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첫 문학과지성 시인선 345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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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상화 시 전집 리뷰에서 상화 시를 통틀어 '우주적 리얼리즘'이라 명명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홍승진,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의 노래」,  『이상화시전집』 알라딘 마이리뷰, 2011. 8. 2.). 거칠게 요컨대, 거기에는 사람살이를 유현한 깊이로 들여다보며 사람들의 목소리 그 자체를 세상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바꾸려는 리얼리즘 정신의 본질 속에다 생의 현실과 운명을 자아내는 우주적 스케일의 환경을 부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 서정시의 역사를 크게 소월 시의 전통과 상화 시의 전통으로 나눠볼 수 있다면, 전자는 유약하고 내향적인 눈물을 그 특징으로 하는 반면, 후자는 우렁차게 뻗어나가는 눈물이 특징이다. 그런데 전자의 힘에 눌려 후자의 흐름은 이상하게 은폐되어 오거나 가려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증발이 아니라 지하의 심층으로 흘러들어 다시 한 번 솟구쳐오를 때를 기다리는 수맥이었음을 김혜순의 이 시집을 읽으면서 새삼 느꼈다. 

  이 시집의 서시 격인 「지평선」은 다소 거칠고 투박한 흠이 없지 않지만, 또 그만큼 시인의 시 세계 전반의 창작 원리와 구현 의도에 대한 훌륭한 소개라 볼 수 있다. '지평선'을 하늘과 땅이 갈라져 노을이라는 붉은 피가 스며 나오는 상흔으로 읽은 시적 상상은 곧바로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이 쪼개져 눈물이 흐르는 화자 자신의 상처와 나란히 이어진다. 노을과 눈물 서로 붉게 스미듯 결국에는 나의 아픔이 곧 우주의 그것이며 우주의 통곡 모두 내 슬픔임을 여실히 밝히는 게 그녀 시의 작업이다. 이게 대체 상화 시의 숨통이 탁 트여 터져나오는 계승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시인이 숨 쉬며 사는 그곳의 아픔을 똑바로 쳐다보아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정언명령이 그 아픔 모두를 품어내는 우주의 품을 지니고야 마는 것. 

  우주적 아픔에 국경이 무슨 의미이며, 생사가 어찌 구분되랴? 「모래 여자」에서 시인은 이국의 사막에서 발견된 미라의 목소리로 노래하기를 마다 않는다. 참신한 소재를 다루는 데에서 시를 읽는 재미가 발생하지만, 그럴 경우 참신함만 추구하다가 자칫 잘못 생경함만 남기가 쉽다. 그러나 시의 흐름은 전혀 어설프지 않으며 극도로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면서도 또한 무척 유려하고 서정적이다. "그가 전장에서 죽고 /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는 이 4연은 아름답니다. 미라는 죽은 채 살아있고 산 채 죽은 사물이다. 눈을 감고 있지만 죽지는 않았다는 표현은 적확한 문장이며 뛰어난 상상력의 소산물이다. 온몸이 해부용 칼에 베이고 갈라지는 아픔이  '그'를 잃어 목숨만 붙은 채로 살아있는 '그녀'의 슬픔에 대한 적나라한 실체이며 등가물이다. 거기에 '그'가 '그녀' 곁을 떠난 사연이 살풋 얹힌다. 그 사연엔 오늘날에도 만연해있는 전쟁이라는 문제와 또한 국경의 사이에서 오가는 참극이 절제된 표현이지만 빼곡한 내용으로 구구절절히 박혀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모래 여자인 '그녀'와 시인 자신을 교묘하고 노련하게 포개놓으며 사막의 밤하늘을 언급하는데, 이는 마치 상화 시가 모래 여자와 같이 이토록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완벽하게 복원, 아니 부활하는 순간이다. 

  「별을 굽다」 또한 대도시의 삶을 영위하는 현대인들의 얼굴 속에서 별을 읽어내는 우주적 리얼리즘의 위대한 성취이다. 지하철 역 에스컬레이터에 선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붉은 흙으로 빚어낸 가면을 닮았다고 시인은 연상한다. "뒤돌아보다 마주친 저 수많은 얼굴들 /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냈을까" 그와 같은 발상은 그 자체로 타당한 것으로 동의할 수 있다. 왜냐면 도시인들의 성격은 대부분 근대 산업체제가 부단히 재촉하는 시간 싸움에 쫓기며 몰아세워지기 때문에 급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어디로 향하든지 언제나 숨이 차서 얼굴이 붉게 달궈지기 쉽상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얼굴을 흙 가면에 한정시키는 상상력은 환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흙 가면은 무표정이며, 무표정이란 고정이며, 고정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도시인의 사실적 얼굴 표정에서 읽어낸 환멸적 상상력은 그러나 2연에서 시인의 더 깊은 상상력에 의해 전복이 된다. "무표정한 저 얼굴 속 어디에 / 아침마다 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정말로 현대인의 얼굴이 가면이면 저녁에 눈을 감고 아침에 눈을 뜰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은 실제로 가면이 아니다. (위대한 리얼리즘!) 가면을 닮아버린 오늘날 우리들도 언제나 아침이면 눈을 뜨지 않는가? 이는 매우 사소한 일상이지만, 사실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생의 감각을 상실하였으나 우리를 그래도 살게 하는 생의 약동이 우리 내부에 꿈틀거리고 있다고 시인은 역설한다. 이는 사람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얼마나 연민어린 것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진정한 리얼리즘!) 그리고 그렇게 가면의 틈을 비집고 번쩍 뜨이는 사람의 눈은 흙가마에서 구워져 나온 반짝반짝 별이다. 3연에서는 지하철이라는 공간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면서 밤하늘에 뜨는 자연적 별과 땅 밑의 지하철 역에 뜨는 인간적 별 사이의 아득한 먼 거리를 헤아리는 동시에 무마시킨다. 

  김혜순을 오해해서 정말로 미안하다. 나는 그녀가 우리 리얼리즘 시단의 적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리얼리스트라고 천명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녀는 누가 뭐래도 한국 리얼리즘 시 전통의 도저한 흐름 한 가운데 서서 상화의 어조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언제나 리얼리즘의 내용은 시대현실에 따라 바뀌어야만 옳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적 문제를 보다 정확히 드러낼 수록 보다 훌륭한 리얼리즘이 탄생한다.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감옥인데 그 창살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김혜순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시를 썼다니! 반갑고 고맙기 짝이 없다. 「산들 감옥이 산들 부네」라는 시를 보라. 출근시간을 수감기간으로, 자신이 운전하는 자동차를 독방으로 번역한다. 은폐된 모순을 감각할 수 있는 것으로 바꿔내는 것, 그것을 나는 시적 상상력의 혁명적 기능이라 부른다. 이것이 진정한 시의 정치성이며, 시와 정치가 한 몸으로 만나는 가능성이 바로 여기 존재한다. "유리창이 있다고 바람이 분다고 별빛이 샌다고 감옥을 모르네 / 퇴근 후 내가 잠자리용 감옥에 몸을 누이면 / 감옥 밖의 감옥 밖의 감옥들 모조리 달려와 / 붉디붉은 핏길로 내 몸을 결박하네" 그러나 끝끝내 김혜순의 시가 매혹적인 건, 그녀에겐 그녀만의 어법이 있기 때문이다. 감옥 밖 겹겹이 둘러싸인 감옥과 내 몸을 가득 얽은 핏줄들을 오버랩시키는 호방한 어조. 그 어조는 상화 시를 그녀 나름의 것으로 흡수하고 소화시킨 데에서 가능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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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대적 고찰 세계사 시인선 89
박남철 지음 / 세계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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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남철의 시는 일상을 노래할 때 빛을 발한다. 어머니가 농사에 필요한 돈이 없어서 아들인 시인에게 전화로 돈을 꾸는 이야기(「어머니」), 네 살배기 아들이 동네 아이들과 칼싸움을 하고 놀다 수세에 몰려 집으로 도망쳐 눈물 흘리는 이야기(「실업 Ⅲ」), 이렇게 비루하고 사소한 시인 개인의 내적 외적인 사생활을 다룬 시편들이 오히려 박남철의 시에서도 뛰어난 명편이다. 참 부럽고 신기하다. 이런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그는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이다. 슬픔과 분노는 일반적으로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하는 한 쌍이다. 슬픔은 곧잘 나약한 이들의 감정인데 반하여 분노는 거칠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약자는 눈물을 그렇게 많이 흘리지 않는 법. 진정으로 눈물이 많은 사람은 나를 포함한 온 세상과 고투를 벌이며 분노하는 강자이다. 그런 이들은 더 많은 슬픔과 분노를 자청하고 끝끝내 감내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나 혼자 추측컨대 그의 온몸은 100% 눈물이며 100% 불덩이로 이루어져 있을 거다. 

  우리같이 메마르고 팍팍한 사람이 보기에는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일에서 시인은 툭, 하면 눈시울을 붉히고 툭, 하면 고래고래 소리치고 욕설을 퍼붓는다. 그만큼이 시인의 민감함이다. 비유한다면 바다 한 가운데 떨어진 민달팽이다. 그의 시에서 한없이 늘어지는 잔소리와 말줄임표는 이 세상을 건너느라 온몸이 타는 듯 느릿느릿 쓰라린 달팽이의 행로를 잘 담아낸다. 마초적일 정도로 고매하고 강직한 성품 앞에서 우리의 둔감함은 비로소 깊이깊이 뉘우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것이 결코 일상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이라는 역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성립하고야 만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얼굴에서 김수영의 표정을 읽고 가기도 하지만, 어쨌든 일상에서 우리를 이렇게 우울하고 노엽게 만드는 건 모두 다 그 거대한 사회 질서 탓임을 놓치지 않는 시선의 깊이가 중요하다. 또 한 편 시인이 언어를 다루는 솜씨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하기사 그토록 여리디 여린 마음 나타내려면 얼마나 섬세한 언어가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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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 시인선 140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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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김혜순을 피해 왔었다. 지나치게 난삽하며 어렵다는 생각에 일부러 외면하고 읽지 않았다. 그러나 나 자신이 이제는 함부로 남의 영향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선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정도는 되었으므로 그녀의 시집들을 훑기로 했다. 사실 그녀의 시 세계에 들어가기로 마음 먹게 된 것은 거기에서 내 문학의 새 방향을 얻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그녀의 건조하고 삭막하지만 급진적 상상력이 넘쳐나는 시편들이 어쩌면 내가 찾는 내 시의 새로운 길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가장 첫째 느낌은 의외로 읽기에 재밌다는 것이다. 김혜순 시의 재미는 먼저 어떤 사소하고 일상적인 경험이라도 거기에 전혀 새롭고 참신한 의미와 감각을 부여해버리는 발상법에서 기인한다. 예를 들어 내 가슴속, 즉 내 심리 상태를 호텔로 표현한다든지(「참 오래된 호텔」), 도시인의 삶 자체를 차체와 나란히 놓는다든지(「서울 3느 9916」), 재개발을 위하여 오래된 터전들을 파괴하는 과정을 벤야민이 진행하는 테트리스 게임처럼 비유하는 것(「벤야민의 테트리스」) 등이 바로 그 예다. 전혀 시적이지 않거나 시가 되기엔 너무나 어려운 것들이 정말로 시가 된다. 비시적인 상황을 시적으로 승화시키는 힘은 모두 그녀의 도대체 겁이 없이 무참한 상상력 탓이리라. 

  그러나 막상 책장 한 귀퉁이를 접어서 표시해 놓은 것은 서너 편 정도 뿐이었다. 상상력이 너무도 지나친 탓인지, 또는 하려는 말 가운데서도 무엇을 참고 덜어대거나 걷어낼 줄을 모르는 탓인지. 드문드문 눈이 밝아지고 군데군데 머리가 환해지는 착상과 표현을 찾을 수 있지만, 한 편의 시 자체로 오롯한 짜임새나 흠이 없는 완벽에 이르기엔 번번히 실패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 중 건진 작품들은 「벼랑에서」, 「블라인드 쳐진 방 1」, 「서울 길」, 「서울」 등이었다. 「벼랑에서」는 매끈한 서정시다. 일반적으로는 좋은 작품이지만 김혜순만의 냄새는 덜 하다. 그래서 오히려 매력이 떨어진다는 약점이 발생한다. 다만 2연의 목소리가 절박하고 절절하여 읽는 이의 마음을 뿌리째 흔들어놓는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벼랑 아래 파도가 밤새껏 내게 묻는다. 땅 끝까지 달려온 풀들이 몇 개 안 남은 손톱으로 벼랑을 움켜쥐고 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내가 풀잎을 하나씩 쥐어뜯는다. 내 머리칼도 저 밑은 허방이에요 내 얼굴을 움켜쥔 채 악착같이 떠밀리지 않으려 버틴다. 머리 끝까지 차오른 눈물도 눈 속 뿌리를 꽉 잡고 눈동자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는다. 바람에 떠밀리던 그림자는 내 발목을 잡은 채 벼랑을 혼자 더듬어 내려가다가 더 이상은 안 돼요 멈취 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파도는 숨골 속을 두드리고 차가운 별이 눈물 심지에 가끔씩 부딪힌다. 밤늦도록 벼랑에서 파란 인광을 내뿜는 내가 모르스 부호처럼 깜빡거린다.

 
   

   벼랑 끝에 있다는 것은 생사를 결정할 만큼 묵중하고 막대한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지금 벼랑 끝의 상태다. 그런 시인의 눈에 비친 모든 사물이 다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벼랑 아래 파도도 끊임없이 갈등하고, 벼랑 끝에 돋아난 풀들도 아슬아슬하고, 머리칼도 머리 끝에서 간당간당하고, 눈물도 눈가에서 달랑달랑하다. 전부 다 무언가를 악착같이 움켜 쥐었다. 여기서 파도나 풀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머리칼과 눈물이이 무슨 의미인지 묻는 것은 쓸모 없는 짓이다. 다만 그런 하부(파도와 풀)와 상부(머리칼과 눈물) 모두들은 그 사이에 서 있는 시인과 병렬적으로 벼랑 끝에 있는 존재들임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이 시의 목소리에 강렬한 힘을 불어넣는다. 

  "바람에 떠밀리던 그림자는 내 발목을 잡은 채 벼랑을 혼자 더듬어 내려가다가 더 이상은 안 돼요 멈춰 있다"는 구절에서는 어떤 신운같은 것마저 감도는 듯하다. 여기서 '그림자'는 '바람에 떠밀리던'이라는 수식을 받아서 시인의 속내를 드러내는 분신이 된다. 그런데 그 그림자는 마치 암벽등반가처럼 발목을 로프의 고정점으로 삼아 벼랑 밑을 내려간다. 이는 '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두 결론 사이에서 번민하는 시인의 심리(그림자)가 벼랑 아래를 탐지하려는 정도의 아슬한 절박함을 담고 있다는 놀라운 표현이다. 그러나 곧 더 이상 못 내려간다는 신호를 보내온다. 그림자는 제 몸이 곧 암벽등반가이자 동시에 그 등반가의 로프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마음은 끝없이 기로에 서서 갈라지지만, 한없이 갈라질 수만은 없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은 구절들이 2연 전체의 완성도를 훼손한다. 파도가 숨골 속을 두드리는 것은 낭떠러지의 이미지와 어떤 연관도 가지지 못한다. 눈물을 '심지'에 비유한 것도 의아하다. '인광'과 '모르스 부호'는 앞의 '심지'와 연결되는 심상인데, '심지' 자체가 생경한 비유이므로 문제는 전혀 해소되지 않는다. 물론 나머지 부분 역시도 그 자체로는 빼어난 문장들이다. 그러나 시라는 게  어찌 부분만 좋다고 전체가 좋다 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작품은 김혜순의 시에서도 그나마 내가 지적한 부분을 빼면 잘 짜여있는 편에 속한다. 그러나 그녀의 시 대부분이 이런 문제에 걸려 넘어져 좋은 시가 될 수 있는 씨앗들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깝게 낭비되거나 안타깝게 버려진다. 

  「블라인드 쳐진 방 1」은 뛰어난 묘사를 보여준다. "블라인드 쳐진 창 아래 둘이 앉아 있다 / 설탕을 나르던 스푼이 잠깐 흔들리고 / 군청색 보자기 덮인 탁자 위로 설탕이 쏟아진다 / 밤하늘 납작한 은하수처럼 // 블라인드 쳐진 방은 두 손바닥으로 납작하게 / 누를 수 있다 이 책엔 블라인드 / 쳐진 방이 양면에 걸쳐 실려 있다" 1연 3행까지는 평이한 서술이다. 그런데 4행에서 탁자 위에 쏟아진 설탕가루를 밤하늘에 펼쳐진 은하수로 묘사하면서 갑자기 입체의 시적 국면 전체가 평면으로 전환되는 놀라운 효과가 일어난다. 그리하여 방이 좌우 날개가 납작히 눌린 책이라는 평면적 묘사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양쪽으로 나뉜 책이 방안에 앉아있는 둘 사이의 단절감을 은연중 돋보이게 만든다. 평면의 공간으로 묘사한 것은 둘 사이의 인간적 관계의 답답함이나 깊이 없음, 또는 풍부함의 결여를 도드라지게 한다. 

  이 시집에서 '서울' 연작 시편들은 시적 화자의 내면과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실체를 과감하게 겹치는 데에서 그 고유하고 독특한 어법을 획득한다. 이는 바로 시집의 뒷표지글에서 시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의 심장으로 만든 만다라"의 방식을 취한 것이다. '만다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주에 가득 찬 진리의 길들을 그려놓은 지도이자 동시에 우리의 마음 한 가운데의 자리를 향하여 파고 들어가는 경로를 기하학적으로 표시한 도상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서울' 연작을 통해 "전경화된 마음의 참혹한 풍경화들에 폭풍처럼 구멍의 길을 낼 언술(시집 뒷표지글)"을 성공적으로 실험하였다. 

  예를 들어 다음의 구절들은 도시를 노래한 시 가운데에서도 지극한 성취를 이룩한다.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늘어나요 길 속에 길이 있어요 지금 막 도착한 저 빌딩의 몸 속을 좀 들여다보세요 층계와 층계 사이로 불켠 실핏줄들이 보이잖아요? 저 길을 언제 다 지나 당신에게 당도하지요? 서울이 서울을 낳아요 마음이 제 몸을 한껏 부풀려 또 마음을 낳아요(「서울 길」)" 여기서 당신을 찾을 수 없이 미궁인 내 마음의 내부와, 하루가 다르게 길이 놓이고 건물이 들어서는 대도시의 풍경은 둘이 아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또 유리문이 나온다. 유리문 안쪽엔 출구라고 씌어 있고, 바깥쪽엔 입구라고 씌어 있지만 그러나 나가든 들어가든 언제나 너는 어떤 몸의 내부에 속해 있다. (중략) 꿈속에 있으면서 꿈속에 전령을 보내려고, 헛되이 허공중에 고운 얼굴을 새기고 있구나. 미로는 날마다 골목 끝에 유리문을 세운다. 이 몸을 깨뜨리고 어떻게 밖으로 나가지? 내 몸 밖에서 누가 나를 아직도 부르고 있는데……(「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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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 지음, 윤미애 외 옮김 / 새물결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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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와 정신적 삶

홍승진 편

게오르그 짐멜, 김덕영•윤미애 역,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새물결, 2005.

현대의 삶에서 가장 심층적인 문제들은 개인이 자기 자신의 독립과 개성을 사회나 역사적 유산, 외적 문화 및 삶의 기술의 압도적인 힘들()부터 지켜내려는 요구에서 유래한다. 이는 원시 인간이 육신의 실존을 위해 치러야 했던 자연과의 투쟁에서의 마지막 단계에 속한다. 18세기 사람들이 국가와 종교, 도덕과 경제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구속들로부터의 해방을 외친 것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선한 본성이 방해 받지 않고 발전해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19세기 사람들은 단순한 자유 이외에 노동 분업에서 개인 및 개인 업적의 특수성, 즉 개인을 남과 비교될 수도, 또한 대체될 수도 없는 존재로 만들고, 그런 만큼 더욱더 다른 사람들과 보완 관계를 맺도록 하는 특수성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니체는 개인의 처절한 투쟁이, 사회주의는 일체의 경쟁의 제거가 개인이 완벽하게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어느 경우든 이 모든 것에는 동일한 근본 동기가 작동하고 있다. 다름 아닌 사회적•기술적 메커니즘 속에서 평준화되고 소모되는 데 대한 개인의 반항이 그것이다. 현대 특유의 삶[36]의 산물들에서 그 내면적 측면에 대한 질문, 즉 문화라는 신체에 담긴 영혼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구조들에서 삶의 개인적 내용들과 초개인적 내용들 사이에 어떤 등식이 성립하는지, 그리고 개인의 인격이 외부의 힘들과 화해하는 적응 능력들이 어떠한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여기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대도시에 사는 개인들에게 전형적인 심리적 기반은 신경과민인데, 이는 외적•내적 자극들이 급속도로 그리고 끊임없이 바뀌는 데서 기인한다. 인간은 차이를 본질로 하는 존재이다. 즉 그의 의식은 그때그때의 인상이 선행하는 인상과 구분되는 차이에 의해 촉발된다. 우리의 의식은 인상들이 고정된 경우, 혹은 그 차이가 경미하거나 대립적 인상들이라도 규칙적이고 익숙한 흐름에 따라 교체되는 경우보다, 급속도로 이미지들이 교체되면서 밀려오거나,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포착되는 내용의 변화가 급격하거나 밀려드는 인상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경우에 더 큰 부담을 갖는다. 이러한 심리적 조건들은 대도서의 거리를 걸을 때나 빠르고 다양한 경제적•직업적•사회적 삶을 경험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정신적 삶의 감각적 기반, 다시 말해 차이에 입각한 우리 존재의 속성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식의 총량을 비교해보면, 대도시는 소도시나 시골의 삶과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다. 후자에서는 감각적•정신적 생활의 리듬이 더 느리면서 더 익숙하고 더 평탄하게 흘러간다.

여기서 특히 대도시의 정신적 삶이 어떻게 해서 기분이나 정서적 관계에 더 의존하는 소도시적 삶에 비해 지적 성격을 띠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소도시의 정서적 관계들이 정신의 더 무의식적인 층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꾸준하고 지속적인 습관들을[37] 통해서 가장 잘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우리의 오성은 우리의 정신에서도 투명한 층, 즉 가장 상층에 자리 잡고 있다. 오성은 우리의 내적 힘들 중에서 적응력이 가장 뛰어나다. 오성은 대립적으로 변화하는 인상들에 적응하는 데에 어떠한 충격도, 내적 동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보수적 성향을 지닌 사람만이 이러한 인상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충격과 내적 동요를 겪는다. 물론 수천 가지의 개별적 경우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전형적인 대도시인은 외부 환경의 흐름이나 그 모순들에 의해서 삶이 뿌리째 위협받는 상황에 대해 방어 메커니즘을 만들어낸다. 대도시인은 그러한 외부 환경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지적인 반응을 보인다. 동일한 원인의 결과로 의식이 고양되면 지성이 정신적 우선권을 지니게 된다. 이로써 외부 현상들에 대한 반응은 가장 덜 민감하면서도 인격의 심층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정신적 기관에 이양된다. 개인의 주체적 삶을 대도시의 억압적 힘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자구책으로 이러한 이성적 태도는 대양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다양한 개별 현상들과 얽혀 나타난다.

예로부터 대도시는 화폐 경제의 본거지였다. 왜냐하면 다양한 경제적 교역으로 북적대는 곳에서는 교환 수단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골처럼 교역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곳에서 교환 수단은 대도시에서만큼 중요하지 않다. 화폐 경제와 이성의 지배는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양자는 사람과 물건을 취급함에 있어 순수한 객관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여기서는 흔히 형식상의 정의와 몰인정한 엄격성이 짝을 이룬다. 순수하게 이성적인 사람은 개별적은 모든 것에 대해 냉담하다. 그 이유는 개별적인 것 안에서는 논리적 이성으로 다 포착될 수 없는 관계와 반응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화[38]폐 원칙에 현상의 개별성이 자리 잡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화폐는 모든 현상들에 공통적인 것, 즉 모든 성질과 특성을 단지 수량적인 문제로 평준화시키는 교환 가치만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의 정서적 관계는 모두 그들의 개체성에 기초하는 반면, 이성적 관계는 사람들을 마치 숫자를 대하는 것처럼, 즉 객관적으로 평가 가능한 업적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뿐, 그 자체로는 무관한 요소들처럼 다룬다. 대도시인이 배달원이나 고객, 심부름꾼, 혹은 의무적 인간관계의 범위에 속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각자의 개체성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고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풍부한 감정이 묻어나게 되는 소규모 집단과 다르다. 이 집단에서는 상호 급부에 대한 객관적 계산은 중요하지 않다.

경제심리학의 영역에서 근본적인 것은, 단순한 사회에서 생산은 상품을 주문하는 고객을 위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산자와 고객이 서로를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의 대도시는 거의 전적으로 시장을 위한 생산, 즉 생산자가 보지 못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고객을 위한 생산에 의해서 유지된다. 이렇게 되면 고객과 생산자 양측의 이해관계는 몰인정한 객관성을 띠게 되고 이성적 계산에 입각한 경제적 이기주의는 예측할 수 없는 개인적 관계 때문에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분명 대도시에서 자가 생산과 직접적 상품교환의 잔재를 몰아내고 맞춤 고객을 위한 노동을 하루가 다르게 축소시키는, 대도시에 지배적인 화폐 경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 만큼 아무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신적•지적 기조가 먼저 형성되고 여기서 화폐 경제가 파생된 것인가, 아니면 거꾸로 화폐 경제가 정신적, 지성주의적 기조를 형성하기 위한 결정적 요소였는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39]이다. 확실한 것은 대도시적 삶의 형식이 이러한 상호 작용의 가장 비옥한 토양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 점을 영국의 유명한 헌법사가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입증하고 싶을 따름이다. 영국의 역사 전체를 통해 런던은 결코 영국의 심장이 아니라, 종종 영국의 이성으로, 또는 언제나 영국의 돈주머니로 행세했다는 것이다.

삶의 표면에 나타나는 일견 미미한 움직임에는 동일한 정신적 흐름들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위의 사실 못지않게 특징적이다. 현대적 정신은 점점 더 계산적인 정신이 되어왔다. 실제 삶의 계산적 정확성은 화폐 경제가 이룩한 것으로, 이는 세계를 계산 문제로 환원하고 세계의 모든 부분을 수학 공식으로 표현하려는 자연과학의 이상에 부합한다. 화폐 경제는 우선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저울질하고, 계산하고, 숫자로 규정하고, 질적 가치를 양적 가치로 환원하는 일로 소진하게끔 만들어버렸다. 화폐가 지닌 계산적 본질을 통해 삶의 요소들 간의 관계에서 동일한 것과 동일하지 않은 것을 규정하는 정확성과 확실성, 약속과 협정의 명확성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외적으로는 회중시계가 널리 보급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이 나타나게 된 원인이자 그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대도시의 조건들이다. 전형적인 대도시인의 인간관계와 업무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 보통이다.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관심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한 결과 그들의 관계나 활동들은 다양한 형태의 조직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약속이나 업무 추진에 있어서 정확을 가하지 않으면 사회 전체는 수습하기 어려운 혼동 상태로 붕괴될 것이다. 만약 베를린에 있는 모든 시계 바늘이 단 한 시간 동안이라도 느닷없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간다면, 베를린 전체의 경제적 관계와 그 밖의 모든 관계는 오랜 기간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40] 게다가, 외적인 요소로 보일지는 모르나, 대도시에서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다리거나 헛걸음질하는 것은 엄청난 시간 낭비를 의미하게 된다. 이렇게 대도시에서 사는 기술은 모든 활동과 상호 관계가 확고하고 초주관적인 시간의 도식을 아주 정확히 따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도 지금까지 행한 모든 고찰의 총괄적 과제라고 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존재의 표면에 있는 하나의 점은 일견 그 표면에 속하거나 표면에서 생긴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점으로부터 정신의 심연으로 추를 드리울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또한 외적으로 아주 하찮아 보이는 것들도 모두 궁극적으로는 일정한 지침에 따라 삶의 의미와 양식에 대한 최종적 결정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도시 삶이 팽창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정확성, 계산 가능성, 치밀성은 대도시의 화폐 경제적, 지성주의적 성격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내용들에도 반드시 일정한 색채를 부여한다. 또한 그것은 외부로부터 보편적이고 도식적인 정확성을 지닌 삶의 형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삶의 형식을 규정짓고자 하는 비합리적, 본능적 그리고 지배적 기질과 충동들을 배제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기질과 충동들을 특징으로 하는 자기 주권적인 존재들 역시 도시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경우 그러한 존재는 도시의 전형적 존재와 대립하게 된다. 러스킨이나 니체 같은 인물들이 대도시에 대해 느낀 깊은 증오는 여기서 설명된다. 이들은 도식화될 수 없는 고유성을 지닌, 따라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될 수 없는 삶에서만 삶의 가치를 발견한다. 따라서 이들은 대도시를 증오하는 것과 똑 같은 이유에서 화폐 경제와 지성주의적 존재를 증오한다.

[41]삶의 형식의 정확성과 치밀성으로 가장 비인격적인 구조를 만든 바로 그 요소들이 다른 한편에서 가장 인격적인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마 둔감함처럼 절대적으로 대도시에 해당되는 정신적 현상은 없을 것이다. 우선 둔감함은 대도시의 지성주의를 고양시킨다고 생각되는 신경 자극이 급속도로 변화하면서 대립적 형태로 밀려들기 때문에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정신적으로 무기력한 둔한 사람들은 둔감해지지 않는 게 보통이다. 마치 무절제한 향락 생활이 신경을 더 이상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극도로 자극하면서 결국 우리를 둔감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은 인상들도 그 변화가 급격하고 대립적인 경우 신경에 무리할 정도의 반응을 요구하게 된다. 즉 신경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더 이상 새로운 힘을 축적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혹사당한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자극에 대해 거기에 합당한 에너지를 가지고 반응하는 능력이 없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무능력이 한적하고 변화가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보다 대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뚜렷이 나타나는 바로 그 둔감함이다.

대도시의 둔감함의 이와 같은 생리학적 원천에는 화폐 경제에서 유래하는 다른 원천이 합세한다. 둔감함의 본질은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 증세이다. 그렇다고 우둔한 사람에게처럼 그것이 전혀 지각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사물의 차이들이 지닌 의미나 가치, 나아가 사물 자체를 공허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둔감해진 사람에게 그러한 차이들은 모두 똑같이 침침하고 음울한 색조로 나타나며 다른 것보다 선호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영혼의 이러한 심정은 철저하게 대도시 안에 침투된 화폐 경제에 대한 충실한 주관적 반영이다.

[42]돈은 사물의 모든 다양성을 균등한 척도로 재고, 모든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표현하며, 무미건조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모든 것의 공통분모임을 자처함으로써 아주 가공할 만한 평준화 지계가 된다. 돈은 이로써 사물의 핵심과 고유성, 특별한 가치, 비교 불가능성을 가차 없이 없애버린다. 사물들은 부단히 흐르는 돈의 흐름 속에서 각자의 비중에 따라 부유하면서 동일한 수준에 놓이게 되고, 다만 이 수준 위에서 얼마나 큰 범위를 차지하는가에 따라서만 구분된다. 개별적인 경우에 있어서는 사물이 돈과의 등가 관계 속에서 채색되거나 퇴색되는 정도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이 돈으로 살 수 있는 대상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 아니 아마도 이미 대중들이 어디에서나 이러한 대상들에 공적으로 부여하는 전반적인 성격을 통해서, 돈에 의한 사물의 평가는 이제 확연히 인식할 수 있는 현상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화폐 순환의 본거지이면서 사물의 구매 가능성에 있어 소도시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 대도시는 또한 둔감함의 고유한 터전이 된다. 어떻게 보면 사람과 사물이 몰려 있기 때문에 개인들이 고도의 신경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의 결과가 둔감함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조건이 양적으로 팽창하면 그러한 상황의 결과는 그 반대, 즉 둔감함이라는 고유한 적응 현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적응 현상을 통해 신경은 대도시 삶의 내용 및 형식에 맞출 수 있는 가능성을 그에 대한 반응을 중단하는 데서 찾는다. 이는 일정한 성격의 자기 보존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객관적 세계 전체의 가치를 부정한다는 대가가 따른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자기 비하의 감정에 빠지게 되는 인격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인간 주체는 전적으로 자신을 삶의 이러한 존재 형태와 타협시[43]키는 반면에, 그에게는 대도시에 대항하는 자기 보존 과정에서 이에 못지않게 부정적인 성격의 사회적 태도가 요구된다. 서로에 대한 대도시인들의 정신적 태도는 형식적 측면에서 속내 감추기라고 볼 수 있다. 만약 무수한 사람들과의 쉴 새 없는 만남에 대해서 매번 내적인 반응을 보여야 한다면—만나는 사람 거의 대부분을 알고 그와 긍정적인 관계를 갖게 되는 소도시라면 몰라도—사람들은 내적으로 완전히 해체되어 상상하기 어려운 정신적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혹은 이러한 심리학적 사정 때문에, 혹은 대도시 삶에서 스쳐 지나가는 요소들에 대해 당연히 갖게 되는 불신 때문에, 우리는 그처럼 속내 감추기의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우리는 여러 해 동안 이웃들의 얼굴조차 알지 못하고 지낼 수 있으며, 또한 소도시 주민들이 보기에 차갑고 감정도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잘못 알고 있지 않는 한, 외적으로 속내를 감추는 이러한 태도 속에는 단지 냉담함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하는 것보다 더 자주 은밀한 반감, 상호 적대감과 반발심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심적 상태는 어떤 계기에서든 가깝게 접촉하는 순간 당장 증오와 투쟁으로 번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관계의 범위가 확장된 삶은 내적으로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동정심, 냉담, 반발심이라는 다양한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냉담함이 작용하는 영역은 겉으로 보는 것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다. 우리의 정신은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거의 모든 인상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특별한 감정으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은 의식되지 않고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며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곧 무관심에 빠진다. 사실 이러한 무관심은 서로에 대한 무분별한 암시가 견디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로 부자연스럽다.

[44]대도시의 전형적인 이러한 두 가지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반감이다. 반감은 잠재적 또는 실제적 적대심의 전 단계에 해당한다. 반감은 거리를 두면서 회피하는 태도를 가져온다. 이러한 태도가 없이는 대도시적 삶은 영위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반감의 정도, 방향, 그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주기, 반감을 표명하는 형식들,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대도시 삶의 분리 불가분한 전체를 이루는데, 여기에는 한정된 의미에서 모든 것을 통일시키는 모티브들이 동시에 작용한다. 대도시적 삶을 형성함에 있어서 직접적으로는 불협화음으로 보이는 것이 실상은 그 안에 깔린 기초적 사회화의 형식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처럼 현저한 반감을 숨기면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태도는 다시금 대도시의 훨씬 보편적인 정신적 삶의 형식 혹은 외관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이러한 태도는 개인들에게 일정한 방식의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해주는데, 다른 상황에서 그와 비견될 만한 것은 없다. 이러한 자유는 사회적 삶 전반의 커다란 발전 경향들 가운데 하나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서, 그 중에서도 거의 모두에게 통용되는 공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발전 경향들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적 삶이나 현재 형성되는 삶에서 발견되는 가장 초기 단계의 사회적 조직은 상대적으로 작은 집단이다. 이 집단은 이웃 집단이나 낯선 집단, 혹은 어떤 식으로든 적대적인 집단에 대해서 강한 폐쇄성을 지니는 반면에, 내부적으로는 그럴수록 더 긴밀한 결속력을 지닌다. 이러한 결속력은 개개 구성원들이 자신의 고유한 특성들을 펼치거나 자유롭게 스스로 책임을 지는 일을 할 여지를 아주 제한적으로만 허용한다. 이런 식으로 정치 집단, 가족 집단, 정당 조직 그리고 종교 공동체가 생겨난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단체는 자기 보존의 필요에서[45] 강력한 경계 설정과 구심적 통일성을 요구하며 따라서 개인에게는 내적•외적 발전을 위한 어떠한 자유나 특수성도 허용할 수 없다. 이러한 단계에서 사회적 진화는 동시에 두 가지 상이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 일치하는 측면을 따라서 일어난다. 집단이 수적으로 공간적으로 그 의미나 삶의 내용들이 커지는 정도에 따라 집단의 직접적인 내적 통일은 느슨해지고, 다른 집단에 대해 엄격히 설정되었던 원래의 경계는 상호 관계와 결합에 의해서 완화된다. 이와 동시에 개인은 처음에 그어진 한계를 훨씬 넘어 행동의 자유를 얻으며 보다 규모가 커진 집단 안에서의 노동 분업의 기회와 필요성에 따라 주어진 개성과 특수성을 획득한다. 물론 개별 집단들의 특수한 조건 및 세력들에 따라서 일반적인 도식이 수정되기는 하지만, 국가, 기독교, 길드, 정당 그리고 여타 무수한 집단들이 이 같은 공식에 따라 발전해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러한 일반적 도식은 대도시적 삶 안에서 개체성이 발전하는 모습에서도 인식될 수 있다. 고대나 중세 소도시의 삶은 개인에게 외부를 향한 이동과 관계를 제한하고, 내부에서의 자립심과 분화에 제한을 가한다. 현대인은 그러한 제한 속에서는 숨도 쉴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대도시인은 소도시에 가면 적어도 비슷한 종류의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환경에 속하는 집단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다른 집단들과의 관계에서 경계가 해체될 가능성이 제한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그 집단은 더욱더 치밀하게 개인의 업적들, 생활양식 및 사고들을 감시하게 되고, 어떠한 양적, 질적 변종도 전체의 틀을 깨뜨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고대의 폴리스는 이러한 방향에 따라 전적으로 소도시적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멀거나 가까운 적들에게 끊임없이 존재를 위[46]협받는 상황 때문에 정치적•군사적 유대는 긴밀해질 수밖에 없으며, 시민의 시민에 의한 감시가 이루어지고 독자적 삶을 살려는 개인은 모든 사람의 시기를 받게 된다. 개인의 독자적 삶은 기껏해야 자기 가족에 대해 폭군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면서 억압된다. 아테네의 삶이 보여주는 대단한 역동성과 자극, 독특한 다채로움은 탁월한 개성을 지닌 몇몇 인물들이 개성을 말살시키는 소도시가 부단히 행사하는 외적•내적 압력에 대항해 싸워나갔던 사실로 설명될 것이다. 여기서 긴장된 분위기가 생성되는데 이러한 분위기에서 약한 자들은 억압되고, 강한 자들은 자신을 열정적으로 지켜나가도록 고무되었다. 바로 이 과정을 통해 아테네에서는 다른 식으로 표현하기 힘든, 우리 식의 정신적 발전에 비추어 보편적인 인간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싹텄다. 여기서 주장하려는 것은 삶의 가장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내용과 형식들은 가장 개별적인 것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사실인데, 이러한 연관성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타당성을 지닌다. 가장 보편적인 것과 가장 개별적인 것은 모두 공통적인 단계를 거친다. 다시 말해 이 양자는 모두 결집력이 강한 조직과 집단을 공동의 적으로 갖는다. 이러한 조직과 집단은 자기 보존을 위해서 외부에 있는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것뿐 아니라 내부에 있는 자유롭고 개별적인 것을 모두 자신의 적으로 보면서 그에 맞서 자신을 방어한다.

봉건 시대에 자유인은 국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 즉 가장 광범위한 사회 집단의 법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사람이었던 반면, 국법에서 배제된 채 봉건적 결사체로부터만 권리를 부여 받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좀더 정신적이고 세련된 의미에서 대도시인은 소소한 일들과 편견들에 얽매이는 소도시인들에 비해[47] ‘자유롭다’. 큰 집단의 정신적 행활 조건들인 상호 무관심이나 속내 감추기는 개인의 독립이 성공할 경우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대도시처럼 인구가 극도로 밀집한 곳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이는 신체적 거리의 가까움과 협소함에서 비로소 정신적 거리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이 가장 외롭고 쓸쓸하게 느끼는 곳은 다름 아닌 대도시의 혼잡 속이라고 하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자유의 이면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누리는 자유가 반드시 그의 정서적 안정으로 나타날 필요는 결코 없다는 사실은 대도시에서 가장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계사적으로 집단의 크기와 인격의 내적•외적 자유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에 비추어 대도시는 자유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비단 행정 구역의 크기나 인구 수 때문만은 아니다. 그 밖에도 대도시는 그 가시적 범위를 넘어서 세계주의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이는 소유 재산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점점 빠른 속도로 그리고 저절로 늘어나는 것과 유사하게 도시의 시야, 경제적•인격적•정신적 관계들, 즉 도시의 관념적 행정권은 일정한 선을 넘어서자마자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기 때문이다. 도시의 범위가 역동적으로 확장되면, 이는 다음 단계에 그와 동일한 크기만큼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크기로 확장되는 발판이 된다. 마치 실이 짜일 때 실 마디마다 새로운 실들이 저절로 불어나는 것과 같다. 또한 마치 도시 내부의 교통이 촉진되기만 해도 지대가 증가해서 저절로 토지 소유자의 이윤이 늘어나는 것과 같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삶의 양이 매우 직접적으로 질과 특성으로 전환된다. 소도시적 삶의 영역은 주로 소도시 안에 포함되어 있거나 소도시와 더불어 이미 결정된다. 대도시에서는 도시 내부의 삶의 물결[48]들이 도시를 넘어 보다 넓은 국가적•국제적 영역으로 뻗어나간다. 바이마르는 결코 그에 대한 반박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바이마르가 앞에서 말한 대도시적 성격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은 몇몇 개인들에 의존한 것으로 이들이 죽으면서 소멸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대도시는 심지어 가장 저명한 인사들에게서도 근본적으로 독립해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것은 개인이 대도시 안에서 누리는 독립의 대응물인 동시에 그 대가이기도 하다. 대도시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이처럼 그 기능의 크기가 물리적 경계를 넘어선다는 데 있다. 또한 그러한 활동은 다시 내부에 영향을 주면서 대도시의 삶에 무게와 중요성과 책임감을 가져다 준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그의 신체적 경계나 직접적 활동 영역의 경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들의 총합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도시는 그 직접성을 넘어서는 작용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그 존재가 표출되는 도시의 실제적 범위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대도시의 크기에 대한 논리적•역사적 보충물인 개인의 자유는 비단 이동의 자유라든가 편견이나 고루함의 제거라는 소극적 의미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또한 자유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어디서든 각자 소유하고 있는 특별하고 비교될 수 없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표출된다는 점이다. 우리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자신의 본성을 따르고 있음이—여기에 자유가 있다—확연하게 드러나는 때는 그 표출된 본성이 다른 사람의 본성과 구분될 때이다. 우리 각자가 다른 어느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방식이 다른 사람에 의해 강요될 수 없음을 증명한다.

도시는 무엇보다 경제적 분업이 최고로 발달한 장소이다. 도시[49]는 내부에 여러 가지 극단적인 현상들을 낳는데, 파리에 생긴 새로운 직업, ‘14번째 사람이라는 돈벌이 좋은 직업도 그 한가지이다. 이 직업은 사교 모임에 참석한 인원이 13()인 경우, 모자란 14번째 자리를 신속하게 채워주기 위해 모임에 적절한 복장을 하고 참석해주는 일인데, 사람들은 집에 간판을 달고 이 일에 종사했다. 도시는 규모가 커짐에 따라 더욱더 분업에 결정적인 조건들을 제공한다. 고도의 다양한 성과들을 수용할 만한 크기의 집단이 이 경우이다. 개인들이 몰려 있어 수요자를 둘러싼 경쟁을 벌이는 경우 각 개인은 다른 사람에 의해 쉽게 퇴출당하지 않도록 자신의 성과를 전문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도시의 삶은 생계를 위한 투쟁을 자연과의 투쟁으로부터 사람을 둘러싼 투쟁으로 전환시킨다는 점이다. 또한 여기서 얻은 이득은 자연이 베푼 것이 아니라 사람이 베푼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이미 암시한 것과 같은 전문화의 원천뿐 아니라 보다 더 심층적인 원천이 작용한다. 다시 말해 공급자는 수요자 안에 언제나 새로운, 보다 독특한 욕구들을 불러일으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다 고갈되지 않은 수입의 원천을 발견하기 위해, 또한 쉽게 대체될 수 없는 기능을 찾기 위해 자신의 성과를 전문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성이 생기고 이는 나아가 일반 대중의 욕구를 분화•세련화시키고 풍부하게 만든다. 이로써 당연히 대중 내부에는 개별적 차이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이는 좁은 의미에 있어서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특성들의 개별화로 이어진다. 도시는 크기에 비례해서 그러한 개별화를 촉구한다. 여기에는 명백히 일련의 원인들이 존재한다. 우선 대도시 삶의 차원에서는 고유한 인격을 펼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의미와 에너지의 양적 고양이 어느 한도에 이르면 사람들은 질적 특수화를 시도하는데,[50] 이는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자극함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주위의 사회 집단이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괴팍한 행동의 유혹을 받기에 이르는데, 이는 유별남, 변덕, 멋 부리기 등 대도시 특유의 과장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의미는 결코 그러한 행동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있다. 즉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다르고 남보다 돋보이며 이로써 주목 받는 존재라는 점이 중요하다. 결국 많은 사람에게 이러한 존재 형식은 다른 사람의 의식을 통해 우회적으로 일종의 자긍심과 자신도 한몫을 차지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획득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계기는 비록 사소하게 생각되지만 대도시적 존재 형식에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 소도시의 관계와 비교해볼 때 대도시에서 개인들의 만남은 짧고 드물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그리고 오랜 시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인격에 대해 분명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소도시에서보다] 대도시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상대에게 다가가 자신의 개성을 강조하려는 유혹이 훨씬 크다.

대도시가 어떻게 해서 가장 개인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충동을 불러일으키게 되는지에 대한 가장 심층적인 이유는—그것이 항상 옳은 것인지 또한 항상 성공할 것인지를 떠나—내가 보기에 다음과 같다. 현대 문화의 발전은 객관 정신이 주관 정신보다 더 우세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다시 말해 언어나 법률, 생산 기술이나 예술, 과학이나 가정용품들에 구현된 정신의 총합은 나날이 발전하는데 비해 인간 주체들의 정신적 발전은 매우 불완전하며 점점 더 뒤쳐진다. 이를테면 수백 년 전부터 사물과 인식, 제도 및 편의 시설들에 구현된 엄청난 문화를 조망해보고, 이러한 문화를 동시대 개인들의—[51]적어도 상류 계층 사람들의—문화적 발전과 비교해보면 성장 속도에서 양자의 놀라운 차이점이 드러난다. 많은 점에서 개인들의 문화는 지성, 유연성, 이상주의에 있어서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근본적으로 분업이 늘어난 결과이다. 왜냐하면 분업은 개인에게 점점 일면적인 업적만을 요구하게 되고, 그러한 일면적 업적이 증대하게 되면 개인의 인격 전체를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어쨌든 객관적 문화가 비대해지는 경우 개인은 점점 더 이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된다. 명백히 의식할 수는 없지만, 실제적인 삶에서 그리고 거기에서 느끼는 어렴풋한 전반적인 감정에서 개인은 이제 무시해도 좋은 존재로 격하된다. 곧 개인은 사물들과 세력들의 거대한 조직에 비해서 한낱 먼지와 같은 존재로 격하되는데, 이들 사물과 세력은 개인에게서 모든 진보, 정신력, 가치들을 점점 빼앗아가고, 그것들을 주관적 삶의 형식이 아니라 순수하게 객관적 삶의 형식으로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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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94
박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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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스승님께서 박형준 새 시집을 읽어보시고 "1부에서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시 몇 편 빼고는 건질 것이 없더라"고, 그래도 서정적 표현을 배울 수 있으니 한 번 읽어보라고 내게 말씀하셨다.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박형준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그만하면 중견의 자리에 들어설 법하므로, 1부에 실린 시들을 읽고 마음에 들면 그 나머지도 마저 읽겠다는 생각을 하며 시집을 펴 들었다. 그러나 이건 왠 일인가! 박형준이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박형준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미당만이 남아있다. 

  가장 나를 실망시킨 것은 그가 미당의 한 마디를 자신의 시 속에서 표절해 놓고 있음이었다. 이번 시집에 실린 「가을 이불」이라는 시의 마지막 4연은 명백한 표절이다. "고향 집 / 늙은 어머니가 꾸미는 / 가을 이불 한 채 찬란하다" 이것을 두고 나는 무슨 근거로 표절이라 생각하는가? 내가 소장한 『서정주 시집』(범우사, 1997)의 앞머리에는 박재삼이 직접 쓴 서정주론인 "미당 선생의 시"라는 짤막한 발문이 들어있다. 그 중 한 대목. "약 30년 전, 내가 현대문학사(現代文學社)의 기자로 있을 때, 미당 선생은 시고료(詩稿料) 몇 푼을 탔다. 눈짓으로 나가자는 것이다. 선술집에 갔는데, 마침 그 집은 이불을 꾸미고 있었다. 늦가을이었다. 미당 선생은 대뜸 한다는 말씀이, "아주머니 가을 이불 꾸미는 걸 보니까 내 마음이 찬란해지는구먼" 했다. 그냥 하시는 말씀인데, 내가 듣기로는 '찬란하다'는 것이 정통으로 들어맞는 시인적 발성(發聲)이라는 것이었다." (14쪽) 

  남의 생각이나 표현은 그 발표의 형태를 떠나서 나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을 내 글 속에 빌려올 경우에는 반드시 빌려온 경위를 밝혀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빌리는 게 아니라 훔치는 것이 된다. 비록 가을 이불이 찬란하다는 표현 자체가 미당과 박재삼의 술자리에서 오고 간 사담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엄연히 미당의 것이다. 그런데 박형준은 자신의 시에서 그것의 저작권이 미당에게 있음을 숨기고 있다. 여기서 나는 내 마음 속에서 박형준이 진정으로 시인의 자질을 가진 것인지에 관하여 솟구쳐오르는 의구심마저 지우기 차마 어려웠음을 밝혀둔다. 이 시집의 또 다른 시 「아침 달 뜨면」에서는 미당의 시 한 구절을 차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워낙 유명한 구절이라 차용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명한 구절에는 차용 사실을 밝히면서도, 유명하지 않다고 숨기는 것은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 그쯤은 눈 감아준다 치자.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해서라도 박형준은 자신의 시를 살려냈는가? 오히려 나는 내 스승님의 생각과 달리 1부에서조차도 단 한 편의 변변한 시를 도저히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세 번째 시집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사랑」이라든지, 「저곳」에서 보여주었던 그만의 독특한 상상력과 어법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오히려 그 시편들이 미당에 가까운 박형준이었고, 박형준이 된 미당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박형준도 없으며 미당도 없다. 더 정확히 말해서, 박형준이 없어져서 미당이 없다. 그는 앞으로 벼랑 끝에 서서 시의 생사를 가르는 절체절명의 심사로 시를 써야만 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시도 없고 그도 없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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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2011-08-26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당의 영향이 눈에 띄는 부분이 확실히 여기저기 많기는 합니다. 저는 자세히는 말하지 못하겠으나, 박형준이 서정시의 명맥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라고 좋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박형준의 가치이기도 하고요. 아마도 '절체절명'의 시는 말씀하신 시들보다, 첫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에 더 가깝겠습니다. 많은 시인들의 시가 뒤로 갈수록 더 느슨해지지만 그만큼 생이 스며드는 것을 보이지요. 시인들은 세월이 갈수록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로 살아가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때문에 직접 살아가는, 목숨이 붙어 있는 시를 쓰려는 것이겠고요. 감각에는 점점 생활이 붙어가고, 시인 특유의 회의는 변화를 맞습니다. 물론 그것이 마음에 안 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또 무작정 마음에 안들어 할 것도 아니지요. 아마도 독자들이 시인 기형도의 첫시집을 낸 후의 요절에 품는 묘한 감정이 그것 아니겠습니까.

담연 2011-08-27 14:13   좋아요 0 | URL
먼저 박형준의 최근 시가 서정시의 명맥에 다가간다는 점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지요. 시라는 건 이것이다 하는 순간 이미 이것이 아닌 게 되어버리고, 저것이라 하면 벌써 저게 아닌 것이죠. 왜냐하면 시란 언제나 스스로를 새롭게 바꿔야만 좋은 작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정시가 무엇이라 말할 수도 없는데, 어느 한 시인의 시가 서정시에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평을 들으면 그건 이미 존재해오던 관습에 물이 들고 말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이런 의미에서 박형준의 최근 시는 삶이 스며든 시라기 보다는 '씌어진 시'에 더 가깝다고 해야만 정확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시인의 회의와 느슨함의 문제가 남았습니다. 회의를 통한 변화는 더 나은 방향을 가리킬 때에야 비로소 긍정될 수 있는 거지요. 마음에 들고 안 드는 가능성은 늘 열어 두어야 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를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곤란할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가치판단을 해야 하고, 시인이 시를 살리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명과 용서가 불가합니다.

나목 2011-08-28 02:12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십니다. 시인은 시로 말하는 존재고, 그 시는 평가에 항상 열려있지요. 저는 박형준 시의 감각이 화려한 은유법에서 점점 벗어나서 새로운 방향으로 정제되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우호적이라 그렇게 말했지만, 그 반대의 의견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앞부분 '아버지'에 관련한 시 몇편은 저또한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고요.사실은 이 호오에 대한 논쟁은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할게 아니라, 시 한편 한편을 살피면서 '평론'을 펼쳐야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능력이 안되기에 생략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조금 더 논쟁적일 수도 있는데, 저는 어떤 장르도 '명맥'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정전 등을 통한, 일종의 기대지평이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서정시를 서정시로 볼 수 있는 데에는 평자들이 '서정시'로 보고 있는 일군의 작가와 시들이 있기 때문이지, 완전한 무에서 매번 서정시의 정신에 대한 논쟁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명맥에 다가갔다는 말 자체에 굳이 거부반응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답습'만이 시를 쓰는 대안이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다만, 시인이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는 아니고 보면, 생활이 스몄든 아니든 간에 시또한 단련 혹은 학습을 통해 "쓰여가는 것"일 테니, 한편의 시집에 시인의 서툰 행보들이 절창과 함께 보이는 것은 당연하고, 박형준은 미당 등을 통해서 그 '서정시'라는 것을 터득해가면서도 동시에 자기 세계로 그것을 번역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저는 이 시집 몇 편의 시에서는 그러한 조짐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시가 그랬는지는 이야기가 너무 격렬해질까봐 생략합니다. 사실 그래서 저는 그것이 거침없이 확대될 다음 시집이 기다려지는 감도 있습니다.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이 시집이 너무나 좋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좋은 점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서, 님의 실망에 동감하는 바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담연 2011-08-28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작품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님께서 재미있게 읽으셨던 시 몇 편만 제게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꼽아주신 작품들에 관한 제 자신의 세밀한 읽기를 본문에 추가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면.. 2011-09-12 02:0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생갈날 때마다 울었다"라는 시에 대해서 세밀한 읽기를 해주시면 안될까요?? 저는 그 시 좋게 읽었거든요.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저는 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평시에 시를 읽지도 않구요)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시를 읽고서도 사실 별 감흥이 없었는데, 그 시를 해설한 글을 읽고서야 그게 제 얘기구나 란 생각에 그만 반하고 말았는데요. 그래서 이 시를 님이 말쓰하시는 세밀하게 읽기를 하면 또 무엇이 나올까? 란 순수한 호기심에 부탁 드리는 겁니다.(당연히 비판적인 글을 기대하고 님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담연 2011-09-12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절이라는 수치를 저지른 자의 시를 왜 굳이 자꾸 읽으려고들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 심각한 문제가 그 자체로 논란을 일으키지 못하는 암담한 문학계도 실망스럽니다. 게다가 어떤 시에 대해 쓴 해설을 읽고 나서야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사실 역시 그 시를 쓴 자에겐 그렇게 유쾌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 좋은 시는 아무런 해설도 필요치 않기 때문이지요. 그 해설을 쓴 자의 이름도 무척이나 궁금하군요. 하지만 님께서 앞으로 자주 시를 읽으시겠다고 저와 약속을 해주신다면, 기꺼이 제 시간을 쪼개서라도 언급한 시를 놓고 뜯어 읽겠습니다.

음... 2011-09-12 12:5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해설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씀은 아마도 맞는 말씀같습니다만, 저처럼 시를 해석(혹은 감상이든)할 능력이 전혀 안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해설이 무용하지 않다고 봅니다. 중학교 시절 국어선생님께서도 님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으나, 저는 오히려 해설 덕분에 그정도라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했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즉, 님 말씀이 옳기는하나, 수준이 너무 낮은 사람입장에서는 예외가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란 말씀였습니다. 그렇지 않고, 저같은 사람이 혼자서 시를 이해하려하면 결국엔 만년 바둑 7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과 다를바가 없다고 봅니다.(물론 재미야 7급 때가 최고라 합니다만..)

이런 제 현실에서 시를 자주 읽는다고 약속드린다면 거짓에 불과 한거 같네요.ㅜㅜ

그렇다면 혹시 괜찮은 시집을 한 권 추천이라도 해주셨으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단, 1. 김경주 시인처럼 보통 사람에게 난해한 것은 삼가주셨으면... 2. 1980년도 이후의 출판 시집였으면 좋겠습니다. 3. 보통 사람도 한글맛을 느낄 수 있는 시집였으면 좋겠습니다.(특히 소리내어 읽는 맛!)



p.s. 로쟈의 저공비행인가요? 거기 들어갔다가 우연히 신형철씨의 해설을 보고 이 시를 알게 되었습니다.

담연 2011-09-14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심자를 위한 시집 : 나희덕 <어두워진다는 것>, 손택수 <호랑이 발자국>, 김기택 <사무원>, 문태준 <가재미>. 중급자를 위한 시집 : 하종오 <무언가 찾아올 적엔>, 이윤학 <꽃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김선우 <도화 아래 잠들다>. 함민복 <말랑말랑한 힘>. 고수를 위한 시집 : 정진규 <사물들의 큰언니>, 이성복 <그 여름의 끝>,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황지우 <어느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참고로 시 자체가 좋은 건지 신형철 해설이 좋은 건지 구별이 필요하죠.

음.. 2011-09-13 12:0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럼 믿고 초중급자 시집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