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시전집 - 탄신100주년기념
이상화 지음, 이상규 엮음 / 정림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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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화 시 전집을 읽음으로써, 드디어 나만의 한국 현대시의 정전(canon)이 완성되었다. 내가 구성한 한국 현대시의 위대한 전통은 김소월, 이상, 백석, 이상화, 김영랑, 정지용, 서정주, 김수영, 이렇게 여덟 명이다. 소월과 이상은 각각 한국 현대시의 시작과 끝을 대표한다. 백석과 상화는 공동체와 주체의 긴장 관계에서 각각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김영랑과 정지용은 각각 시의 음악성과 회화성을 극대화했다. 서정주와 김수영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시와 현실 사이에 놓이는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게끔 만든다. 여기에 두 명을 더 추가하면 딱 열 명으로 보기 좋은 숫자가 될 것인데. 그 두 명을 누구로 꼽을 것인가? 지금으로써는 박용래와 김종삼이 덧붙여져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본격적으로 이상화 시에 대해 이야기하자. 상화 시는 일반적으로 초기의 퇴폐적 낭만주의와 후기에서 보여준 민족의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로 구분된다고 설명되어 왔다. 바꿔 말하자면 그동안 그의 시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시에 담긴 정서에 주목해온 것이 지배적 풍토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화의 시를 읽는 가장 큰 재미는 역시나 시인이 언어를 부리는 뛰어난 재주와 섬세하고 치밀한 구성력을 살피는 데에서 나온다. 가장 먼저 우리가 민감하게 살펴야 할 지점은 그의 띄어쓰기 방법론이다. 그가 시를 쓰던 일제 식민통지 기간에는 법적으로 강제력이 있는 조선어 맞춤법 규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무질서적 모국어 공간이 역설적으로 오히려 언어의 생명력을 무한대로 표현해낼 수 있는 자유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다음 시를 보시라.

  사람 만 다라워진줄로 알앗더니
  필경 에는 밋고 밋든 한울 까지 다라워 젓다
  보리 가 팔을 버리 고 달라 다가 달라 다가
  이제 는 고라진 몸으로 목을 대자나 빠주고 섯구나!
 
- 이상화, 「비를 다고 ―農民의 情緖를 읇조림」 1연, 이상규 편, 『이상화시전집』, 정림사, 2001, 173쪽.
 
  '사람만'으로 붙여서 써야 할 것을 '사람 만'으로, '필경에는'으로 표기해야 할 것을 '필경 에는'으로 띄어 썼다. 반대로 '다라워진 줄로'라고 띄어 쓸 것을 '다라워진줄로'라고 이어서 써놓았다. 이는 운율에 대한 시인의 무섭도록 예민한 감각 탓이다. 시적 화자는 오랜 가뭄에 비를 간절히 바란다. 가뭄은 곡식만을 마르게 하는 것은 아니다. 비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사람의 목까지도 마르게 한다. 목이 바싹 마르다보니 갈라진 목소리가 툭, 툭, 끊어지는 것을 용언과 조사 사이 띄어쓰기로 신통하게 표현했다. 띄어쓰기에 따라 주의를 기울여 찬찬히 읽다보면, 빗물을 마시지 못해 바짝바짝 시들어 말라가는 보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농민과 그 농민이 키우는 곡식은, 거꾸로 곡식과 그 곡식이 살려내는 농민은 여기서 더 이상 둘이 아니다. 
  
  현실적 삶 속으로부터 생득적으로 끌어올려진 상화 시의 리듬은, 물론 그 자체로 뛰어난 시적 기교이면서도 동시에 농민과 노동자와 같이 이 땅 위에서 숨을 쉬며 땀 흘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언제나 향하는 리얼리즘 시적 정신의 매우 값진 성취다. 띄어쓰기 뿐이랴. 그의 시 한 편 한 편 짜임새는 또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한가! 저 빼어난 절창으로 널리 알려진 「빼앗긴들에도, 봄은오는가」는 모두 10연으로 이뤄져 있다. 거기서 맨 첫 행과 맨 마지막 행이, 2연과 (맨 마지막 행을 뺀) 10연이, 3연과 9연이, 4연과 8연이, 5연과 7연이 한 가운데에 6연을 놓고 서로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또한 '봄-해살-푸른한울-푸른웃슴' 등으로 이어지는 시어들과, '들-푸른들-논길-푸른설음' 등으로 이어지는 시어들이 각 연마다 알맞게 어우러진다. 
 
  사람은 온몸에 달비츨입은줄도 모르는가
  둘식 셋식짝을지어 예사롭게 짓거린다
  아니다 웃슬때는 그들의입에 달비치잇다 달니야긴가보다. 
 
- 이상화, 「달밤 ―都會」 4연, 위 책, 157쪽.
 
  이처럼 정교한 짜임새는 천지인(天地人) 세 요소를 따르는 형식이다. 가장 먼저 하늘은 인간을 초과하는 힘을 뜻한다. 하늘은 한 편으로 인간을 언제나 꿈꾸게 함으로써 인간 자체를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위에 인용한 「달밤 ―都會」의 한 구절에서 밤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의 무리들이 떠드는 입에 비치는 달빛을 포착하는 섬세한 시선, 그리고 그 달빛에서 곧장 사람들의 이야기를 '달 이야기'로 듣고 마는 서정적인 상상력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다른 한 편 하늘은 가뭄 등으로 인간을 압도한다. 그러나 사람을 하늘과 동격의 신성한 힘을 지닌 위상에 올려놓기 위하여 하늘은 그의 시에 도입된다. 인간은 하늘로서 여겨져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늘에서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는 비극이 가슴 아픈 문제가 된다. "보아라 오늘밤에 하늘이 사람배반하는줄알었다/아니다 오늘밤에 사람이 하늘배반하는줄도알었다(「逆天」 6행)."
 
  반대로 땅은 인간이 제 삶을 일구고 꾸리는 현실을 의미한다. 먹고 사는 문제와 직면할 수밖에 없는 자리가 바로 땅이다. 결국 상화의 시 세계는 하늘과 땅, 그리고 그 두 힘 사이에서 온몸으로 고통을 겪어 나가는 사람의 노래라 할 수 있다. 하늘과 땅 사이의 장대한 스케일이 그의 시에 전폭적으로 담기게 된다. 시적 정서 역시도 굉장한 진폭을 획득한다. 아마도 한국 현대 시사에서 이토록 우렁찬 웃음과 동시에 이처럼 처절한 울음이 동시에 뛰어오르는 시 세계를 구축한 시인은 오직 상화이리라. 이는 보다 본격적이고 전면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고통과 행복을 어르면서 리얼리즘 시 전통에 우주적 깊이를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 치하 식민지 슬픔과 독립에의 염원을 노래했다는 교과서의 모든 설명은 이제 한낱 추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울을 우럴어
  울기는 하여도
  한울이 그리워 울음이 아니다
  두발을 못뻣는 이땅이 애닯어
  한울을 흘끼니
  울음이 터진다.
  해야 웃지마라
  달도 뜨지마라
 
- 이상화, 「慟哭」, 위 책, 147쪽.
 
  <<이상화 시 전집>>을 읽으시려는 분들께 드리는 몇 가지 조언. 국문과 전공자가 아니라면 2, 3부를 읽을 필요 없이 1부만 읽으면 될 듯하다. 1부에 실린 시들 각각은 시가 발표되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옮겨놓은 원문과, 그 원문을 엮은이인 이상규 선생이 현대어로 교열한 텍스트가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되도록 교열본을 보지 않고 원문만 읽어야 시의 참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한문을 읽지 못하겠거나, 뜻을 모르는 어휘가 나왔을 때에만 교열본의 도움을 받도록 하자. 이상규 선생은 경북방언 전공자로서 매우 정확한 주석작업을 보여주고 있으며, 시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존중의 자세를 교열 곳곳에서 느낄 수 있어 믿음이 간다. 이렇게 좋은 책이 부디 많이, 더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하나만 더 말하자면, 1부의 맨 뒤에서부터 거꾸로 읽으면 이상화 시의 묘미를 좀 더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상화의 초기 시보다 후기 시가 훨씬 좋기 때문이다. 그는 시를 쓰면 쓸수록 시가 더욱 좋아지는 시인이었다. 그의 짧은 생애가 다시금 너무나 아깝고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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