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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로
이인화 지음 / 해냄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1937년의 상하이라, 멋진 배경이다 싶었다. 거기에 초반부에 물씬 풍기는 허무주의적 인간 군상들의 모습도 하비로라는 제목에 제법 잘 어울린다 싶었다. 그런 식으로만 나간다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지리라 생각했다. 작가 스스로가 소설가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라고 선언했으니 독자로서의 관심 또한 이야기의 재미에 맞춰질 수밖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는 빼어난 이야기꾼은 못 되었다. 중반부터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나간 이야기는 놀라운(이라기보다는 황당하다는 말이 더 적합한 것 같지만)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씁쓸한 기분으로 책을 덮은 뒤 생각해보았다. 이인화는 그 자신이 내세우기전부터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역사를 그만큼 자유자재로 주물러 작품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소설가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라고 한 번 더 강조한 작품이 엉성하기 그지없다니.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20대를 위한, 게임에 익숙한 세대를 위한 이야기, 그게 함정이 아니었을까? 40대를 눈앞에 둔 작가가 20대를 위한 소설을 쓴다는 것, 그게 바로 문제였다. 자기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남을 위한 이야기라니 그게 바로 자충수였다. 작가 스스로가 이야기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이 작품의 힘이라는 것을 잊은, 당연한 결과였다. 시나리오와 게임의 원재료로서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 자체의 완결성은 중요한 법. 작가 스스로가 이야기와 소설을 다른 격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이야기는 조금 엉성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서운함과 억울함을 담아 몇 자 끄적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