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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파 - 새로운 시와 시인을 위하여
권혁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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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한국 시단의 비평 담론 한 가운데 권혁웅의 『미래파』가 있을 것이다. 목차를 찬찬히 살펴본 뒤 1부만 읽었다. 1부 가운데에서도 「감각의 논리」, 「뜨거운 환상과 차가운 환상」, 「상사(相似)의 놀이들」, 「미래파」, 이렇게 네 편의 글만 읽었다. 적어도 비평가라면 잘 쓰는 작가의 좋은 작품들을 대상으로만 비평을 써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자신의 입맛에 맞는, 다시 말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손쉽게 이끌어낼 수 있는 작품들이라 하더라도, 그 성취도 여부를 따지지 않은 채 덮어 놓고 비평을 써서는 안 되지 않을까? 비평가 개인의 사사로운 관계에 이끌려 쓰는 비평을 이제는 그만 둬야 하지 않을까(이는 권혁웅 뿐만 아니라 대다수 비평가들에게도 해당한다)? 1부에 실려 있는 비평들 가운데 김형술, 박서원, 조용미, 김정란 등 시를 못쓰는 이들에 관해 쓴 것들은 도무지 읽기가 싫다. 2부에서는 한국 현대시를 자꾸만 유형화하려는 시도를 보이는데, 나는 융 심리학의 냄새가 나는 모든 것들에 하품이 난다. 3부 역시 왜 비평가가 이런 작가들을 대상으로 글을 써야만 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먼저 「감각의 논리」. 그래도 권혁웅은 본인이 직접 시를 쓰는 비평가라 그런지, 문학 비평의 가장 기본을 어느 정도는 할 줄을 안다. 그나마 시를 시답게 볼 줄 안다는 뜻이다(거꾸로 말하자면 대다수 비평가들이 시 자체에 들어있는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환기시킬 줄을 모르거나 그런 작업에 태만하다는 것). 그러나 논리가 단순하다. 글의 맨 처음에서 데까르뜨의 관념론과 대립하는 감각의 논리로서 꽁디얔을 끌어온다. "콩디야크는 여기에 반대하여, 감각이 우리 인식의 유일한 기원이라고 말했다. 감각이 주의, 기억, 판단, 반성, 상상, 의지, 이해 같은 여러 의식 현상을 낳는다는 것이다(15쪽)." 서양 근대 인식론은 크게 관념론과 경험론, 이렇게 둘로 구분되지만, 그 둘 모두 (유물론에 대립되는) 광의의 의미로서 '관념론'에 포함된다는 개념적 구도를 비평가는 정녕 모르는 걸까? 왜 시는 언제나 관념론 안에서의 싸움이어야만 하는가? 시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유물론적으로 살필 수는 없는 것인가? 그리하여 그가 제시하는 '감각의 논리'는 피상적이고, 추상적이고, 범박하고, 단순하다. "하지만 테마에 관한 한은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테마가 아니라 그걸 전달하는 방식이다(22쪽)." "중요한 것은 진술이 아니라 진술을 낳은 감각 자체의 운동이다(23쪽)." 테마와 방식, 진술과 감각의 이분법. 이야말로 그가 애초에 벗어나고자 했던 데까르뜨의 '영혼-육체(mind-body) 이분법'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 걸까? 아니, 시에서 어디까지가 테마이고 어디서부터 표현 방식인지 구분할 수가 있단 말인가? 좋은 시일수록 진술과 감각이 서로 분리 불가능하게 융합되는 지점을 구현한다는 점을 일부러 외면하는 것인가?

  아마도 일부러 외면하는 것이리라(그럴 거라 믿고 싶다). 최대한 호의적으로 찬찬히 읽어보자. 그의 논지 속에서 테마, 진술, 전언 등은 시적 대상에게 실재의 주체로서 동일성을 행사하려는 시적 자아와 관련된다. 반대로 감각은 시적 자아와의 동일시로부터 벗어나는 이질적 대상들의 자리를 되찾아주기 위한 무기이다. 이는 2000년대 한국 시단의 새로운 경향을 옹호하여 기존 시의 미학을 낡은 것으로 비판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등장하는 '주체/대상'의 문제이다. 이는 기존의 한국시가 답습해온 틀에 박힌 방식을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점에서는 꽤 타당해보인다. 그러나 진정으로 문제는 '주체'일까? 시에서 근대적 주체만 해체시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까? 인간의 삶을 획일적 형태로 통제하려는 근대 사회의 억압적 기제에 대한 전면적 비판의 흐름 속에서 주체에 대한 문제는 발생한 것이다. 현대철학에서 주체의 문제가 어떤 맥락에서 제기되었는지를 미래파 비평은 처음부터 다시금 살펴봐야 할 것이다. 권혁웅은 자신의 비평 속에서 주체 중심의 한국 시가 낡았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말아야 했다.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다 급진적인 문제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하여 주체 중심의 한국 시가 낡았다는 비판이 어째서 새삼 발견되었는지, 그 원인에 대해 상세하고 명료한 분석을 수행하고, 그 분석을 통하여 진정으로 근대체계가 횡행하는 지금-여기 인간의 삶에 시가 어떤 힘과 가치를 빚어낼 수 있어야만 하는지를 밝히는 데까지 나아가야만 했다.  근대적 주체의 해체 이후를 시 속에서 감각화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미래파 담론은 시가 인간의 삶에 왜 필요한 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그 성찰을 통해서만 구체적 육체를 획득하는 자기 나름의 대답이 결여되는 데에서 나오는 '관념론적'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시를 이제는 관념론적으로 보지 말고 유물론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나의 비판은 바로 이런 맥락과 맞닿는다. 

  「뜨거운 환상과 차가운 환상」은 김행숙과 김민정의 작품을 다루기에 읽어봤으나, 역시 그의 고질적인 '유형화하기' 버릇의 반복이다. 그가 더 좋은 비평가로 거듭 나기 위해서 이런 악습은 하루 빨리 털어내야 한다는 생각이다. 유형화가 왜 안 좋은가는 직접 내용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2000년대 한국시의 환상을 분류하기 위해 자신이 고안해 낸 틀에 짜맞추느라 시 자체를 놓친다. 특히 김민정 시에 대한 비평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녀의 두 번째 시집을 권혁웅이 본다면 아마도 아차, 싶을 것이다. 왜 그때 그런 글을 썼을까, 하고 후회하면서. 「상사의 놀이들」에서는 미셸 푸꼬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유사'와 '상사'를 구분하는 개념적 틀을 빌려왔는데, 한국 비평가들은 철학 공부를 조금 더 정확하게, 좀 더 정통적으로 할 필요가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푸꼬가 왜 계열화로부터 이탈하고자 '상사'라는 개념을 고안해냈는지에 대한 고민을 권혁웅의 비평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 사족을 덧붙이자면, 왜 한국의 비평가들은 각주를 제대로 달지 않는지? 각주를 통해서 인용한 부분의 정확한 출처를 밝히고, 그리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그 인용의 올바름을 확인하고 검증하도록 내맡기는 것은 모든 글쓰기의 기초적 태도이며 상식 아닌지? 권혁웅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그렇다는 것을 그들 자신은 자각하고 있는지? 대중들이 그리도 좋아라 하는 신형철도 주석에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을 문학 소비자들은 눈치나 채고 있는지? 애초에 인용을 남발하는 자체가 문제 아닌지? 사상들을 많이 쏟아넣는 것보다 단 하나의 사상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적절히 활용하는 게 좋은 비평가의 자세 아닌지?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사상들을 체득한 뒤에, 그 사상들을 뛰어넘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는 게 진정으로 실력을 갖춘 자의 태도 아닌지?  자신만의 해석과 입장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감추기 위하여 여러 겹의 위장막들을 펼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를 뽐내고자 하는 허영심에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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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4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각주가 비교적 명확한 비평가라면 허윤진을 추천합니다. 권혁웅은 미려한 문장으로 밀고나가는 편이라서, 주장의 출처를 분명히 하지 않거나 (정확히 지적하신대로)고질적인 유형화하기에 매몰되는데도 엄한 눈이 아니고서는 이를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지나가기는 합니다. 그러나 허윤진, 김진수, 강계숙의 경우 직접 인용이나 각주 두 방법을 통해서 출처를 명확히 하더군요.

담연 2014-02-25 10:16   좋아요 0 | URL
허윤진의 비평집을 최근에 읽었습니다. 비평집에 실리지 않은 시집 해설도 찾아 읽었습니다. 대단하더군요. 좋더군요. 저는 장성규를 염무웅 이후 최대의 평론가라고 부르고 다니는데요. 허윤진은 김현 이후 최대의 평론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 (1881년 봄-1882년 여름) 책세상 니체전집 1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안성찬.홍사현 옮김 / 책세상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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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판 서문
   
 

   자연이 수수께끼와 현란한 불확실성 뒤에 숨겨놓은 수치심을 보다 더 존중해야 한다. 어쩌면 진리는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 이유를 가진 여자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바우보Baubo가 아닐까?……오, 그리스인들이여! 그들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표피, 주름, 피부에 용감하게 머물며 가상을 숭배하고 형태, 음, 말 등 가상의 올림포스 전체를 믿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피상적이었지만―그것은 깊이에서 나온 것이었다! 현대 사상의 가장 높고 위험한 정상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고 밑을 내려다본 우리들 정신의 모험가들도 바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서문 4)

 
   

 1부

   
 

   나의 친애하는 동포이자 이웃인 그대가 도대체 종족에게 불리하게, 다시 말해 "비이성적"이고 "악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한다. 종족에게 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미 수천 년 전에 소멸되어, 이제는 신에게조차도 불가능한 일들이 되어버렸다. 그대의 최선의, 혹은 최악의 욕망들에 몸을 맡겨 그 바닥까지 내려가 보아라! 두 경우 모두 그대는 인류를 위해 진흥과 선행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칭송을 받게 될 것이다―물론 조소도 함께. 하지만 그대는 개인인 그대의 가장 커다란 장점조차도 전적으로 조소할 줄 아는 사람, 그대가 파리나 개구리처럼 한없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진실에 부함할 정도로 충분히 그대의 감정에 불어넣어줄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충분히 그래야 할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앎으로써 진리 전체로부터 우러나는 웃음을 웃을 줄 아는 것―그러기에는 지금까지 최상의 인간들도 충분히 진리의 감각을 지니지 못했고, 가장 재능 있는 인간들도 지극히 미약한 천재성밖에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웃음에도 새로운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종족이 전부이며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명제가 인류에게 체현되어 이 궁극적인 해방과 무책임에 이르는 길이 개개인 모두에게 항상 열려 있게 될 것이다. 또한 그때는 웃음이 지혜와 결합되어 "즐거운 학문"만이 남게 될 것이다. (잠언 1)

 
   

 

   
 

  가상의 의식.―인식을 가지고 모든 현존재에 직면할 때 나는 얼마나 커다란 경탄과 새로움과 두려움과 역설을 느끼는가! 나는 예전의 인간성과 동물성, 아니 태고 시대와 과거의 모든 것을 느끼는 존재가 내 안에서 계속 시를 짓고 사랑하고 증오하고 추론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갑자기 나는 이런 꿈에서 깨어나지만 내가 도달한 의식은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꿈꾸고 또 계속 꿈꿔야만 한다는 것이다. 몽유병자가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꿈꿔야 하는 것처럼. 이제 내게 "가상"이란 무엇인가! 본질의 반대인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가상의 술어에 불과한 어떤 본질에 대해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가상이 미지의 X에 씌우고 또 벗겨낼 수 있는 죽은 가면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내게 가상은 활동하고 살아가는 것 자체이다. 그것은 자기경멸 속에서 이 세상에는 가상과 도깨비불과 유령의 춤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내게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꿈속에서 "인식하는 자"인 나도 나의 춤을 추고 있다는 것, 인식하는 자는 이 지상의 춤을 오래 끌게 하는 수단이며, 그러한 한 현존재의 축제를 주최하는 자에 속한다는 것, 모든 인식의 숭고한 일관성과 결합은 아마도 꿈의 보편성과 모든 꿈꾸는 자들의 상호 이해, 그리고 꿈의 지속을 유지시켜주는 최상의 수단이라는 것을 나는 느낀다. (잠언 54)

 
   

 2부

   
 

  오로지 창조하는 자로서만!―내가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또 아직도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사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 사물이 어떻게 불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을 만큼 더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의 소리, 이름과 외양, 유효성, 관습적 척도와 무게 등 원래 의복처럼 사물에 덧입혀진 것일 뿐 그것의 본질은 물론 피부에도 낯선 것들이 그것에 대한 믿음과 세대를 거친 성장을 통해 그 사물에 유착되고 동화되어 신체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처음에 가상이었던 것이 결국 본질이 되어 본질로서 작용한다! 본질로 통용되는 세계, 소위 "실재"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그 기원과 모호한 망상의 껍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인가! 오로지 창조하는 자로서만 우리는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도 잊지 말자. 오랜 시간 동안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과 평가, 개연성을 창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잠언 58)

 
   

 

   
 

  예술에 대한 우리의 최종적인 감사.―우리가 예술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한 이런 종류의 교육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오늘날 과학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비진리와 허구에 대한 통찰, 인식하고 느끼는 현존재의 조건인 광기와 오류에 대한 통찰을 전혀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정직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마도 구토와 자살로 치달았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직성에 반대되는 힘이 있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결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데, 이것이 가상에 대해 우호적인 예술이다. 완성하고 마무리 짓는 일을 보는 것이 우리의 눈에 언제나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이때 그것은 더 이상 생성의 강을 건너 짊어지고 가야 하는 영원한 불완전성이 아니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여신을 짊어지고, 이러한 봉사에 대해 긍지와 순진한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현존재는 미적 현상으로서 나타날 때 우리에게 견딜만한 것이 되는데, 바로 예술을 통해 우리의 눈과 손,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심이 그러한 현상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잠언 107)

 
   

 3부

   
 

  우리가 살고 있는 별의 질서는 예외에 속한다. 이 질서와 그것에 의해 조건 지어진 지속성이 다시금 예외 중의 예외인 유기체의 생성을 가능하게 했다. 반면에 이 세계의 전체적 성격은 영원한 카오스이다.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질서, 조직 구조, 형식, 미, 지혜, 그밖에 우리가 심미적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에 따라 판단하건대, 실패한 시도가 규칙이며, 예외는 은밀한 목표가 아니다. 그리고 이 음악상자 전체는 결코 멜로디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을 영원히 반복한다. 더구나 결국 "실패한 시도"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비난을 내포하는 의인화이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우주를 비난하거나 찬양할 수 있겠는가! 우주에 무심함, 비합리 혹은 그에 반대되는 말들을 부여하는 것을 경계하자. 그것은 완전하지도, 아름답지도, 고귀하지도 않으며, 그런 것이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우주는 결코 인간을 모방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어떤 미학적 판단이나, 도덕적 판단도 우주에 적용되지 않는다! 우주는 자기보존 본능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도대체 본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주는 법칙이란 것을 알지 못한다. 자연에 법칙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경계하자. 자연에는 오직 필연성이 있을 뿐이다. 자연에는 명령하는 자도, 복종하는 자도, 위반하는 자도 없다. 목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연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목적의 세계에서만 "우연"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죽음이 삶에 대립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경계하자. 삶은 죽음의 한 형태일 뿐이며, 그것도 매우 희귀한 형태이다. 세계가 영원히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게하자. 영속적인 실체란 없다. (잠언 109)

 
   

 4부

   
 

  모든 행동은 일회적이고 재귀 불가능한 방식으로 행해진 것이다. 미래의 행동도 마찬가지다.―행동의 모든 규범은 조잡한 외적 측면에만 관계된다(지금까지의 모든 도덕 중에서 가장 내적이고 섬세한 규범조차도).―규범을 통해서는 평등의 가상, 오직 가상에만 도달할 수 있다.―행동을 전망하거나 회고하는 경우 각각의 행동이란 꿰뚫어 볼 수 없는 불가해한 것이며, 또 그런 것으로서 남아 있을 것이다.―"선함", "고귀함", "위대함"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는 결코 증명될 없다. 왜냐하면 모든 행동은 인식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우리의 견해, 가치 평가, 선의 목록이 우리의 행동의 수레바퀴에서 가장 강력한 지렛대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개별적인 경우들에 작용한 역학의 법칙을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견해와 가치 평가를 정화하는 일, 새롭고 독자적인 선의 목록을 만드는 일에만 우리의 생각을 제한하기로 하자!―"우리 행동의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곰곰이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렇다, 나의 친구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늘어놓는 도덕적 수다는 이 시대에는 구역질이 나게 한다. 도덕적으로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은 우리의 취미에 맞지 않는다! 이 수다, 이 고약한 취미는 지난 시대를 이 시대에도 얼마 동안이나마 질질 끌고 다니는 것 외에는 아무런 할 일이 없는 사람들, 결코 현재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요컨대 무수히 많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넘겨주도록 하자! 하지만 우리는 현재의 우리 자신이 되고자 한다! 새롭고, 일회적이고, 비교 불가능하고, 자기 스스로가 입법자이고, 자기 스스로를 창조하는 인간이 되고자 한다! (잠언 335)

 
   

 5부

   
 

  우리의 모든 행동은 근본적으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유일하며, 무한히 개별적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의식으로 옮겨지는 즉시 그것은 더 이상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현상론이며 관점주의이다 : 동물의 의식의 본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수반한다. 우리에게 의식되는 세계는 피상적 세계, 기호의 세계, 일반화되고 범속해진 세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의식된 모든 것은 평범하고, 희미하고, 상대적으로 어리석고, 일반적이며, 기호, 무리의 표식이 된다.―의식된 모든 것에는 근본적으로 커다란 타락, 위조, 피상화, 일반화가 결합되어 있다. 결국 의식의 증가는 위험한 것이다. 가장 의식적인 유럽인들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심지어 의식이 하나의 질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여기에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듯이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아니다. 이러한 구분은 (민중의 형이상학인) 문법의 동아줄에 묶여 있는 인식론자들에게 맡겨둘 것이다. 우리는 그런 구분이 허용되는지조차도 전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인식을 위한, "진리"를 위한 기관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무리, 종에 유익한 만큼만 "안다" (혹은 믿거나 상상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유용성"이라고 불리는 것 자체도 결국 믿음, 상상, 그리고 아마도 언젠가 우리를 몰락으로 몰고 갈 치명적인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잠언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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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시전집 - 탄신100주년기념
이상화 지음, 이상규 엮음 / 정림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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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화 시 전집을 읽음으로써, 드디어 나만의 한국 현대시의 정전(canon)이 완성되었다. 내가 구성한 한국 현대시의 위대한 전통은 김소월, 이상, 백석, 이상화, 김영랑, 정지용, 서정주, 김수영, 이렇게 여덟 명이다. 소월과 이상은 각각 한국 현대시의 시작과 끝을 대표한다. 백석과 상화는 공동체와 주체의 긴장 관계에서 각각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김영랑과 정지용은 각각 시의 음악성과 회화성을 극대화했다. 서정주와 김수영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시와 현실 사이에 놓이는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게끔 만든다. 여기에 두 명을 더 추가하면 딱 열 명으로 보기 좋은 숫자가 될 것인데. 그 두 명을 누구로 꼽을 것인가? 지금으로써는 박용래와 김종삼이 덧붙여져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본격적으로 이상화 시에 대해 이야기하자. 상화 시는 일반적으로 초기의 퇴폐적 낭만주의와 후기에서 보여준 민족의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로 구분된다고 설명되어 왔다. 바꿔 말하자면 그동안 그의 시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시에 담긴 정서에 주목해온 것이 지배적 풍토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화의 시를 읽는 가장 큰 재미는 역시나 시인이 언어를 부리는 뛰어난 재주와 섬세하고 치밀한 구성력을 살피는 데에서 나온다. 가장 먼저 우리가 민감하게 살펴야 할 지점은 그의 띄어쓰기 방법론이다. 그가 시를 쓰던 일제 식민통지 기간에는 법적으로 강제력이 있는 조선어 맞춤법 규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무질서적 모국어 공간이 역설적으로 오히려 언어의 생명력을 무한대로 표현해낼 수 있는 자유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다음 시를 보시라.

  사람 만 다라워진줄로 알앗더니
  필경 에는 밋고 밋든 한울 까지 다라워 젓다
  보리 가 팔을 버리 고 달라 다가 달라 다가
  이제 는 고라진 몸으로 목을 대자나 빠주고 섯구나!
 
- 이상화, 「비를 다고 ―農民의 情緖를 읇조림」 1연, 이상규 편, 『이상화시전집』, 정림사, 2001, 173쪽.
 
  '사람만'으로 붙여서 써야 할 것을 '사람 만'으로, '필경에는'으로 표기해야 할 것을 '필경 에는'으로 띄어 썼다. 반대로 '다라워진 줄로'라고 띄어 쓸 것을 '다라워진줄로'라고 이어서 써놓았다. 이는 운율에 대한 시인의 무섭도록 예민한 감각 탓이다. 시적 화자는 오랜 가뭄에 비를 간절히 바란다. 가뭄은 곡식만을 마르게 하는 것은 아니다. 비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사람의 목까지도 마르게 한다. 목이 바싹 마르다보니 갈라진 목소리가 툭, 툭, 끊어지는 것을 용언과 조사 사이 띄어쓰기로 신통하게 표현했다. 띄어쓰기에 따라 주의를 기울여 찬찬히 읽다보면, 빗물을 마시지 못해 바짝바짝 시들어 말라가는 보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농민과 그 농민이 키우는 곡식은, 거꾸로 곡식과 그 곡식이 살려내는 농민은 여기서 더 이상 둘이 아니다. 
  
  현실적 삶 속으로부터 생득적으로 끌어올려진 상화 시의 리듬은, 물론 그 자체로 뛰어난 시적 기교이면서도 동시에 농민과 노동자와 같이 이 땅 위에서 숨을 쉬며 땀 흘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언제나 향하는 리얼리즘 시적 정신의 매우 값진 성취다. 띄어쓰기 뿐이랴. 그의 시 한 편 한 편 짜임새는 또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한가! 저 빼어난 절창으로 널리 알려진 「빼앗긴들에도, 봄은오는가」는 모두 10연으로 이뤄져 있다. 거기서 맨 첫 행과 맨 마지막 행이, 2연과 (맨 마지막 행을 뺀) 10연이, 3연과 9연이, 4연과 8연이, 5연과 7연이 한 가운데에 6연을 놓고 서로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또한 '봄-해살-푸른한울-푸른웃슴' 등으로 이어지는 시어들과, '들-푸른들-논길-푸른설음' 등으로 이어지는 시어들이 각 연마다 알맞게 어우러진다. 
 
  사람은 온몸에 달비츨입은줄도 모르는가
  둘식 셋식짝을지어 예사롭게 짓거린다
  아니다 웃슬때는 그들의입에 달비치잇다 달니야긴가보다. 
 
- 이상화, 「달밤 ―都會」 4연, 위 책, 157쪽.
 
  이처럼 정교한 짜임새는 천지인(天地人) 세 요소를 따르는 형식이다. 가장 먼저 하늘은 인간을 초과하는 힘을 뜻한다. 하늘은 한 편으로 인간을 언제나 꿈꾸게 함으로써 인간 자체를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위에 인용한 「달밤 ―都會」의 한 구절에서 밤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의 무리들이 떠드는 입에 비치는 달빛을 포착하는 섬세한 시선, 그리고 그 달빛에서 곧장 사람들의 이야기를 '달 이야기'로 듣고 마는 서정적인 상상력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다른 한 편 하늘은 가뭄 등으로 인간을 압도한다. 그러나 사람을 하늘과 동격의 신성한 힘을 지닌 위상에 올려놓기 위하여 하늘은 그의 시에 도입된다. 인간은 하늘로서 여겨져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늘에서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는 비극이 가슴 아픈 문제가 된다. "보아라 오늘밤에 하늘이 사람배반하는줄알었다/아니다 오늘밤에 사람이 하늘배반하는줄도알었다(「逆天」 6행)."
 
  반대로 땅은 인간이 제 삶을 일구고 꾸리는 현실을 의미한다. 먹고 사는 문제와 직면할 수밖에 없는 자리가 바로 땅이다. 결국 상화의 시 세계는 하늘과 땅, 그리고 그 두 힘 사이에서 온몸으로 고통을 겪어 나가는 사람의 노래라 할 수 있다. 하늘과 땅 사이의 장대한 스케일이 그의 시에 전폭적으로 담기게 된다. 시적 정서 역시도 굉장한 진폭을 획득한다. 아마도 한국 현대 시사에서 이토록 우렁찬 웃음과 동시에 이처럼 처절한 울음이 동시에 뛰어오르는 시 세계를 구축한 시인은 오직 상화이리라. 이는 보다 본격적이고 전면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고통과 행복을 어르면서 리얼리즘 시 전통에 우주적 깊이를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 치하 식민지 슬픔과 독립에의 염원을 노래했다는 교과서의 모든 설명은 이제 한낱 추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울을 우럴어
  울기는 하여도
  한울이 그리워 울음이 아니다
  두발을 못뻣는 이땅이 애닯어
  한울을 흘끼니
  울음이 터진다.
  해야 웃지마라
  달도 뜨지마라
 
- 이상화, 「慟哭」, 위 책, 147쪽.
 
  <<이상화 시 전집>>을 읽으시려는 분들께 드리는 몇 가지 조언. 국문과 전공자가 아니라면 2, 3부를 읽을 필요 없이 1부만 읽으면 될 듯하다. 1부에 실린 시들 각각은 시가 발표되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옮겨놓은 원문과, 그 원문을 엮은이인 이상규 선생이 현대어로 교열한 텍스트가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되도록 교열본을 보지 않고 원문만 읽어야 시의 참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한문을 읽지 못하겠거나, 뜻을 모르는 어휘가 나왔을 때에만 교열본의 도움을 받도록 하자. 이상규 선생은 경북방언 전공자로서 매우 정확한 주석작업을 보여주고 있으며, 시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존중의 자세를 교열 곳곳에서 느낄 수 있어 믿음이 간다. 이렇게 좋은 책이 부디 많이, 더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하나만 더 말하자면, 1부의 맨 뒤에서부터 거꾸로 읽으면 이상화 시의 묘미를 좀 더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상화의 초기 시보다 후기 시가 훨씬 좋기 때문이다. 그는 시를 쓰면 쓸수록 시가 더욱 좋아지는 시인이었다. 그의 짧은 생애가 다시금 너무나 아깝고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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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st Interpretation: And Other Essays (Paperback) - And Other Essays
Sontag, Susan / Picador USA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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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수잔 손택(Susan Sontag)의 예술론을 한 마디로 '흥분하는 예술론(theory of exciting art)'이라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해석(interpretation)에 맞서는 이유는 예술의 영토에서 오랜 시간 왕좌를 지켜 온 '관념(idea)'을 마침내 퇴위시키고, 그 자리에 감성(sensability)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그럴 때에만 예술은 비로서 예술다워질 수 있으며, 예술다운 예술만이 보다 많은 인간들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예술적 에로티시즘(eroticism)이다. 

  이는 한국 예술계, 특히 문학계에도 매우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는 논리다. 예술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중요하며, 의도가 아니라 스타일이 전부이며, 도덕을 벗어나 미학성을 회복해야만 한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럴 때에만 예술은 예술 본래의 감성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함으로써 인간의 삶에 복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론이 가장 빛나는 부분은 따로 있다. 그녀가 주창하는 흥분으로서의 예술은 철저히 지식인을 위한 예술에 반대하는, 일종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다. 따라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수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most people)을 지향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형식을 분석할 수 있는 구체적 언어의 개발과 획득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한다. 

  한국에서 새로운 문학을 주장하는 이들이 사상적 뿌리로 삼고 있다는 수잔 손택. 그러나 그들은 과연 그녀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녕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위한 문학에 충실한가? 그들 자신 관념의 유희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오히려 지성주의적 작태를 지속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들은 새로운 문학이 가지는 미학성을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언어들이 아니라 지극히 모호하고 추상적인 비평용어들을 남용하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손택의 논의 자체도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녀는 내용과 형식의 구분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이는 데카르트주의적인 정신-육체(mind-body) 이분법의 틀을 전혀 벗어나지 못한다. 어디까지가 내용이고 어디서부터 형식인가? 누구든 이 잣대를 가지고 모든 예술작품들을 들여다 보라. 아마 그녀 자신도 당황하고 말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구분이 아니라, 예술이 실질적으로 얼마만큼의 힘(power)을 발휘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그녀의 표현을 따르자면, 예술이 실제로 흥분을 어떤 방식으로 유발할 수 있으며,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밝히는 작업이 우리가 몰두해야 할 보다 절박한 과제가 아닐까?

  둘째, 그녀의 예술론은 턱없이 빈약한 현실 분석으로부터 나온다. 그녀는 단지 오늘날의 현실을 고급 문화(high culture)와 대중 문화(mass culture), 이렇게 양극단으로 나뉜 상태로 파악한다. 그렇기에 고급 문화를 부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지성을 거부해야 하며, 대중 문화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과잉되고 이색적인(campy) 예술을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너무나 단순한 현실 파악이므로, 그녀의 예술론 역시 단순한 지향점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것은 바로 댄디즘이다. 그녀는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지상주의(aestheticism)를 자기 예술론의 토대로 삼으면서도 와일드의 낡은 댄디즘과는 다른 새로운 댄디즘을 요청한다. 그러나 댄디즘 사이의 낡고 새로운 차이는 단순히 비일상적이냐 일상적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이것이 대다수 인민을 지향하는 그녀의 문학론과 얼마만큼 괴리를 갖는 것인가? 그녀의 2003년 작 『타자들의 고통을 헤아리면서』(Regarding the Pain of Others)와 자신의 댄디즘 사이의 거리는 또 얼마나 넓디넓은 것인가? 

  요약하자면 2000년대에 뉴 웨이브, 미래파 등으로 호명되었던 한국의 많은 문학인들은 첫째로 손택의 예술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둘째로 손택의 예술론 자체가 심각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2000년대를 주도한 한국 문학계는 오류를 오류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중 오류의 산물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이 책은 1966년에 나왔으며, 이미 시인 김수영도 그녀의 글을 접한 바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손택을 추종하는 한국의 신진 문학가들 역시 그렇게 최신은 아니라는 뜻이다. 김수영은 자신의 친구였던 시인 박인환의 댄디즘을 그토록 증오했던 사람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김수영의 일기를 잠깐 들여다보자.  

 

 
 

    나는 이 시 노트를 처음에는 Susan Sontag의 「스타일론」을 초역한 아카데믹한 것을 쓰려고 했다. 그러고는 쓰지 않으려고 했다. 다시 Sontag을 초역(抄譯)하려고 했다. 그러나 Steven Marcus의 「소설론」을 번역한 후 생각해 보니 Sontag이 싫어졌다. 게다가 잊어버렸다. Sontag의 「스타일론」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Style is the Soul이다. Mary McCarthy는 이를 Style-non style이라 말하고 있다. 나는 번역에 지나치게 열중해 있다. 내 시의 비밀은 내 번역을 보면 안다. 내 시가 번역 냄새가 나는 스타일이라고 말하지 말라. 비밀은 그런 천박한 것은 아니다. 그대는 웃을 것이다. 괜찮아. 나는 어떤 비밀이라도 모두 털어내 보겠다. 그대는 그것을 비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그대의 약점이다. 나의 진정한 비밀은 나의 생명밖에는 없다.

- 김수영, 「시작 노트 6」, 『김수영 전집 2』, 민음사, 2003, 450~451쪽.

 
   

   김수영의 산문답게 알듯 말듯하면서도 논리가 있고, 중언부언하면서도 매혹적이다. 그는 손택의 '스타일'이라는 문제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을 번역하려고 했다. 오늘날 손택을 들고 와서 한국 문학을 쇄신시키겠다고 벼르는 이들 역시 일종의 번역 의지(will to translation)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움은 일종의 스타일이다. 그리고 한국 문학에서 새로움을 주장하는 것은 여지껏 (서구 문학의) 한국적 번역 냄새가 나는 스타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나의 견해 역시 김수영에 따르면 천박한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생명의 문제이며, 영혼의 문제다. 그것이 (서구로부터) 유입된 첨단, 유행을 좇는 갱신인들 무엇이 문제인가. 손택을 직접 읽어보면 알겠다. 그녀의 과제는 오직 스타일 뿐이다. 문학에서 지겨운 도덕, 의도, 내용 등을 발견해내려는 행위를 그녀는 지긋지긋한 지식인들의 몸서리쳐지는 지성주의라고 비판한다. 중요한 것은 오직 예술이다. 문학은 문학답기만 하면 그만이다. 예술은 최대치로 예술이 되라. 그리고 이것이 오직 예술가의 영혼이며 예술에 내재된 생명의 강령이다. 

   
 

   발뺌을 해두지만 나는 정치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의 스타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상이(相異)하고자 하는 작업과 심로(心勞)에 싫증이 났을 때, 동일하게 되고자 하는 정신(挺身)의 용기가 솟아난다. 이것은 뱀 아가리에서 빛을 빼앗는 것과 흡사한 기쁨이다. 여기 게재한 3편 중에서 「」이 그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는 <폐허에 눈이 내린다>의 여덟 글자로 충분하다. 그것이, 쓰고 있는 중에 자코메티적 변모를 이루어 6행으로 되었다. 만세! 만세! 나는 언어에 밀착했다. 언어와 나 사이에는 한 치의 틈서리도 없다.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로 충분히 <페허에 눈이 내린다>의 숙망(宿望)을 달(達)했다. 낡은 형(型)의 시다. 그러나 낡은 것이라도 좋다. 혼용되어도 좋다는 용기를 얻었다. 완전한 희생. 아니 완전한 희생의 한걸음 앞의 희생. 

- 김수영, 「시작 노트 6」, 『김수영 전집 2』, 민음사, 2003, 452~453쪽.

 
   

   '정신(挺身)'이란 단어가 생소하여 사전을 찾아보니, '무슨 일에 앞장서서 나아감'이란 뜻이란다. 기존의 것으로부터 새로워짐, 기존의 것과 상이해짐은 이미 지겹고 싫증나는 것이다. 김수영의 이런 점 앞에 견주어보면, 새로움을 자처하는 한국의 문학가들은 역시 이미 이류이며 B급이다. 인용한 시작 노트는 「이 한국문학사」, 「H」, 그리고 「눈」, 이렇게 세 편의 시에 달려있는 것이다. 특히 「눈」은 언어와 자신 사이의 간격이 없어진, 다시 말해 언어와 자신이 하나의 '온몸'이 된 사건이라고 자평한다. 스타일이란 이렇게 생명을 구가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낡음이나 새로움은 전혀 문제가 되질 않는다. 

  손택의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몇 가지 팁이 필요하겠다. 그녀의 모든 에세이들을 다 읽을 필요는 없다. 몇 편만 읽어봐도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해석에 맞서(Against Interpretation)」, 「'이색(異色)'에 대한 노트(Notes on "Camp")」, 그리고 김수영이 번역하고자 했던 「스타일에 대하여(On Style)」만 읽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또 한 가지, 그녀는 워낙 많은 문화적 경험들을 (특히 미국적 상황에서) 글 속에 쏟아넣었다. 배경지식의 차이에 압도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런 나열식 글쓰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하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무시하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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