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의 큰언니 책만드는집 시인선 1
정진규 지음 / 책만드는집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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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규 선생은 39년생이니, 나이 일흔을 넘어섰다. 비슷한 연배의 시 쓰는 사람들로는 이건청, 이승훈, 오탁번, 허만하 등이 있으나 그 연배의 시인으로는 정진규 선생의 시가 단연 으뜸이다. 특히 이 시집이 그렇다. 그 나이가 되도록 이토록 긴장감을 유지하는 시편들을 그토록 꾸준히 창작할 수 있다니! 그가 여적지 시 월간지 주간을 맡으며 부지런히 요즘 시와 호흡을 맞추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도 그의 놀라운 시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인일까? 아무튼 이 시집은 이번 달 내가 읽은 시집들 가운데에서도 제일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시집을 받아 들면 우선 눈에 띄는 점이 '율려(律呂)'라는 형식이다. 시집의 부제마저 '율려집(律呂集)'이며, 수록된 모든 시에는 각각 '律呂集 1'부터 '律呂集 52'까지의 연번이 붙어있다. 율려란 시인이 최근에 수립해놓은 일종의 시론 같은 것인데, 상당히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이어서 시 전편을 읽어 보아도 그 구체적 내용을 잘 알기 어렵다. 율려 시론에 입각하여 시를 쓴다 하였지만, 때로는 오히려 그 시론 때문에 시 자체의 완성도가 떨어질 때도 있다. 다만 이제는 시인이 생각한 대로 쓰는 그대로가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 시론의 내용을 읽는 이가 이해하지 못해도 시 자체가 좋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새로 심은 배롱나무 두 그루」라는 시를 읽다 울컥, 하고 눈물을 쏟을 뻔했다. 

   같이 살자 해놓고서도 우후죽순이 아니라 우후 잡초로 솟아오르는 쇠뜨기 질경이 괭이눈들을 서둘러 뽑고 있는 나는 아직도 빗장이 많고, 좀 지나 땅이 말라 물기 가시면 풀들이 뽑히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방어는 이토록 훈련되어 있다 해마다 새 나무들을 심어서 먼저 심은 나무들의 자리와 허공을 갑갑하게 하는 것 또한 자유의 황홀을 탐한다 하면서 욕망의 황홀에 아직껏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야 비인 자리를 그냥 두고 볼 수 있을까 냅둘 수 있을까 지난봄 새로 심은 배롱나무 두 그루가 어제오늘 심상치 않다 놀라워라, 滿開로 나를 황홀케 한다 빗장을 열어젖힌 것인가 갑갑한 허공을 터뜨린 것인가 革命인 것인가 자유의 황홀을 내게 압도적으로 가르치는 것인가 내 안에 넘치도록 가둔, 곳간에 쟁이고 쟁여둔 욕망의 황홀인가 어느 쪽인가 또 한 手 눈치채고 있는 중이다 몸이 뜨겁다

   "자리와 허공을 갑갑하게 하는 것 또한 자유의 황홀을 탐한다 하면서 욕망의 황홀에 아직껏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을 읽다가 나는 황망히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몸을 바르게 해야만 했다. 자유라고 다 같은 자유가 아닌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이름뿐인 자유에 도취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욕망의 해방에 도취하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추상적인 개념어들은 시에서 성공적으로 활용되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유니, 욕망이니 하는 말들이 전혀 메마르거나 질척거리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시어로 쓰이고 있다. 화자의 행위, 화자를 둘러싼 상황, 그리고 그것들을 매끄럽게 이어주는 사유의 흐름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배롱나무에 꽃 피는 것을 마침내 '혁명'이라 부르고 만다. 하기사 이 땅에서 그만한 혁명이 또 어디 있으랴. 

  맨 마지막 한 문장인 "몸이 뜨겁다"라는 구절은 과연 절창이다. 이런 게 진정 시인만이 쓸 수 있는 표현이라고 나는 느낀다. 평범한 사람들은 결코 예측할 수 없는, 그리하여 결국엔 허를 한참 찔리고야 마는 그런 표현 말이다. 그리고 그걸 가능케 만드는 게 바로 시인만의 어법이며 그 시의 개성이다. 앞서 언급한 '율려'의 시론이 무엇인지 나 스스로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없지 않은데, 그 시론의 특징 중 핵심적 요체가 "몸이 뜨겁다"는 구절을 낳았다고 헤아려본다.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반응이란 황홀한 감각 혹은 감정의 육체적 현상이다. 한 마디로 '몸'이 굉장히 중요하다. 세상을 다스리고 움직이는 이치나 원리 따위를 포착하여, 거기에 육체와 물질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시인의 창작 원리다. 

  예를 들어 「비 오는 날」에서는 "비 오는 날은 내가 무관하지 않다 모든 사물들과 유관하다 젖어서 그것도 아득히 유관하다 비안개 피어오른다 젖어서 이어진다"라는 구절이 시인의 눈에 밟힌 우주의 질서이다. 거기에 '콩잎', '들깻잎', 그리고 그 사이를 건너다니는 '빗줄기' 등의 실물들을 배치할 때 비로소 한 편의 시가 된다. 실제로 비 오는 날에는 모든 게 젖지 않는가? 동물도 식물도 모두 젖고, 그걸 바라보는 나도 어느새 젖고 말고, 그 모든 것들을 적시는 빗줄기 역시도 원래부터 젖어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모든 것은 긴밀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의 실체를 대라고? 물증을 보여 달라고? 비 오는 날 밖에 나가본 사람은 누구나 그 즉시 알게 된다. 그리고 정진규의 시를 읽는 게 그 경험과 동일하다. 

  「방죽에 대하여」에서는 느닷없이 '너'라는 발화 대상을 설정한 대목이 서늘하게 가슴을 치고 간다. "초록 金剛 연뿌리 햇빛 쟁이고 쟁여 초록으로 개었다 닫힌 너도 열 수 있겠다 (중략) 꽃대궁마저 일어서 올부턴 분홍빛 뾰족한 향기 주먹으로 닫힌 네 가슴 두드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잘 있느냐 가시연꽃이다 아무나 덤벼들 수 없다 화알짝 향기로 개이는 날 너를 이 꽃방석에 앉힐 것이다 뿌리치겠느냐 그러면 죄받는다" 굉장한 공을 들여 다듬은 표현들과 너무도 평이한 표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오묘한 깊이를 자아낸다. 그렇지만 이 시는 화자가 돌연히 '너'를 호명할 때 비로소 빛을 뿜어낸다. 편지글도 아닌데, 처음부터 '너'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는데, 무작정 너를 부른다. 막무가내다. 그 무작정과 막무가내가 실은 너와 나를 하나로 이어준다.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은 「墓舍를 뜯어 오다」라는 시다. "재활용이 어려운 것들은 귀하다 단번은 귀하다 한 번만 써야 하는 것들은 귀하다 순결은 귀한 것인가 아무나 못 하니 귀하다 삼백 년이나 묵은 기왓장들이 아니신가 나는 아직도 그렇게 믿는 사람이다 사람을 못 만나서 그렇지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하늘의 별 따기 그런 기왓장을 만날 날이 올 것이다 그런 날을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다 서로 다른 것들도 아귀가 맞아야 한다" 이런 구절은 좋다. 아무튼 나의 스승님께서 내게 이 시집을 추천해주시며 한 말씀. "시는 자고로 이렇게 쓰는 거야.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꾸준히 좋은 시를 쓰는 거야." 나도 오래 살고 싶다. 내 삶도 오래 살고 내 시도 오래 살고. 그리하여 시와 삶이 하나로 만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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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2011-08-31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을 사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담연 2011-08-31 21:23   좋아요 0 | URL
시집을 사주시니 고맙습니다! 그 나이에 그렇게 쓸 수가 있다는 게 놀라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