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는 초창기의 무라카미 하루키와 묘하게 닮아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떠올렸다. 부조리한 삶에 대한 대응 방식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박민규의 아이들이 밑바닥이라면 하루키의 아이들은 중산층이다. 박민규의 아이들이 깔아지고 막아낸다면 하루키의 아이들은 견디고 침잠한다.
핑퐁을 씀으로써 박민규는 어느 정도 할 말을 다 한 것 같다. 삼미나 핑퐁이나 다를 것은 하나 없다. 삼미가 아기자기한 이야기라면 핑퐁은 요설이다.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