질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똔레삽에서 현자처럼 말하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위선일까. 보트를 돌려 돌아오는 길에 해가 뉘엿뉘엿 졌다. 이 흙빛 삶의 터전에 비치는 태양도 다른 어느 곳의 태양만큼이나 아름답다는 사실 속에는 기묘한 슬픔이 배어있다. 이 여행은 이제 내게 어떻게 남을 것인가”
. P132 – 입에서 터지는 탄산의 죄책감 l 화양연화, 캄보디아

“그들 모두는 시간을 초대해 놓고 있었다. 어쩌면  우린 너무 서두르기 때문에 매번 늦는 게 아닐까. 전력 질주하는 문명의 아찔한 속도 안에서 필요한 것은 혹시 이런 게 아닐까. 게으름 피울 수 있는 권리, 최선이라는 말에 쫒기지 않을 권리, 주저하고는 때로는 왔던 길로 돌아갈 수도 있는 권리. ……
봄의 판타지와 가을의 리얼리티. 떠나온 봄과 떠나갈 가을. 흘러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시간 속을 우리가 흘러가는 것이다.”
 P 202 – 게으름 피울 수 있는 권리, 나니아 연대기  


“여행을 떠나면 나는  일종의 고행 상태에 돌입한다. 비행기에서는 영화를 보지도 않고 음악을 듣지도 않는다. 가급적 기내식도 건너뛴다. 책을 읽을 때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잠을 청한다. 그러나 잠은 끝내 편안히 오지 않는다. 작은 상자 속에 유폐된 듯, 꿈과 현실 사이의 좁은 통로 어딘가에서 혼곤하게 헤맨다.”
 P 5 이동진 기자의 프롤로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