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행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혹시나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이 낯선 이들에게 일본 영화 <비밀>의 원작 소설가라고 부연 설명을 덧붙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하고 그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비밀>외에도 <게임의 이름은 유괴> <호숫가 살인사건> <레몬 : 分身>등의 작품을 썼는데,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상당한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유명 작가다. (거기에는 출중한 외모도 한 몫 한다는 소문이다. 미중년 소설가라나 어쨌다나.. 하긴 사진으로만 봐도 알 수 있긴 하더라;) 어쨌거나 그런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단연 <백야행>일 것이다. 이 책은 에도가와 람포상,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을 휩쓴 작품으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어 완성시킨 작품이라고 소개글은 설명하고 있다. 명성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니 굳이 저런 광고 카피가 없었어도 나는 이 책을 읽었겠지만, 다 읽고난 지금은 저 정도의 카피로는 모자란다고 하고 싶을 만큼 이 책이 주는 여운에 젖어 있다.

<백야행>은 아주 긴 이야기다. 총 3권으로 나누어져있는 만큼 책의 두께도 만만치 않지만 주목해야할 것은 그 내용이다. <백야행>은 19년이란 세월을 간직한 '서사'다. 그 긴 세월만큼 소설속에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들이 펼쳐지고 독자인 나는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는 것이다. 화자는 담담하게 혹은 숨가쁘게 두 주인공, 료지와 유키호를 쫓는다. 그리고 나는... 좀 더 필사적으로 그들을 쫓는다. '하얀 어둠속을 걷는다'는 '백야행'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내면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미 심정적으로나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범인은 일찌감치 눈치챈 상황에서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유'와 '관계'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끈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정말 단숨에 읽어내려갔지만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명쾌하지 않다. 이야기의 전말도 알았고 그들의 관계도 알았지만 끝내 료지와 유키호의 숨겨진 내면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9년이란 세월동안 집요하게 그들을 찾아 헤매는 사사가키 형사는 '대포새우와 문절망둥이'이야기를 한다. 공생관계에 놓여진 대포새우와 문절망둥이처럼 료지와 유키호도 서로에게서 태양을 구하려 했겠지? 그러나 그 태양은 결코 낮에 뜨는 진정한 태양이 될 수 없었기에, 언제나 밤을 하얗게 비추는 가짜 태양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비추는 자신은 서로에게 그림자처럼 살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니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나는 애처롭고 가슴이 먹먹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인 것을.

나는 앞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을 것 같다. 작년 말에 읽은 <레몬 : 分身>이 이 작가에 대한 흥미를 부추겼다면 <백야행>은 홀딱 반하게 하기에 충분한 소설인 것이다. 스토리 전개에 있어 막힘이 전혀 없는데다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는 디테일한 묘사가 참으로 매력적이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멋드러진 그 필력이 존경스럽다. 올해 초, 히가시노 게이고는 또 다른 작품 -용의자 X의 헌신- 으로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지. 항간에, 그가 발표하는 작품마다 히트를 친다는 소문이 돈다더니 이건 아예 쐐기를 박는 소식이 아닌가. 이변이 없다면 내가 올해 읽은 미스터리 소설중에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인생을 훔친 여자>와 함께 최고의 소설로 꼽기에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이 4개인 이유는?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별 하나를 뺀 것은 순전히 출판사와 역자 탓이다. -_-+
전체적인 번역은 (몇군데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나무랄 데가 없는편이다. 내용 이해에 무리가 가는 것도 아니고, 억지스럽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나 친절하지는 못하다. 이 정도의 장편을 번역,기획,출판하면 작품에 얽힌 뒷 이야기나 역자 후기 같은게 실리는 게 보통인데, 이 책은 작품이 끝남과 동시에 바로 끝이다. 그런것들이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어쩐지 섭섭하달까. 게다가 이 책은 1997년 1월 부터 1999년 1월까지 문학잡지에 연재되던 연작단편으로, 그것을 모아 손질하여 만든 장편인데 번역본에는 그에 관한 하등의 설명이 없다. 그런 간단한 설명만 있었어도 이 소설의 구성이 왜 이런지 쉽게 납득이 갈텐데...

그래, 그런 것 쯤이야 눈 감아 줄 수 있다. 그런건 말 그대로 출판사의 배려지, 필수 사항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 외에도 심각하다면 심각한 번역적 오류가 세 군데나 눈에 띈다.(갖고 있는 원서와 직접 비교해보았으니 확실하다.)

1) 내용 중 유키호가 'R&A' 혹은 'R&B'라는 부티크를 개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R&A' 혹은 'R&B'라는 가게 이름이 원작에는 'R&Y'라고 나오는 것이다. 생각을 해보라. 'R&A'나 'R&B'라고 하면 가게 이름이 왜 그런지 쉽게 유추할 수 없지만 'R&Y'라고 하면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 의미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바로 료지와 유키호의 영문 이니셜이다. 그것을 유추하게 되면 유키호를 보는 독자의 시각이나 소설 전체를 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다. 일본어도 아니고 원작에 버젓이 영문으로 나오는 것을 번역본에서 'R&A' 'R&B'로 쓰다니...아마 교정상의 실수겠지만 독자로서는 영 마음이 편치 않다. 게다가 처음에는 'R&A'였다가 나중에는 'R&B'로 바뀌자 1호점, 2호점에 따라 가게 이름이 바뀌는 줄 알았다는 독자도 있다;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다.-_-;

2) 중권 259쪽 15째 줄을 보면,

"저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게 56년인데요."

라는 대사가 나온다.
책을 읽다가 이 부분땜에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모른다. 이야기의 시작이 1973년경인데, 어떻게 56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가 있느냐 말이지. 태어나지도 않았을텐데; 이것도 원서와 비교를 해보았는데, 이럴수가! 원서에도 56년이라고 되어 있는게 아닌가. '이게 어떻게 된 거지?'하고 곰곰히 생각해봤더니 세상에, 그건 아직 황실이 존재하는 일본에서 사용하는, 그 나라 고유의 연호였던 것이다. 즉, 56년이란 말은 쇼와昭和 56년을 뜻하는 것. (서기로 고치면 1981년이 된다.) 연호사용이 자연스러운 일본인들이야, 앞에 굳이 '쇼와昭和'를 붙이지 않아도 금방 알겠지만, 외국인인 우리나라 사람은 (일본의 연호 체계를 모르는 이상) 그걸 알리 만무하다. 원서에 아무리 달랑 '56년'만 나와있어도, 번역하는 사람이 조금만 센스를 발휘해 주었더라면 서기로 고쳐서 번역할 수 있었을텐데... 참 아쉬운 부분이다.

3) 중권 275쪽 밑에서 5,6째 줄에,

"(생략) 가까이 가면 힘이 방사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오로라처럼?"

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건 원작과 굳이 비교해보지 않아도 오역이라는 걸 알았다.
위의 대사를 미루어보아 분명 '오로라Aurora'가 아닌 '오오라Aura'(혹은 아우라) 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원작에는 'オーラ'(Aura)라고 되어 있었다.
'오로라Aurora'와 '오오라Aura'는 의미가 완전히 다른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에휴;


뭐, 이러저러한 이유로 하여 별 하나를 뺐긴 하지만, 내용면에서는 별 5개를 꽉 채워 주고 싶은 책인 것은 변함없다. 혹시 개정판이 나온다면 이런 것들을 꼭 수정, 보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신기루 2006-08-18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재밌는 책을 이제서야 읽었네요;; 그래도 밤새서 읽었어요ㅋ
'공생관계에 놓여진 대포새우와 문절망둥이처럼 료지와 유키호도 서로에게서 태양을 구하려 했겠지? 그러나 그 태양은 결코 낮에 뜨는 진정한 태양이 될 수 없었기에, 언제나 밤을 하얗게 비추는 가짜 태양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비추는 자신은 서로에게 그림자처럼 살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니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나는 애처롭고 가슴이 먹먹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인 것을.'
이 부분 정말 감동, 동감이예요 T-T
(이 말 하려고 댓글 쓰는 중.. ^-^;;)
심각한 번역 오류 1번은 정말 화가 나고 2번은 저도 의아했으나 대충 짐작했고 3번은 모르고 그냥 넘어갔네요 아 민망;;
리뷰에 감동받아서 'Thanks to' 날리고 갑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읽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소장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았거든요^-^)

다소 2006-08-1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푸른신기루님!!^^
땡스투 날려주시다니 감사해요. 헤헤~
밤 새서 읽으시다니..^^ 그 기분 알 것 같아요. 저도 이 책 읽을때, 완전히 빠져들어서 봤거든요.. 하하. 개정판이 새로 나와주길 바라는데... 별로 기대는 안해요.ㅠㅠ(그래도 쪼꼼~ 희망을!!)

미미달 2007-08-07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정말 꼼꼼하신걸요?
오로라의 경우도 읽으면서 아우라가 아닐까 싶었는데, 역시 그랬군요. -ㅇ-

다소 2007-08-0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말고도 일서번역본 중에 '오오라'를 '오로라'로 번역해놓은 책을 종종 봐요.
어감이 좀 비슷하긴 하지만, 그래도 의미가 확연히 차이가 나는 만큼 좀 신경 써주면 좋겠는데...ㅠ 참 안타까워요.;

니나 2009-01-06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 R&Y와 R&A/B의 의미는 너무나 다른 거잖아요!!! 럴수 럴수 이럴수가!!!
덕분에 쪼금 더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그런 것이었군요. 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