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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on Music (Paperback) - Theodor W. Adorno ; Selected, With Introduction, Commentary, and Notes by Richard Leppert ; New Translations by Susan H. Gillespie
Adorno, Theodor W. / Univ of California Pr / 2002년 8월
평점 :
Theodor W. Adorno, “Late Style in Beethoven,” in Essays on Music, trans. Susan H. Gillespie, Berkeley, Calif.: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2.
베토벤에서 말년의 양식(1937)
홍승진 옮김
[564] 중요한 예술가들의 말년 작품이 지니는 원숙함은 열매에서 발견되는 종류의 원숙함과 닮아 있지 않다. 그 말년 작품들은 대부분 둥글지 않고 패어 있으며 심지어 피폐하다. 달콤함은 전혀 없이, 씁쓸하고 가시가 돋은 채로, 그것들은 단순한 즐거움에 투항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고전주의 미학이 예술작품에게 버릇처럼 요구하는 조화를 모두 결여하고 있으며, 성장의 흔적보다도 역사의 흔적을 더 보여준다. 보통의 시각은 그것들이 거리낌 없는 주관성(subjectivity) 또는 ‘인격(personality)’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가지고 이 일을 설명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더욱 잘 표현하기 위하여 형식의 포장을 돌파하며, 조화를 그 고통의 불협화음으로 변형하고, 해방된 정신의 주권적 자신감을 가지고 감각적 매력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말년 작품은 서류 근처 속에서 예술의 외부 범위로 좌천된다. 사실상 바로 말년의 베토벤에 관한 연구들은 전기(傳記)와 운명을 참조하는 데 거의 실패하지 않는다. 인간의 죽음이 지니는 존엄성에 직면하여, 이는 마치 예술 이론은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고 현실을 위하여 퇴위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러한 시각의 부적절함에 대하여 진지한 반대가 거의 제기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이해해볼 수 있다. 진지한 반대는 누군가가 자신의 관심을 심리학적 기원이 아니라 작품 자체에 기울이자마자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발견되어야 할 것은 작품의 형식적 법칙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예술을 서류로부터 분리시키는 선을 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한 경우에서 베토벤의 모든 악보는 C# 마이너 사중주보다도 커다란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말년 작품의 형식적 법칙은 적어도 표현의 개념 아래 포괄되기 어렵다. 바로 말년의 베토벤으로부터 극단적으로 ‘표현 없는’, 멀리 거리를 둔 작품들을 취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작품들의 결론 속에서, 사람들은 새롭고 다성음악적으로 객관적인 구성만큼이나 거리낌 없이 개인적인 요소를 꼽아왔다. 작품의 피폐한 [565] 성격은 죽음 같은 결의와 악마적 유머를 언제나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종종 궁극적으로 신비한 것이다. 평온한, 거의 목가적인 음색을 가진 작품 속에서 감지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무형의 정신은 <cantabile e compiacevole>나 <andante amabile>와 같은 역동적 무늬를 피하지 않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관적’이라는 클리셰는 그의 자세에 단호히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베토벤 음악에서 주관성은—칸트에 의해 부여된 온전한 의미에서—형식을 뚫고 나아감으로써보다는 근본적으로 형식을 창조함으로써 작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열정>은 여러 예시들 중 하나로 꼽힐 수 있다. 인정하건대 더 간결하고, 형식적으로 더 빠듯하며, 이후의 사중주보다 더 조화로운 그것은 그만큼 또한 더욱 주관적이고, 더욱 자율적이며, 더욱 자발적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마지막 작품들은 신비의 우월함을 유지한다. 그것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
말년의 양식에 관한 [지배적] 시각을 수정하는 데 이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작품들의 기법적 분석에 의하여 숙고 중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는 특수성(particularity)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시각에 의하여 주도면밀하게 무시되고 있다. 이 특수성은 관습(convention)의 역할이다. 이는 노년의 괴테, 노년의 슈티프너에게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특수성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자세의 대표라고 알려진 베토벤에게서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이는 문제를 보다 예리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모든 ‘주관주의적’ 방법론의 첫째 계명은 관습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며, 관습을 개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습은 표현적인 충동을 따르는 측면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중기의 베토벤은 잠재적인 중간음의 창조를 통하여, 그리고 리듬과 긴장과 다른 수단들을 통하여, 언제나 전통적으로 동행하는 형상들을 그의 주관적 역동성 속으로 끌어들이며, 그의 의도에 따라서 그 형상들을 변형시킨다. 만약 그가 실제로, 예컨대 <제5번 교향곡>의 첫 운동에서와 같이, 주제적 소재로부터 그 형상들 자체를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그 형상들 자체의 독특함이 지니는 힘에 관한 관습으로부터 그 형상들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말년의 베토벤은 그렇지 않다. 그의 형식 언어 속 모든 곳에서, 심지어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다섯 곡과 같이 단일한 통사에 형식 언어가 기여하는 곳에서도, 흩뿌려져 있는 관습의 공식들과 구절들을 찾을 수 있다. 그 작품들은 장식적인 트릴(trill)의 시퀀스, 카덴스, 피오리투라로 가득 차 있다. 때때로 관습은 대담하고, 가식적이지 않으며, 변형되어 있지 않은 형식 속에 나타난다. <소나타 작품번호 110>의 첫 번째 주제는 16번째 마디에서 뻔뻔할 만큼 원초적인 반주를 취한다. 이는 중기의 양식에서는 거의 용납되지 않았다. <바가텔> 중에서 마지막 것은 도입부와 종결부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들은 오페라 아리아의 산만한 서곡과 닮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다성악적 풍경의 가장 감정이 없는 층, 고독한 리리시즘의 가장 절제된 동요 속에 섞여 있다. 아마도 말년의 양식을 비롯하여 베토벤에 관한 어떠한 비평도 [566] 관습의 단편들을 단순히 심리학적인 동기나 외양에 무관심한 소산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못하다. 궁극적으로, 예술의 관습은 언제나 단순한 외양을 이룬다. 주관성 자체에 대한 관습의 관계는 형식적 법칙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 형식적 법칙으로부터 말년 작품의 내용은 부상한다—적어도 내용이 감동적인 유물 이상을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만큼.
이러한 형식적 법칙은 죽음에 관한 사유 속에서 정확히 드러난다. 죽음의 현실에 직면해서, 예술의 권리가 그 힘을 잃는다면, 죽음은 물론 작품의 ‘주관’으로 위장하여 작품 속으로 직접 흡수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오직 창조된 존재 위에만 부과된다. 그러므로 죽음은 오직 굴절된 양상 속에서 알레고리로 나타난다. 심리학적 해석은 이 점을 간과한다. 필멸적(mortal) 주관성을 말년 작품의 본질로 공표함으로써, 심리학적 해석은 예술 작품 속의 망가지지 않은 형식 속에서 죽음을 감지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는 형이상학의 기만적인 왕관이다. 진실로, 그것은 말년 작품 속에서 주관성의 폭발적인 힘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관성의 폭발적인 힘을 작품 자체가 투쟁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의 방향 속에서 찾는다. 즉 주관성 자체의 표현 속에서 말이다. 그러나 필멸자로서의 이러한 주관성은, 죽음의 이름 속에서, 예술 작품으로부터 진리 속으로 사라진다. 말년의 예술 작품 속에서 주관성의 힘은 성마른 몸짓이다. 그 몸짓을 가지고 주관성의 힘은 작품들 자체에서 벗어난다. 주관성의 힘은 작품들의 속박을 부순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표현 없이 예술의 외양을 벗어 던지기 위해서. 작품들 자체에 관하여 주관성의 힘은 단편들만을 뒤에 남기며, 자기 자신과 소통한다. 암호처럼, 자신으로부터 풀려난 빈자리를 통해서만. 죽음에 감격해서, 거장의 손은 자신이 형성시키곤 했던 소재의 덩어리를 석방시킨다. 그것의 눈물과 균열, 존재(Being)에 직면한 자아의 유한한 무력함에 대한 목격자들은 그것의 최종 작품이다. 따라서 파우스트 2부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에서 소재의 과잉, 더 이상 주관성에 의하여 관통되거나 장악되지 않는 관습들이 단순히 남게 된다. 주관성으로부터의 탈주를 가지고, 그것들은 쪼개져나간다. 그리고 조각들로서, 줄어들고 유기되며, 그것들 자체는 마침내 표현으로 되돌아간다. 이 지점에서는 더 이상 고독한 자아의 표현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와 그 몰락에 관한 신화적 본성의 표현이 된다. 말년 작품은 창조된 존재의 단계를 상징적으로 밟는다. 그 하강의 순간적인 정지 속에 있는 것처럼.
따라서 바로 그 말년의 베토벤에게서 관습은 그 자체의 벌거벗은 표상으로서 표현을 발견한다. 이는 그의 양식에서 종종 언급되는 축약의 기능이다. 축약의 기능은 음악적 언어를 단순한 구절로부터 해명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구절을 오히려 주관적 장악의 외양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다. 단순한 구절은, [567] 단편의 역동성으로부터 촉발되고 석방되어, 스스로를 위하여 발화한다. 그러나 오직 잠시 동안만, 주관성은 도주하면서 그 구절을 통과하고 그 구절의 의도가 지니는 냉혹한 빛 속에서 그 구절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점점 커짐(crescendi)’과 ‘점점 작아짐(diminuendi)’은, 음악적 구성에서 독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말년의 베토벤에게 이따금 삐걱거림이 된다.
그는 더 이상 풍경을 모으지 않는다. 이미지 속으로 이제 저버려지고, 소외되면서. 그는 주관성에 의하여 점화된 불빛으로 풍경을 비춘다. 그 주관성은 그것의 역동성이라는 관념에 충실한 작품의 벽에 맞서 스스로를 부수고 내던진다. 그의 말년 작품은 여전히 과정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발전으로서가 아니라, 극단들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로서. 그 극단들은 더 이상 어떤 안전한 중간 지대나 자발성의 조화도 허락하지 않는다. 가장 정확한 의미의 극단들 사이에서: 하나는 단선율곡, 즉 중요한 단순 구절의 ‘unisono’이다; 다른 하나는 사색 없이 그 위로 떠오르는 다성음악이다. 주관성은 그 극단들을 한 순간 속에 강제로 가져오며, 빽빽한 다성음악을 그것의 긴장으로 채우며, ‘unisono’를 가지고 다성음악을 쪼개고,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벌거벗은 음식을 뒤에 남기며. 그것은 단순 구절을 주관성이 돌로 변했다고 표시하는 순간으로 놓는다. 중간 휴지, 즉 말년의 베토벤을 무엇보다도 특징짓는 갑작스러운 불연속성은 이러한 쪼개짐의 순간들이다. 작품은 뒤에 남겨지는 순간에 고요하며, 그것의 공허함을 바깥쪽으로 돌린다. . . . 객관은 파열된 풍경이고, 주관은 삶 속으로 타오르는 빛이다. 그는 주관과 객관의 조화로운 종합을 야기하지 않는다. 분열의 힘과 같이, 그는 시간 속으로 그것들을 떼어내 버린다. 아마도 그것들을 영원한 것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예술의 역사에서 말년 작품은 파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