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Against Interpretation: And Other Essays (Paperback) - And Other Essays
Sontag, Susan / Picador USA / 2001년 8월
평점 :
나는 수잔 손택(Susan Sontag)의 예술론을 한 마디로 '흥분하는 예술론(theory of exciting art)'이라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해석(interpretation)에 맞서는 이유는 예술의 영토에서 오랜 시간 왕좌를 지켜 온 '관념(idea)'을 마침내 퇴위시키고, 그 자리에 감성(sensability)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그럴 때에만 예술은 비로서 예술다워질 수 있으며, 예술다운 예술만이 보다 많은 인간들을 흥분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예술적 에로티시즘(eroticism)이다.
이는 한국 예술계, 특히 문학계에도 매우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는 논리다. 예술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중요하며, 의도가 아니라 스타일이 전부이며, 도덕을 벗어나 미학성을 회복해야만 한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럴 때에만 예술은 예술 본래의 감성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함으로써 인간의 삶에 복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론이 가장 빛나는 부분은 따로 있다. 그녀가 주창하는 흥분으로서의 예술은 철저히 지식인을 위한 예술에 반대하는, 일종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다. 따라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수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most people)을 지향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형식을 분석할 수 있는 구체적 언어의 개발과 획득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한다.
한국에서 새로운 문학을 주장하는 이들이 사상적 뿌리로 삼고 있다는 수잔 손택. 그러나 그들은 과연 그녀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녕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위한 문학에 충실한가? 그들 자신 관념의 유희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오히려 지성주의적 작태를 지속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들은 새로운 문학이 가지는 미학성을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언어들이 아니라 지극히 모호하고 추상적인 비평용어들을 남용하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손택의 논의 자체도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녀는 내용과 형식의 구분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이는 데카르트주의적인 정신-육체(mind-body) 이분법의 틀을 전혀 벗어나지 못한다. 어디까지가 내용이고 어디서부터 형식인가? 누구든 이 잣대를 가지고 모든 예술작품들을 들여다 보라. 아마 그녀 자신도 당황하고 말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구분이 아니라, 예술이 실질적으로 얼마만큼의 힘(power)을 발휘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그녀의 표현을 따르자면, 예술이 실제로 흥분을 어떤 방식으로 유발할 수 있으며,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밝히는 작업이 우리가 몰두해야 할 보다 절박한 과제가 아닐까?
둘째, 그녀의 예술론은 턱없이 빈약한 현실 분석으로부터 나온다. 그녀는 단지 오늘날의 현실을 고급 문화(high culture)와 대중 문화(mass culture), 이렇게 양극단으로 나뉜 상태로 파악한다. 그렇기에 고급 문화를 부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지성을 거부해야 하며, 대중 문화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과잉되고 이색적인(campy) 예술을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너무나 단순한 현실 파악이므로, 그녀의 예술론 역시 단순한 지향점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것은 바로 댄디즘이다. 그녀는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지상주의(aestheticism)를 자기 예술론의 토대로 삼으면서도 와일드의 낡은 댄디즘과는 다른 새로운 댄디즘을 요청한다. 그러나 댄디즘 사이의 낡고 새로운 차이는 단순히 비일상적이냐 일상적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이것이 대다수 인민을 지향하는 그녀의 문학론과 얼마만큼 괴리를 갖는 것인가? 그녀의 2003년 작 『타자들의 고통을 헤아리면서』(Regarding the Pain of Others)와 자신의 댄디즘 사이의 거리는 또 얼마나 넓디넓은 것인가?
요약하자면 2000년대에 뉴 웨이브, 미래파 등으로 호명되었던 한국의 많은 문학인들은 첫째로 손택의 예술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둘째로 손택의 예술론 자체가 심각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2000년대를 주도한 한국 문학계는 오류를 오류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중 오류의 산물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이 책은 1966년에 나왔으며, 이미 시인 김수영도 그녀의 글을 접한 바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손택을 추종하는 한국의 신진 문학가들 역시 그렇게 최신은 아니라는 뜻이다. 김수영은 자신의 친구였던 시인 박인환의 댄디즘을 그토록 증오했던 사람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김수영의 일기를 잠깐 들여다보자.
![](http://blog.ala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start.gif) |
|
|
|
나는 이 시 노트를 처음에는 Susan Sontag의 「스타일론」을 초역한 아카데믹한 것을 쓰려고 했다. 그러고는 쓰지 않으려고 했다. 다시 Sontag을 초역(抄譯)하려고 했다. 그러나 Steven Marcus의 「소설론」을 번역한 후 생각해 보니 Sontag이 싫어졌다. 게다가 잊어버렸다. Sontag의 「스타일론」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Style is the Soul이다. Mary McCarthy는 이를 Style-non style이라 말하고 있다. 나는 번역에 지나치게 열중해 있다. 내 시의 비밀은 내 번역을 보면 안다. 내 시가 번역 냄새가 나는 스타일이라고 말하지 말라. 비밀은 그런 천박한 것은 아니다. 그대는 웃을 것이다. 괜찮아. 나는 어떤 비밀이라도 모두 털어내 보겠다. 그대는 그것을 비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그대의 약점이다. 나의 진정한 비밀은 나의 생명밖에는 없다.
- 김수영, 「시작 노트 6」, 『김수영 전집 2』, 민음사, 2003, 450~451쪽.
|
|
|
|
![](http://blog.alad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end.gif) |
김수영의 산문답게 알듯 말듯하면서도 논리가 있고, 중언부언하면서도 매혹적이다. 그는 손택의 '스타일'이라는 문제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을 번역하려고 했다. 오늘날 손택을 들고 와서 한국 문학을 쇄신시키겠다고 벼르는 이들 역시 일종의 번역 의지(will to translation)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움은 일종의 스타일이다. 그리고 한국 문학에서 새로움을 주장하는 것은 여지껏 (서구 문학의) 한국적 번역 냄새가 나는 스타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나의 견해 역시 김수영에 따르면 천박한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생명의 문제이며, 영혼의 문제다. 그것이 (서구로부터) 유입된 첨단, 유행을 좇는 갱신인들 무엇이 문제인가. 손택을 직접 읽어보면 알겠다. 그녀의 과제는 오직 스타일 뿐이다. 문학에서 지겨운 도덕, 의도, 내용 등을 발견해내려는 행위를 그녀는 지긋지긋한 지식인들의 몸서리쳐지는 지성주의라고 비판한다. 중요한 것은 오직 예술이다. 문학은 문학답기만 하면 그만이다. 예술은 최대치로 예술이 되라. 그리고 이것이 오직 예술가의 영혼이며 예술에 내재된 생명의 강령이다.
![](http://blog.ala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start.gif) |
|
|
|
발뺌을 해두지만 나는 정치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의 스타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상이(相異)하고자 하는 작업과 심로(心勞)에 싫증이 났을 때, 동일하게 되고자 하는 정신(挺身)의 용기가 솟아난다. 이것은 뱀 아가리에서 빛을 빼앗는 것과 흡사한 기쁨이다. 여기 게재한 3편 중에서 「눈」이 그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는 <폐허에 눈이 내린다>의 여덟 글자로 충분하다. 그것이, 쓰고 있는 중에 자코메티적 변모를 이루어 6행으로 되었다. 만세! 만세! 나는 언어에 밀착했다. 언어와 나 사이에는 한 치의 틈서리도 없다.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로 충분히 <페허에 눈이 내린다>의 숙망(宿望)을 달(達)했다. 낡은 형(型)의 시다. 그러나 낡은 것이라도 좋다. 혼용되어도 좋다는 용기를 얻었다. 완전한 희생. 아니 완전한 희생의 한걸음 앞의 희생.
- 김수영, 「시작 노트 6」, 『김수영 전집 2』, 민음사, 2003, 452~453쪽.
|
|
|
|
![](http://blog.alad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end.gif) |
'정신(挺身)'이란 단어가 생소하여 사전을 찾아보니, '무슨 일에 앞장서서 나아감'이란 뜻이란다. 기존의 것으로부터 새로워짐, 기존의 것과 상이해짐은 이미 지겹고 싫증나는 것이다. 김수영의 이런 점 앞에 견주어보면, 새로움을 자처하는 한국의 문학가들은 역시 이미 이류이며 B급이다. 인용한 시작 노트는 「이 한국문학사」, 「H」, 그리고 「눈」, 이렇게 세 편의 시에 달려있는 것이다. 특히 「눈」은 언어와 자신 사이의 간격이 없어진, 다시 말해 언어와 자신이 하나의 '온몸'이 된 사건이라고 자평한다. 스타일이란 이렇게 생명을 구가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낡음이나 새로움은 전혀 문제가 되질 않는다.
손택의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몇 가지 팁이 필요하겠다. 그녀의 모든 에세이들을 다 읽을 필요는 없다. 몇 편만 읽어봐도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해석에 맞서(Against Interpretation)」, 「'이색(異色)'에 대한 노트(Notes on "Camp")」, 그리고 김수영이 번역하고자 했던 「스타일에 대하여(On Style)」만 읽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또 한 가지, 그녀는 워낙 많은 문화적 경험들을 (특히 미국적 상황에서) 글 속에 쏟아넣었다. 배경지식의 차이에 압도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런 나열식 글쓰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하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무시하고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