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시대적 고찰 세계사 시인선 89
박남철 지음 / 세계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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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박남철의 시는 일상을 노래할 때 빛을 발한다. 어머니가 농사에 필요한 돈이 없어서 아들인 시인에게 전화로 돈을 꾸는 이야기(「어머니」), 네 살배기 아들이 동네 아이들과 칼싸움을 하고 놀다 수세에 몰려 집으로 도망쳐 눈물 흘리는 이야기(「실업 Ⅲ」), 이렇게 비루하고 사소한 시인 개인의 내적 외적인 사생활을 다룬 시편들이 오히려 박남철의 시에서도 뛰어난 명편이다. 참 부럽고 신기하다. 이런 일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그는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이다. 슬픔과 분노는 일반적으로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하는 한 쌍이다. 슬픔은 곧잘 나약한 이들의 감정인데 반하여 분노는 거칠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약자는 눈물을 그렇게 많이 흘리지 않는 법. 진정으로 눈물이 많은 사람은 나를 포함한 온 세상과 고투를 벌이며 분노하는 강자이다. 그런 이들은 더 많은 슬픔과 분노를 자청하고 끝끝내 감내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나 혼자 추측컨대 그의 온몸은 100% 눈물이며 100% 불덩이로 이루어져 있을 거다. 

  우리같이 메마르고 팍팍한 사람이 보기에는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일에서 시인은 툭, 하면 눈시울을 붉히고 툭, 하면 고래고래 소리치고 욕설을 퍼붓는다. 그만큼이 시인의 민감함이다. 비유한다면 바다 한 가운데 떨어진 민달팽이다. 그의 시에서 한없이 늘어지는 잔소리와 말줄임표는 이 세상을 건너느라 온몸이 타는 듯 느릿느릿 쓰라린 달팽이의 행로를 잘 담아낸다. 마초적일 정도로 고매하고 강직한 성품 앞에서 우리의 둔감함은 비로소 깊이깊이 뉘우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것이 결코 일상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이라는 역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성립하고야 만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얼굴에서 김수영의 표정을 읽고 가기도 하지만, 어쨌든 일상에서 우리를 이렇게 우울하고 노엽게 만드는 건 모두 다 그 거대한 사회 질서 탓임을 놓치지 않는 시선의 깊이가 중요하다. 또 한 편 시인이 언어를 다루는 솜씨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하기사 그토록 여리디 여린 마음 나타내려면 얼마나 섬세한 언어가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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