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에 관해서는 사전 정보가 거의 없이 받아든 책이라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레즈비언 역사 스릴러'라는 다소 생소한 장르라는 것과 슬쩍 훑어본 인터넷 서점 리뷰에서 아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처음 책을 받아들었을 때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드커버에다 총 726쪽의 방대한 분량은 둘째치고, 행간이 좁아 글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그냥 몇 페이지를 훑어보는 것 만으로도 기가 질렸기 때문이다. 작은 판형임에도 한 쪽에 30줄이라니...정말 대담한(혹은 무모한) 편집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두껍고 빡빡한 책은 언제나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얼마나 방대한 양이든 모조리 독파해주지.'하는 정복욕과 '눈 아프겠다. 며칠은 걸리겠군. 읽다가 지칠지도 모르겠어.'하는 노파심. 나는 이 두가지 감정들을 느끼면서 책의 커버를 넘겼다. 과연 명성만큼 대단한지 두고보겠어, 라는 생각도 잠깐 하면서. 리뷰 평점이 높다는 것은 일종의 인증(?)같은 것인데, 일단 일정 수준의 재미를 보장하고 있다는 것이므로 그만큼 기대치를 높일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 그 기대치 때문에 실망할 확률도 높다는 위험부담도 감수해야 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니까. 그래서 담담하게 그러나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읽게된 [핑거스미스]는, 사실 운 좋게 내 손에 들어오게 된 책인데, 더욱 운 좋게도 내용까지 끝내줬다. 두껍고 빡빡해서 읽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까, 하던 초반의 우려와는 달리 작품을 읽는 내내 두근두근했던 기억이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1부의 마지막에서는 예상치도 못했던 반전이 튀어나와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 침대에 널부러져서 책을 읽고 있다가 그 반전에 놀라, 순간 벌떡 일어나서 자세를 고쳐잡았을 정도다. 그리고 박수를, 짝짝짝. 내 반응이 다소 과장되어 보이긴 하나, 1부를 다 읽을 시각이 새벽 2시 정도였는데, 고즈넉한 밤중에 그런 대반전을 맞이하니 그 효과가 2배로 다가왔음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이것은 흡사 내가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제인에어]를 읽었을 때의 놀라움과 맞먹을 정도였다. 여기서 잠깐, 밝혀두지만 내 최초의 반전소설은 [제인에어]였다. 어디가 그렇게 반전이었냐고 물으신다면 얘기하기 조금 곤란하다.;; 스포일러가 되어버리니까. [핑거스미스]는 굳이 그 반전이 아니라도 읽는 동안 이상하게 [제인에어]가 생각났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작가의 인터뷰를 보니 그녀가 이 책을 쓰는 데 영향을 받은 작품중의 하나로 [제인에어]를 꼽았다. 왠지 반가운 느낌.

1부가 아니더라도 이 책은 놀라움 연속인데, 내가 그 반전에 뒷통수를 크게 맞았던 데에는 아마 이 소설을 '레즈비언 역사 스릴러'라고 한정지어 생각했던 이유가 가장 큰 듯 하다. 특히 방점을 '레즈비언'에다 찍고 봤다가 된통 당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흔하지 않은 소재니까. 허나 이 소설은 그 예상을 뒤집어 버리면서 시작되는 반전부터가 진정한 묘미다. 이는 1부에서 조금 더디게 흐르던 독서의 진행이 2부 부터 눈에 띄게 빨라졌음을 뜻한다. 반전의 효과로 집중력이 높아진 탓이다. 또 1부와 2부, 3부의 시점이 각기 다른 것과 문체의 변화도 재미있다. 이야기의 화자가 바뀌면서 마치 분위기가 환기되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래서인지 초반 열댓 장 빼고는 700페이지가 넘는 책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아아, 어떻게 하면 이 책에 대한 좀 더 맛깔스러운 리뷰를 쓸 수가 있을까, 고민을 했는데...역시 쉽지가 않다. 추리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소설, 게다가 반전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설은, 읽을 때는 사정없이 빠져들지만 그 감상을 쓰기는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행여 스포일러가 되어 책을 읽을 예비독자들의 재미를 빼앗아 버리면 안되니까. (스포일러 그거, 예고없이 당하는 사람에게는 엄청 불쾌한 일이 되고 만다. 난 심지어 예전에 인터넷 서점에서 리뷰 읽다가 중요한 '반전 포인트'를 누설한 리뷰어에게 살의를 느껴본 적도 있다.-_-;;;) 어쨌든 짧지만 강한 한마디를 남기자면 '영화, 식스센스에 버금가는 반전'이라고 말하고 싶다. 조금 촌스러운 추천 문구겠지만 그 강렬함은 정말 상당하니까. 아, 혹시 이 리뷰를 읽고 그 반전이 뭘까, 고민하다가 책의 소소한 재미를 놓치는 일은 없길 바란다. 이미 알려진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말고, 화려한 조명 뒤의 어두운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니까 말이다. 특히 런던의 읍습한 뒷골목이라든가 한적한 시골 대저택의 풍경, 여인네들의 복장이나 그 시대의 문화적 관습,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위치와 대우가 어떠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문장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어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회가 된다면 그 시대의 문화사를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을 정도. 역사와 문화라면 무조건 열광하고 보는 내게 추리 혹은 스릴러라는 요소를 덧씌워놓았으니, 어쩌면 내가 이 책에 빠져드는 건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작가가 이 책을 위해 얼마나 탄탄한 자료 조사를 했는지 느껴져서 더욱 만족스러웠기도 했고. 여러모로 이 책은 나의 버닝 포인트를 제대로 눌러준 책이었다.

좋은 책은 그 작가의 다른 저서들이나 관련 작품을 모조리 감상해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세라 워터스의 처녀작이자 [핑거스미스]와 닮은 구석이 있(다고 하)는 [벨벳 애무하기]가 읽고 싶어졌다. 조만간 읽어야지! 아, 그리고 BBC에서 3부작으로 만들어진 TV판 [핑거스미스]도 있다던데, 그것도 보고 싶네. 평을 들어보니 꽤 괜찮던데... 봐야겠다. 앗, 그러고보니 이 작가 [나이트워치]의 작가다. 이것도 읽으려고 했던 책인데...?! 와, [핑거스미스]의 파급효과가 대단하구나... 훗, 고로 당분간 난 좀 바쁠듯 하다. 읽을 책이 많아져서 행복하다. :)


덧) 어머나, [벨벳 애무하기]는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출간이 안 된 상태고, [나이트 워치]는 내가 알고 있는 책과 다른 작품이다; 제목이 같아서 같은 작가의 작품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구나... 이럴수가...;;;; 에잇, 바보. 괜히 들떠서 호들갑 떨었네...;ㅁ; 그럼 언제쯤 출간될까나...읽어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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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6-12-22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 홈페이지에 가서 찾아본적이 있는데 세라워터스 책은 앞으로도 나온대요.^^
티핑더벨벳이 먼저 나오고 어피니티가 나올것같습니다.
내년쯤에 티핑더 벨벳이 나온다는데....
저는 TV판으로 티핑더벨벳을 봤는데 핑거스미스와는 또다른 의미로 어마어마한 TV드라마라는......(드라마치고는 야해요.후훗)

다소 2006-12-2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pple 님// 그렇군요, 기대되네요.^^
[핑거...]도 TV드라마 치고는 강도가 좀 세다고 해서 놀랐는데, [벨벳...]도 그런 모양이군요. 호오...더욱(?) 기대되는데요? 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