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 훌륭한 영화를 극장에서 놓쳐서 컴퓨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 보게 되었다. 집에서 보게 된 것의 좋은 점은, 보다보니 와인이 마시고 싶어졌는데, 음,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는 것.

이 영화가 나온 후 와인 판매량이 10%가 늘었다고 한다 (전 세계에선지 미국에서만이지는 잘 모르겠다). 미국 와인의 특징이라면, 와인 종이 곧 단일 품종의 포도여서, 와이너리마다 기후가 다른 해마다의 포도맛의 차이를 맛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것이다.  햇빛 찬란한 기후, 영양 풍부한 신대륙의 토양은 맛있는 포도를 길러낸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과 호주의 와인은 싸고 맛있고 접근하기 쉬운 방식으로 와인의 대중화를 주도했다.

미국 와인은 캘리포니아에서 거의, 오레건에서 조금, 그러니까 서부 해안 인근에서 주로 생산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40분쯤 북쪽으로, 나파 밸리와 소노마 카운티는 캘리포니아 와인의 주요 생산지이며 와인농장들이 끝없이 이어진 곳이다. 차로 한시간을 달려도 양옆으로 계속 포도밭이다.

두 곳 다 한번씩밖에 안 가보았지만, 괜히 소노마 카운티 더 마음이 간다. 굳이 비교하자면 나파 밸리는 어쩐지 포도밭과 와인만 있는 대량생산공장 같고, 소노마 카운티는 뭐랄까, 좀 더 농원 같고, 사람이 사는 것 같고 그렇다. 소노마 카운티의 와이너리들에는 포도밭 체험, 도자기 만들기, 요리 경연 같은 이벤트들도 다양하고 워낙에 관광지로 잘 개발해서 스파가 많다. 그러니까 와이너리 돌아다니며 시음하다가 마사지 좀 받다가 해변에 가서 또 노닥거리다가, 라벤더 향도 좋고 (와인 컨츄리엔 라벤더가 지천으로 자란다) 그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웰빙도 겸하여 잘 놀고 잘 마시고 잘 쉴 수 있는 곳이다.
(와이너리들의 크기로 보나, 브랜드로 보나, 소노마 카운티의 와이너리들이 나파 밸리보다 소규모라거나 할 수는 없다. 그냥 두 지역에 대한 내 멋대로의 인상이다)



소노마 카운티 알렉산더 밸리, 겨울 풍경



여러 와이너리 이정표

그 다음으로 유명한 와인 컨츄리가 사이드웨이의 배경인 중부 캘리포니아이다. 산타바바라와 솔뱅에서부터 북쪽으로 산 루이스 오비스포 즈음까지 해안의 약간 안쪽을 따라 펼쳐진 포도밭 언덕들과 파란 하늘의 경치가 일품이다. 와이너리를 들르지 않더라도 오른쪽에 포도밭 언덕과 바위산, 왼편으로 푸르고 아름다운 태평양 해안을 엇갈려 보게 되므로 기분이 좋아지는 드라이브 코스이기도 하다.

와이너리를 방문하면 공짜로 또는 5달러 정도를 내고 그 와이너리의 최근 5-7종의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5달러를 내는 곳은 대부분 잔값이라고 한다. 다 먹고 잔을 갖고 오면 된다)



4월의 산타바바라, 와이너리에서 바라본 풍경

와인이란 섬세하여 빛도 보고, 액체의 질감도 보고, 그냥 냄새를 맡아보았다가 잔을 돌려 냄새를 맡아보고 혀를 굴리며 맛을 보고, 그래야 한다고 한다. 무엇이든 아는 만큼 재미난 법이지만 법도에 좀 어긋난다고 해서 즐거움이 크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 감각에 닿는 것 아닌가? 좋은 것은 좋은 줄 알게 마련. 설교하듯 가르치듯 와인을 따라주는, 또 잔의 모양과 와인의 온도 먹는 순서 등등을 안 지키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아는 와인웨이터는 딱 질색이다. 그런 잔소리를 듣다가 제일 중요한 입맛과 기분이 상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말이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어느 와이너리에 들렀다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빠져나오는 장면이 있다. 마일즈처럼 뭘 좀 알아도, 기분이 잡치면 병나발을 불 수도 있고 아끼던 고급 와인을 햄버거 가게에서 콜라잔에 따라먹을 까닭도 있는 것이다. )

들은 말로 와인에 관한 영화라길래 잔뜩 기대를 하고 보아서 그랬는지, 막상 영화는 그저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지극히 일상적인, 리얼리스틱한 사람들이다. 캘리포니아의 와이너리에서 일하는 동양여성을 만난다면 꼭 스테파니 같을 것이고 (입양되어 자랐고 18살이 되자마자 집을 뛰쳐나왔고, 흑인 또는 백인 남성 사이에서 나은 혼혈아가 있고, 이혼했거나 미혼이고, 활달하고 긍정적인 성격) , 로스엔젤레스 인근에 많이 사는 아르미니언 이민자들은 가업을 일구고 (틀림없이 보석 가공업이다) 저택 같은 집을 소유할 만큼 한자리 잡고도 사업 물려줄 아들이 없을 땐 별볼일 없는 영화배우인 잭 같은 백인 남성과 기꺼이 딸을 결혼시키기도 한다. 음악과 함께 찬란한 포도밭, 잠깐 스쳐가는 풍경이었지만, 포도를 따고 나르는 사람들은 모두 히스패닉이고, "좋아하는 와인에 묻혀 푹 쉬겠노라"는 우아한 휴가 계획을 가진 남자는 아직도 어머니의 쌈짓돈을 슬쩍 하고 분위기는 지독히도 못 맞추며, 그놈의 휴가 계획은 자꾸 어긋나고, 또 따지고 보면 뜻한 바에서 크게 벗어난 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영화의 배경은 산타바바라 카운티 와인 컨츄리이고 주인공들은 이래저래 와인과 관련이 많다. 어떤 사람이 좋아하는 책이나 음악 또는 직업에 그 사람의 가치관과 삶에 대한 진심이 묻어나듯, 결함 많은 인물들의 사는 이야기, 삶에 대한 태도가 와인에 녹아들고 와인잔에 비쳐난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교훈은 "남자들이란 하여간…"이다.)
그러니까 다시, 이 영화가 와인 소비량의 증진에 기여한 까닭을 생각해 보건데, 비싼 와인 창고를 들여다 보거나 수백 달러짜리 빈티지 와인들을 선보이며 와인의 신비하고 오묘함을 강론하는 것이 아니라, 와인 맛의 섬세함이란 다양한 가치관과 일상을 담아낼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어서이지 않을까. 지독하게 리얼리스틱한 사람들의 사고 뭉치 여행을 따라가다 보니 아름다운 포도밭 사이로, 대단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별한 진심이 저렇게 열올리며 묻어나는 이런 저런 와인 맛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왜 피노를 그렇게 좋아하세요?" (대단히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요? 하면서 물었다)
"글쎄요. 기르기 어려운 포도죠. 껍질도 얇고 온도 변화에도 민감하고 일찍 익고… 아무데서나 자라지 않죠. 항상 돌봐주고 관심을 가져야 해요. 사실은 감춰진 조그만 구석에서만 자랄 수 있어요. 정말로 인내심과 사랑이 있는 사람만이 기를 수 있죠. 피노의 잠재력을 이해하려고 많은 시간을 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피노의 진정한 맛을 끌어낼 수 있어요. 그리고 나면 그 맛은, 가장 빛나는, 소름끼치는, 미묘한…"

오호, 나는 피노라면 오레건 피노느와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멜로처럼 달지 않고 까베르네나 시라처럼 무겁지 않고, 담담하면서도 맑고 섬세한... 원래 맛이 그런 줄로만 알아서 나중에 캘리포니아 피노 맛을 보고는 "피노 치곤 너무 달고 자극적이야" 하고 말았는데, 이런 매력이 있다면 소노마와 산타바바라의 피노도 그 차이들을 비교해 보며 마시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번에는 마야처럼, 이 피노가 자라는 캘리포니아의 햇빛은 어땠을까, 2001년의 산타바바라에는 무슨일이 있었을까, 오레건의 피노는 비도 많이 맞았겠지... 생각하면서.

화면은 좀 뿌옇다. 그게, 카메라를 그렇게 잡은 것이 아니라, 캘리포니아 와인 컨츄리의 햇빛이 그렇다. 영화의 첫장면부터, 아, 저 햇살, 하면서 아득해지고 말았다. 



어느 독일어 웹사이트에서 그새, 피노느와 홍보용으로 이 영화를 써먹고 있다.
(이미지를 찾기 귀찮았는데, 한데 잘 모아두었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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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11-28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들이란 하여간..."에 동감. ㅋㅋ

하이드 2005-11-28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기없던 종목인 피노누아의 판매량이 20% 증가 했다는 기사 본 기억이 나네요. 사실 저도, 저 영화 보고, 안 찾던 피노누아 품종 찾아서 영화 생각하며 마셨던 기억이 나네요. '특별한 날 마실 와인'이기 보다는 결국 그 와인을 따는 날이 '특별한 날' 임을 깨닫게 되었어요. 근데, 아무리 그래도 ㅜㅜ 마지막에 편의점에서 스티로폼 컵에 따라 마신건 너무 눈물났어요. 흑.