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세월의 위력은 무섭다. 세월은 절대불변일 것 같던 하루키마저 변하게 만들었다. 그는 까라마조프의 형제와 같은 작품을 만들겠노라고 했지만 결과물은 하루키표 종합선물세트였다. 부록으로 이전까지 보기 힘들었던 엄숙한 교훈들과 함께.
하루키의 몰락은 어쩌면 <태엽감는 새>에서부터 예견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태엽감는 새는 과거의 작품들에 비해 시공간의 폭이 훨씬 넓어져 있었다. 그것은 이전의 비사회적인 37세 남자 주인공이 감당하기에는 제법 힘에 부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만해도 하루키는 자신의 의도를 작품 속에 깊이 감춰놓을 줄 알았다. 그래서 <태엽 감는 새>가 준 일말의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루키에 대한 신봉을 멈추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 이후 하루키는 본격적으로 삐걱대기 시작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의 심심하기까지한 결말과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가 보여준 과도한 사회성은 나의 고개를 삐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해변의 카프카>는 결정타를 날리고 말았다.
이 작품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재미있고 독창적이었고, 15세 소년의 자아찾기 몸부림도 감동적이었다. 문제는 다른 작가가 아닌 하루키가 이 작품을 썼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좋은 의도로 보자면 하루키의 모든 역량을 다 바쳐 써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단순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15세 소년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출판사는 여러 번 강조하지만 이 작품 속의 15세 소년은 술만 마시지 않을 뿐 이전 소설의 37세 남성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육체를 단련하고 음악을 골라 듣고, 어둠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그의 모습은 이전 주인공의 세계에서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 있지 않다.
입구의 돌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는 태엽감는 새가 지닌 의미와 동일하다. 오히려 돌과 함께 다루어지는 동굴의 이미지는 이미 식상한 상징이기도 하다. 환상과 현실이 축을 이루는 이야기는 이미 <세계의 끝...>에서 본 적이 있고, 여주인공의 이미지는 <국경의 남쪽...>의 여주인공과 비슷하며, 고양이와 대화하는 노인의 이미지 또한 <태엽 감는 새>의 자매(이름을 모르겠네)와 비슷하다. 단 하나 다른 것은 모노가타리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 요소는 오히려 작품 전체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에는 부정적인 기여밖에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로 풀어가던 하루키의 소설이 그들 이야기의 도입으로 설명적으로 변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하루키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루키가 신작을 쓴다면 그 내용이 어떻든 무조건 달려가 구입할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다만 그가 앞으로는 <댄스댄스댄스>나 <바람의 노래를...>와 같은 작품을 쓰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 뿐이다. 젋은 하루키, 세상에 참여하기보다는 소외된 듯한 느낌을 주었던 그 젊은 하루키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