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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파 - 새로운 시와 시인을 위하여
권혁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0월
평점 :
2000년대 한국 시단의 비평 담론 한 가운데 권혁웅의 『미래파』가 있을 것이다. 목차를 찬찬히 살펴본 뒤 1부만 읽었다. 1부 가운데에서도 「감각의 논리」, 「뜨거운 환상과 차가운 환상」, 「상사(相似)의 놀이들」, 「미래파」, 이렇게 네 편의 글만 읽었다. 적어도 비평가라면 잘 쓰는 작가의 좋은 작품들을 대상으로만 비평을 써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자신의 입맛에 맞는, 다시 말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손쉽게 이끌어낼 수 있는 작품들이라 하더라도, 그 성취도 여부를 따지지 않은 채 덮어 놓고 비평을 써서는 안 되지 않을까? 비평가 개인의 사사로운 관계에 이끌려 쓰는 비평을 이제는 그만 둬야 하지 않을까(이는 권혁웅 뿐만 아니라 대다수 비평가들에게도 해당한다)? 1부에 실려 있는 비평들 가운데 김형술, 박서원, 조용미, 김정란 등 시를 못쓰는 이들에 관해 쓴 것들은 도무지 읽기가 싫다. 2부에서는 한국 현대시를 자꾸만 유형화하려는 시도를 보이는데, 나는 융 심리학의 냄새가 나는 모든 것들에 하품이 난다. 3부 역시 왜 비평가가 이런 작가들을 대상으로 글을 써야만 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먼저 「감각의 논리」. 그래도 권혁웅은 본인이 직접 시를 쓰는 비평가라 그런지, 문학 비평의 가장 기본을 어느 정도는 할 줄을 안다. 그나마 시를 시답게 볼 줄 안다는 뜻이다(거꾸로 말하자면 대다수 비평가들이 시 자체에 들어있는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환기시킬 줄을 모르거나 그런 작업에 태만하다는 것). 그러나 논리가 단순하다. 글의 맨 처음에서 데까르뜨의 관념론과 대립하는 감각의 논리로서 꽁디얔을 끌어온다. "콩디야크는 여기에 반대하여, 감각이 우리 인식의 유일한 기원이라고 말했다. 감각이 주의, 기억, 판단, 반성, 상상, 의지, 이해 같은 여러 의식 현상을 낳는다는 것이다(15쪽)." 서양 근대 인식론은 크게 관념론과 경험론, 이렇게 둘로 구분되지만, 그 둘 모두 (유물론에 대립되는) 광의의 의미로서 '관념론'에 포함된다는 개념적 구도를 비평가는 정녕 모르는 걸까? 왜 시는 언제나 관념론 안에서의 싸움이어야만 하는가? 시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유물론적으로 살필 수는 없는 것인가? 그리하여 그가 제시하는 '감각의 논리'는 피상적이고, 추상적이고, 범박하고, 단순하다. "하지만 테마에 관한 한은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테마가 아니라 그걸 전달하는 방식이다(22쪽)." "중요한 것은 진술이 아니라 진술을 낳은 감각 자체의 운동이다(23쪽)." 테마와 방식, 진술과 감각의 이분법. 이야말로 그가 애초에 벗어나고자 했던 데까르뜨의 '영혼-육체(mind-body) 이분법'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 걸까? 아니, 시에서 어디까지가 테마이고 어디서부터 표현 방식인지 구분할 수가 있단 말인가? 좋은 시일수록 진술과 감각이 서로 분리 불가능하게 융합되는 지점을 구현한다는 점을 일부러 외면하는 것인가?
아마도 일부러 외면하는 것이리라(그럴 거라 믿고 싶다). 최대한 호의적으로 찬찬히 읽어보자. 그의 논지 속에서 테마, 진술, 전언 등은 시적 대상에게 실재의 주체로서 동일성을 행사하려는 시적 자아와 관련된다. 반대로 감각은 시적 자아와의 동일시로부터 벗어나는 이질적 대상들의 자리를 되찾아주기 위한 무기이다. 이는 2000년대 한국 시단의 새로운 경향을 옹호하여 기존 시의 미학을 낡은 것으로 비판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등장하는 '주체/대상'의 문제이다. 이는 기존의 한국시가 답습해온 틀에 박힌 방식을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점에서는 꽤 타당해보인다. 그러나 진정으로 문제는 '주체'일까? 시에서 근대적 주체만 해체시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까? 인간의 삶을 획일적 형태로 통제하려는 근대 사회의 억압적 기제에 대한 전면적 비판의 흐름 속에서 주체에 대한 문제는 발생한 것이다. 현대철학에서 주체의 문제가 어떤 맥락에서 제기되었는지를 미래파 비평은 처음부터 다시금 살펴봐야 할 것이다. 권혁웅은 자신의 비평 속에서 주체 중심의 한국 시가 낡았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말아야 했다.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다 급진적인 문제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하여 주체 중심의 한국 시가 낡았다는 비판이 어째서 새삼 발견되었는지, 그 원인에 대해 상세하고 명료한 분석을 수행하고, 그 분석을 통하여 진정으로 근대체계가 횡행하는 지금-여기 인간의 삶에 시가 어떤 힘과 가치를 빚어낼 수 있어야만 하는지를 밝히는 데까지 나아가야만 했다. 근대적 주체의 해체 이후를 시 속에서 감각화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미래파 담론은 시가 인간의 삶에 왜 필요한 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그 성찰을 통해서만 구체적 육체를 획득하는 자기 나름의 대답이 결여되는 데에서 나오는 '관념론적'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시를 이제는 관념론적으로 보지 말고 유물론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나의 비판은 바로 이런 맥락과 맞닿는다.
「뜨거운 환상과 차가운 환상」은 김행숙과 김민정의 작품을 다루기에 읽어봤으나, 역시 그의 고질적인 '유형화하기' 버릇의 반복이다. 그가 더 좋은 비평가로 거듭 나기 위해서 이런 악습은 하루 빨리 털어내야 한다는 생각이다. 유형화가 왜 안 좋은가는 직접 내용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2000년대 한국시의 환상을 분류하기 위해 자신이 고안해 낸 틀에 짜맞추느라 시 자체를 놓친다. 특히 김민정 시에 대한 비평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녀의 두 번째 시집을 권혁웅이 본다면 아마도 아차, 싶을 것이다. 왜 그때 그런 글을 썼을까, 하고 후회하면서. 「상사의 놀이들」에서는 미셸 푸꼬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유사'와 '상사'를 구분하는 개념적 틀을 빌려왔는데, 한국 비평가들은 철학 공부를 조금 더 정확하게, 좀 더 정통적으로 할 필요가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푸꼬가 왜 계열화로부터 이탈하고자 '상사'라는 개념을 고안해냈는지에 대한 고민을 권혁웅의 비평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 사족을 덧붙이자면, 왜 한국의 비평가들은 각주를 제대로 달지 않는지? 각주를 통해서 인용한 부분의 정확한 출처를 밝히고, 그리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그 인용의 올바름을 확인하고 검증하도록 내맡기는 것은 모든 글쓰기의 기초적 태도이며 상식 아닌지? 권혁웅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그렇다는 것을 그들 자신은 자각하고 있는지? 대중들이 그리도 좋아라 하는 신형철도 주석에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을 문학 소비자들은 눈치나 채고 있는지? 애초에 인용을 남발하는 자체가 문제 아닌지? 사상들을 많이 쏟아넣는 것보다 단 하나의 사상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적절히 활용하는 게 좋은 비평가의 자세 아닌지?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사상들을 체득한 뒤에, 그 사상들을 뛰어넘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는 게 진정으로 실력을 갖춘 자의 태도 아닌지? 자신만의 해석과 입장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감추기 위하여 여러 겹의 위장막들을 펼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를 뽐내고자 하는 허영심에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