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하여 (구) 문지 스펙트럼 11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선집이란 종류의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편집 앨범을 사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일이다, 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선집을 살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주머니에 돈이 없을 때, 그러나 책은 읽고 싶을 때......

김광규의 시는 언제나 그렇듯 매우 쉽다. 모르는 단어를 찾기 위해 사전을 찾아야할 필요도, 시를 이해하기 위해 두세 번을 다시 읽어야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왜 그의 시는 읽는 이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일까? 시인이 뭘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어지고, 숨고 싶어진다.

[문 앞에서] 같은 시를 보자. 너무나 평범한 시다. 지옥문일까? 사람들이 초조하게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결국 청소원이 환대를 받는다는 시는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왜 그 시는 독특한 울림을 갖고 있는 것일까? [부끄러운 월요일]이란 시도 그러하다. 호헌 발표를 하던 그 날 시험 감독을 하고 있던 화자는 커닝하는 학생들을 잡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냥 그 뿐이다. 하지만 그 시의 행간에는 많은 내용들이 녹아들어가 있다.

이 시선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그 이]란 시다. 누군가가 결국은 돕고 있다는 깨달음, 아무리 어려워도, 사는 게 팍팍하고 속임수 같기만 해도 그래도 누군가 나 몰래 나를 돕고 있다는 깨달음. 부끄럽고, 부럽다. 이런 시를 읽으며 자신의 한심함을 자책해야 하는 삶이 부끄럽고,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심성이 부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