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아테네 1 신일숙 환상전집
신일숙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작품명 사랑의 아테네
작가명 신일숙
장르 순정, 로맨스
발행정보 1985년 발표 : 대본소용 완결(전5권)
1993년 만화잡지 『댕기』 별책부록(전9권)
1997년 서울문화사 단행본(전3권) 발행
2009년 학산문화사 신일숙 환상전집 3(전2권) 발행
특기사항 할리퀸 로맨스(앤 햄프슨의 '사랑의 아테네')를 원작으로 함

 

 

신일숙의 85년작으로, 초창기 작품군 중의 하나.

어느 작가라도 초창기 작품은 전성기에 비하면 서투르고 모자라지만, 84년에 ‘라이언의 왕녀’로 데뷔하여 활동이 뜸해진 현재까지 제법 일관된 흐름을 보이는 신일숙의 작품 리스트에서 <사랑의 아테네>는 조금 튄다 싶을 정도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일숙 하면 떠오르는 대표작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나 ‘리니지’ 같은 대작에서 작가가 창조해 낸 가상세계와 캐릭터, 장대한 스토리가 독자에게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 떠올려 보면, 동명의 할리퀸 로맨스(앤 햄프슨의 ‘사랑의 아테네’)를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이러한 탄생 배경부터가 이질적이다.


 

작가의 말에서도 나오지만 그녀의 오리지널 작품에서는 나오기 힘든 캐릭터들이 대거 출연하기 때문에, 만약 작가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만화만 본다면 (팬이 아닌 다음에야) 신일숙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시대물에서는 빛을 발하지만 현대물에서는 어쩐지 그 매력이 반감되어 버리는 그림체 -<사랑의 아테네>의 경우 설정이 외국이고,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많아 그나마 낫지만-, 초창기라 채 다듬어지기도 전의 그림체를 보면 ‘이거 정말 신일숙 만화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작가의 오리지널 작품이자 데뷔작이었던 ‘라이언의 왕녀’가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초석이라 불릴 수준의 가능성과 완성도를 띠며 신일숙스러움을 발산했던 걸 생각해보면, <사랑의 아테네>는 오히려 습작 같은 느낌이 들 만큼 풋풋하다. (왼쪽 그림을 보면 우리나라 만화가들의 초창기 그림이 대개 그렇듯 일본 만화의 영향이 상당히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신일숙 특유의 그림체가 형성되기 전이다. 세라와 다크의 설정샷!)


고전적 로맨스 장치의 안정적 활용


그리스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세라는 그리스 관습에 따라 집안이 정한 남자와 결혼해야할 상황에 처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상형과 너무나 먼 청혼자의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가출을 감행하고 만다. 한편, 영국 귀족가문의 자제인 바람둥이 다크는, 6개월 안에 결혼할 것을 전제로 유산을 상속받게 받게 되자 그에 대한 충격과 반발심으로 여행을 결심하게 된다. 그런 두 사람이 우연히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만나게 되고, 서로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다크는 세라의 티없이 맑은 모습에 점점 마음이 끌리게 되고, 세라 역시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으로 혼란스러워 한다.

천진난만 미소녀와 흑발냉미남의 결합이다. 자란 환경, 생활 방식, 가장 기본적인 성향에서 태도, 성격까지 도무지 접점이 없는 두 사람이 그 대척점에서 서로를 향해 다가가다 마침내 사랑을 이루게 된다는 상투적인 설정은, 한편으로는 촌스럽고 유치할 수 있지만 작품이 발표되었을 당시의 소녀감성에 입각해보면 충분히 가슴 떨릴만하다. 이러한 고전적인 스토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하게 변주되어 온 소재가 아니던가. 신일숙은 이러한 점을 할리퀸 원작에서 충실히 끌어오면서도, 캐릭터에 살을 붙이고 변형을 해가며 작품을 환기시킨다. 로맨틱한 장면은 만화이기에 조금 더 극적으로, 식상한 장면에선 약간의 유머 코드를 집어넣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부여한다.


매력적인 서브남과 서브여의 이야기. 조용하지만 강한 단역들의 활약.


이렇듯 주인공들이 전형적이면서도 만인에게 무난하게 어필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라면, 매너남 찰스와 차도녀 제니는 주인공들과 대비되는 신선한 조합인데, 이들의 서브 스토리가 있었기에 <사랑의 아테네>가 좀 더 재미있어지지 않았나 싶다. 제니는 다크보다는 덜 하지만 부모의 불화로 인한 약간의 성장 결핍이 있는 인물이다. 야무지게 행동하지만 오빠를 강하게 의지했고, 그래서 다크와 세라의 결혼이 재산을 탐낸 오빠의 얄팍한 결정이란 생각에 배신감을 품고 있다. 그 결정에 동참한게 찰스이기에 그에게 화를 내지만, 그런 제니를 좋아하는 찰스의 끈덕진 구애와 포용력은 순진한 세라와 냉소적인 다크의 관계를 역으로 뒤집어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온화하면서도 강단있고, 편견보다는 사람 자체를 들여다볼 줄 아는 혜안을 지닌 어머니 역의 리즈 모건은 세라와 다크의 사이에서도, 제니와 찰스 사이에서도 징검다리 역할을 200%해내는 멋진 부인.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강한 하인 프레스톤과 자네트 역시 확고한 캐릭터를 가진 이 만화의 주요 인물이다. 사실 세라 같은 세상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캐릭터는 까딱하면 민폐형 인물로 전락할 수 있는데, 이들 단역들의 활약으로 순진무구한 캐릭터가 정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세라가 외로워서 친척 찾는답시고 일 저질렀을 때, 이들의 보이지 않는 활약이 없었다면 보는 사람은 꽤나 답답했을 것 같다.

혼자 김칫국 마시다가 발악하는 재미없는 악역 클라린스는 의도치 않게 주인공(및 서브 주인공)의 사랑의 가교 역할을 충분히 해내며 막판엔 시크하게 퇴장했고, 그저 순수하게 주인공을 좋아한 죄로 이리저리 얻어터기만 하다 떠난 토마스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낸 인물.


<사랑의 아테네>_서울문화사 : 소장중


하지만 온갖 수사 둘러서 거창하게 말해도 <사랑의 아테네>가 먹히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지 오래라는 걸 안다. 이제 이 만화의 주된 고객은 8090세대의 향수를 쫓는 어른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이 작품, 더 나아가 '옛날 만화'가 가지는 의의는 무엇일까? 항간에 부는 '고전 다시 읽기 열풍'의 관점으로 보자면, 결국 옛 작품을 다시 보며 새롭게 의미를 되새기고 재조명 혹은 재창조(혹은 비틀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고전 만화 다시 읽기


내용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세라는 '피보스'가 청혼을 하러 오러 오기 전까지만 해도 혹시 '꿈 속의 왕자님은 아닐까' 막연하게 상상한다. 그러나 땅딸막하고 못생긴 피보스가 눈앞에 나타나자 기겁을 하고 도망치며, 평생 결혼을 안 해도 좋다고 소리를 지른다. 처음 만화를 읽던 당시에는 피보스란 존재는 세라가 집을 나가 다크를 만나게 할 구실에 지나지 않은 엑스트라에 불과했지만, 다 커서 다시 읽다보니 피보스는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세상의 피해자가 아닌가. 사실 이러한 설정은 '오만과 편견'에도 등장하지만, 콜린스는 속물스럽고 찌질하기나 했지... 피보스는 결혼하면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순박하게 청혼만 했을 뿐인데, 단지 외모가 못 생겼다고 사람을 면전에 두고 뛰쳐나간 세라 덕분에 마음에 단단히 상처를 입었을 듯 싶다. 심지어 그 세라는 며칠도 안 되어 잘생기고 돈 많은 귀족 남자와 결혼을 해서 외국으로 가버렸으니, 관습이 엄격한 만큼 소문도 빠른 동네에서 얼굴 들고 다니기 여간 힘들지 않았을까. 주인공의 로맨스를 위해서 나머지들은 그야말로 '쩌리'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지만, 피보스의 경우는 단 두컷(상상컷까지 세컷) 만에 광속 퇴장. 피보스가 비뚤어진다면 그건 세라탓. 제목이 '사랑의 아테네'인 만큼 자기들은 로맨스 흩뿌리며 설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망할 아테네'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사실 이런 식으로 뜯어본다면 남아날 캐릭터 있겠냐만서도, 연륜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시각차는 분명히 존재하므로 이런식의 만화읽기도 어떤 면에선 신선하고 재미있다. 각종 만화와 드라마를 섞어서 내용을 아예 더 전형적으로 비틀어 본다면, 세라 때문에 충격받은 피보스가 각고의 노력 끝에 몸짱, 얼짱이 되고 돈까지 많이 벌어 세라 앞에 당당히 나타나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세라에게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고 일갈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응?) 아니면 눈 옆에 점하나 붙이고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왜 나를 아프게만 해~...(중략) 용서못해~♬"라며 복수라도....!!! (푸학!) 농담처럼 썼지만, 결국 고전이란 이렇게 읽어도 저렇게 읽어도 보편적인 재미라는 게 있기 때문에 고전이 아닐까. 클래식의 위엄이란 거지.


하지만 몸짱의 기회를 원천차단해버린 저 (다리) 라인 어쩔겨.-_ㅠ


뜬금없이 책장 깊숙이 박혀있던 <사랑의 아테네>를 굳이 꺼내 읽은 건, 이사를 대비해 정리할 책들을 고르다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실은 '리니지'를 읽고 싶었는데, 찾다보니 '리니지'보다 이게 더 책장 바깥 쪽에 꽂혀있어서 먼저 읽었다.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는 토끼 같지만 이것도 썩 나쁘지 않지!) 내가 하고 싶던 블로그 프로젝트(쓸 데 없이 거창하다;) 중에 '읽은 만화 몽땅 리뷰하기'가 있는데 스타트로 끊기에 나쁘지 않은 만화기도 하고. 여튼 글 쓰면서 구글링을 통해 <사랑의 아테네> 이미지를 좀 찾아봤는데, 별의 별 게 다 있어서 새삼 구글의 위대함에 감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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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아테네> 원작.
국내 할리퀸 로맨스의 산실 '신영미디어'에서 나왔다.


 

<사랑의 아테네> 대본소 용. (전 5권 완결)
만화방에 가면 저 주홍색 책등의 향연이 눈부셨지.




 

 

<사랑의 아테네> 댕기 부록. (전 9권 완결) : 사진에는 여덟 권 밖에 없다.
나도 이거 2권 빼고 다 갖고 있는데, 박스 찾기 힘들어서 구글링해서 찾은 사진으로 대체.




 

 

<사랑의 아테네> 현재 시중에 판매중인 학산문화사 버전. (전 2권 완결)




 

 

이건 <사랑의 아테네>와 하등 상관이 없는데, 저기 적힌 신일숙의  '18세의 순수' 때문에 급 저장. 이슈 창간호와 창간 2호에 실린 저 만화 은근히 좋아했는데, 아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ㅠ_ㅠ (검색해도 안 나옴) 최근 완간된 신일숙의 환상전집 시리즈에 꼽사리 껴서 실리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현대물이라 취급을 안 해주는지 어디에도 실리지 않았다. 신일숙도 나름 컬러화보나 단편을 꽤  낸 작간데, 예전의 김혜린 단편집 '노래하는 돌'처럼 몽땅 묶어서 거대 단편집 하나 내주면 좋겠다. 내가 가진 '나의 이브'나 '크리슈티'랑 중복돼도 좋으니까 저거 '18세의 순수' 실어서 좀 내주면 안 되나? (그나저나 '이슈' 그립네~ 창간호부터 한 호도 빼놓지 않고, 대학가서도 모았던 집착의 산물인데... 1996년 1월 1일 창간해서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는 걸 보면 참 대견하다 싶기도 하고. 창간호에 시작했지만 연재 중단으로 끝을 기약할 수 없게 되어버린 한승원의 '프린세스'를 보니 속쓰리기도 하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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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9 작성, 알라딘에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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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31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소 님 만화마니아셨군요. 리뷰가 아주 알찹니다....

다소 2014-01-31 23:19   좋아요 0 | URL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만화'라고 농담처럼 얘기하곤 하지요. 심지어 수능 선택과목도 만화 때문에 세계사를 선택할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빠져있던 만화가 고대의 지중해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거든요.) 망할' 청보법 이후로 한국 만화계가 많이 죽어서 슬픕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2-01 16:49   좋아요 0 | URL
개새끼들이었죠. 청보법.... 정말 악법입니다.
도대체 만화가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정말 묻고 싶습니다.
내 친구만 해도 일본에서 만화 그립니다. 한국에서는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요...
그곳에서 고군분투하는 걸 보면 ( 결국은 술만 먹는 귀신이 되었지만 ) 안타까워요...

다소 2014-02-01 20:34   좋아요 0 | URL
악법중의 악법. 청보법! 당시 만화계는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 소재도 다양해지던 시기였고, 그만큼 만화잡지도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는데 안타깝죠. 그 이후로 만화잡지란 잡지는 다 폐간되고, 지금 명맥을 잇고 있는 건 그나마 대형 출판사에서 나오는 한 두권 뿐이죠. 그러다보니 만화계는 점점 일본만화가 잠식해가고, 당시 만화가들은 다른 살길을 모색하거나 웹연재로 넘어간지 오래... 하지만 그것도 극소수다보니 더더욱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죠. 그래놓고 딴 나라에서 소위 돈 되는 문화 컨텐츠가 나오면 우리나라는 왜 저런 걸 못만드냐고 닦달을 하질 않나, 창조 어쩌구 하면서 비교질 해대는 거 보면 한심해서 눈물이 다 납니다.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저변을 마련해주지는 못할 망정 죽여놓기 바쁘면서 결과물은 거창하길 바라다니... 정말 입맛이 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